일단 손목시계는 둘째치고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나가야 한다. 양주로 온 이후 생활이 너무 나태해져가고 있다. 한국에 있었으면 주말도 스터디와 자격증 공부로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중국 와서 하겠다던 이직을 위한 공부는 환경의 느슨함에 손을 놓은 지 오래다. 인간은 환경을 극복하기보단 순응하며 살아온 것이 분명하다. 출근해서 시간만 때우다 오후 4~5시가 되면 퇴근, 주말에는 온전히 나의 시간이다. 총경리는 회사가 쉽게 정리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지 얼마 전 아내를 이곳으로 데려왔다. 주말에는 아내와 이곳 저곳 골프를 치러 다니며 여가를 즐긴다. 다시 신혼으로 돌아간 모양이다.
그전에 혼자 있을 때는 나를 불러 밥도 먹고 이리저리 돌아다니시더니 이제는 어느 정도 여기 생활에 적응하셨는지... 혼자서도 곧 잘 돌아다닌다. 뭐 전용 기사가 있다 보니 불편할 것이 없다. 그 덕에 나는 자유로운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이 그립다는 생각은 커녕 그냥 이 여유로운 시간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샤워를 끝내고 광활한 40평 아파트의 거실에서 팬티만 입은 채 장주임이 사다준 중국의 최신가요 CD를 플레이한다. '중경삼림' 영화 속 장국영처럼 속옷 차림으로 이리저리 스텝을 밟는다. 거실은 잠시 나만의 무도회장이 되고 모닝커피 한 잔과 어젯밤에 돌아오는 길에 시내 빵집에서 사 온 딸기 페스츄리와 함께 일요일의 한가로운 브런치를 즐긴다. 미궁의 사건 실마리를 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와~ 뭐야 여긴?"
그녀가 알려준 곳이 어딘지 몰라 잡아탄 택시가 멈춘 곳은 으리으리한 고급 호텔의 입구였다. 그녀와는 호텔에서 헤어져서 또 다시 호텔에서 만난다. 이 호텔은 그때 내가 나왔던 호텔과는 레벨이 달라 보인다. 5성급 호텔이다. 양주에 이런 호텔이 있었나 싶다. 부담스러운 금색 도금으로 뒤덮인 호텔 로비 입구 유리 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며 기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亲爱的~ 你来了~ 偷看什么呀?有什么好看的?进去吧"(자갸~ 왔어?뭘 그렇게 훔쳐보냐? 뭐 좋은 거 있어? 들어가자!)
그녀가 뒤에서 나의 팔을 덮치듯이 휘감으며 나를 끌고 호텔 로비로 들어간다. 검은색 원피스 정장에 검은색 구두 검은색 머리칼이 더욱 그녀의 하얀 얼굴을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뭐야 조문객이야? 저승사자야? ' 온통 검은색이다. 속으로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그녀의 알몸을 보았던 나였다. 그녀는 정말 황금비율의 몸매를 가지고 있다.
그녀도 그걸 아는지 자신의 몸매를 가장 솔직히 드러낼 수 있는 옷을 입고 있다. 안 그래도 적지 않은 키에 굽이 높은 하이힐까지 신고 있어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려 끌려가고 있다. 뉴스에서 종종 보던 경찰에 연행되어가는 피의자 같은 분위기다.
'도대체 얘는 정체가 뭐야?'
"看什么动物园里的猴子似的?"(뭘 그렇게 동물원 원숭이 보듯 쳐다보냐?)
"那你为什么对我这样?"(넌 뭔데 나한테 이러세요~?)
그녀의 당당함과 거침없는 말투 그리고 외모에서 흘러넘치는 도도함이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여자이다. 그녀가 나를 끌고 간 곳은 호텔 뷔페이다. 산해진미가 가득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브런치를 먹지 말걸 그랬다.
그녀는 내 물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호텔 정문과 잘 어울리는 금색 줄이 반짝이는 구찌 가방을 자리에 놓고 음식을 픽업하러 나간다. 중국에 온 뒤로 어이가 없는 일을 너무 자주 당해서 이젠 무감각해진다. 일단 눈에 보이는 저 산해진미들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접시를 들고 가장 비싸 보이는 음식들을 위주로 차곡차곡 쌓아간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앉아있다. 나를 기다린 모양이다. 접시에는 몇 가지 딤섬과 해산물 그리고 작은 스테이크가 정갈하게 담겨 있고 그 옆에는 오묘한 붉은색과 보라색의 경계쯤 되는 색을 가진 와인이 담겨있다.
"哇~ 你能吃得完那些??" (와~ 그걸 다 먹을 거야?)
태산처럼 쌓아 올린 나의 접시를 본 그녀는 경악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내가 자리에 앉자 그제야 그녀가 젓가락을 들어 딤섬을 하나 입에 넣는다. 나도 일단 쌓아 올린 산을 빠른 속도로 깍아내려갔다. 그렇게 서로는 잠시 동안 말없이 먹는 행위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는 음미고 나는 섭취다.
"你很可爱"(너 참 귀엽다)
"푸웃~"
먹던 음식이 튀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막아냈다. 시선이 나에게 고정된 채 젓가락만 움직이며 음식을 정확히 입으로 가져가며 무표정과 함께 내뱉은 말이다. 난 가져온 콜라를 들이키며 입안의 남은 음식들을 위 속으로 씻어 내렸다.
"我的手表在哪儿?"(내 시계는 어딨어요?)
"哦~对了,给你,还有这个也你拿着吧, 看来那个手表太旧了呀” (아 참! 여기 있어, 이것도 너 가져, 그 시계 너무 오래되어 보여서)
그녀는 고급스러운 시계상자와 낡은 나의 손목시계를 함께 건넨다. 그 상자 속에는 신상으로 보이는 스와치의 패션시계가 들어있다.
“你为什么给我这个?” (이걸 왜 나한테 주는건데요?)
“因为这里的饭还挺贵的,所以我有点儿心里不自在嘛,收下吧 ”(왜냐하면 여기 밥이 좀 비싸거든, 내가 좀 미안해서 그러지 그냥 받아둬)
“…”
밥값이 비싸다는 말이 적잖히 마음에 걸린다. 입장할때부터 느끼긴 했지만 이 시계까지 팔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일단 받아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还有你怎么知道我的名字,我都不知道你是谁..."(그리고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지? 난 그쪽 이름도 모르는데...)
나는 나의 시계를 손목에 차면서 묻는다. 비록 낡은 손목시계지만 나에겐 나름 의미있는 추억이 깃들여져 있다. 사실 이 시계는 오떡이가 차고 다니던 시계였다. 나는 예전엔 시계를 차고 다니는 버릇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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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맨날 늦을래? 안되겠다. 손목 줘봐!”
“뭐야? 이걸 왜 내 손목에 채우는데…”
“이제 시간 좀 보고 다니라고”
“넌 어쩌고?”
“난 이제 이 시계 지겨워서 새걸로 하나 장만할려고 큭큭”
“새걸 사서 나 주면 안될까?”
“죽을래? 그냥 이거 차!”
그리고 몇 일 뒤 오떡이의 손목에는 나랑 똑같은 새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처음으로 커플 룩을 맞췄다. 이 시계에는 그녀의 체취가 묻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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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看来你昨晚的事情都记不得了 哈哈,我叫春艳,叫我艳艳就可以了"(정말 그날 밤 하나도 기억이 안 나나 보네 하하하 참 난 춘옌이라고 해 그냥 옌옌이라고 불러)
이름도 모르는 아니 기억도 나지 않는 여자랑 같은 침대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경계심 가득한 나와는 달리 그녀의 여유 있고 담담한 태도가 누가 여자고 남자인지 헷갈린다. 그녀는 음식도 얼마 먹지 않고 커피를 마시는 모습이 이미 식사를 끝낸 모양이다. 5성급 호텔답게 음식 맛도 고급스럽다. 마음 같아선 저녁까지 먹고 가고 싶다. 먹긴 먹었는데 밥값이 걱정된다. 그녀는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나를 우아한 자태로 커피를 마시며 관찰하고 있다.
"아 배부르다!"
"什么意思?"(무슨 말이야?)
그녀는 내가 한 한국말이 신기한 듯 물어본다. 나는 젓가락을 놓고 등을 등받이에 기대며 배를 한 번 쓰다듬는다.
"吃完了?"(다 먹었니?)
"差不多"(응)
"我吃好了,你来买单吧" (잘 먹었어, 밥값은 네가 계산해)
그녀는 종업원을 불러 계산서를 가져다 달라고 한다. 지갑을 꺼내 테이블 밑에서 들어있는 지폐를 확인한다. 백 위엔 짜리 2장과 20위엔 1장 5위엔 2장 총합이 230위엔(약 38000원)이다. 종업원이 들고 온 계산서에는 400위안이 찍혀있다. 나의 확장된 동공과 벌어진 입을 본 그녀는 피식 웃더니 내 손에 쥐어진 계산서를 낚아챈다. 그리고 100위안짜리 4장을 계산서에 끼워 넣고는 종업원에게 건넨다.
"走吧~"(나가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따라나선다. 그녀는 호텔 지하 주차장으로 간다. 멀리서 검은색 아우디 TT 로드스터의 후미등이 "삐빅" 소리와 함께 깜빡거린다. 검은색 마니아인가보다 혹시 저승 사자인가하는 생각이 든다.
"上车吧"(타!)
"去哪儿?"(어디 가는데...?)
"送你回家"(집에 데려다줄게)
엉겁결에 그녀의 옆 좌석에 올랐다. 그녀는 능숙한 핸들링으로 차를 주차장에서 빼내어 도로로 진입한다. 그리고 차 본연의 성능을 발휘하며 도로를 질주한다. 정면에서 들어오는 태양빛이 눈에 거슬리는지 신호대기 중에 얼굴을 다 감쌀듯한 선글라스를 꺼내 쓰고는 한쪽 팔은 창밖에 걸친 모습이 누아르 영화 속 여주인공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담배만 한대 물면 여자 주윤발이 따로 없다.
"你有女朋友吗?"(여자 친구 있어?)
"这个干吗"(그건 왜 묻는데...)
"我们交往怎样?"(우리 사귈래?)
"我干吗和你交往啊..."(헐 내가 왜 너랑 사귀어야 되는데...)
"我们俩上床了嘛 哈哈"(같이 잤으니까 하하하)
그녀는 정면을 주시하며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내뱉는다. 아침에 알몸으로 호텔방에서 만난 지 하루가 지나고 아는 거라곤 이름과 꽤 괜찮은 운전실력 그리고 영혼 없는 말투뿐인 여자가 대뜸 사귀자는 말을 건네는 건 분명 사이코패스 거나 아니면 뭐 좀 노는 여자겠구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이미 차는 나의 집 근처까지 와있었다. 가장 중요한 그날 밤 사건을 묻는다는 걸 잊고 있었다. 오늘 이 여자를 만나러 나온 목적을 깜빡하고 있었다.
거절할 수 없는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내는 그녀는 지능적이다. 뭔가 함정에 말려들고 있는 기분이 드는걸 왜일까? 남자는 자고로 여자와 술 그리고 도박을 멀리해야 한다고 들었다. 도박은 소질도 관심도 없지만 여자와 술의 유혹을 뿌리치는 건 쉽지 않다. 특히 그 여자가 미인이라면 더욱더... 중국에는 자고로 영웅호색(英雄好色)이라는 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