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별다방과 MGC 사이

카페의 미래에 관한 상념

by 글짓는 목수

별다방에서 MGC로 자리를 옮겼다.


한국에 돌아온 뒤 처음엔 집에서 가까운 별다방을 자주 찾았다. 하지만 이제는 MGC에서 자주 글을 쓴다. 그린과 브라운 색감이 가져다주는 아늑한 공간에서 봄날의 개나리 같이 눈부신 노란색으로 가득 찬 공간으로 옮겼다. 장소를 옮긴 이유는 단순했다. 싸기 때문이었다. 원가 대비 너무도 비싼 커피값을 부담해야 하는 별다방은 서민 경제 상황과 동떨어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별다방을 찾는 사람들은 끊이질 않는다. 익숙함에 머물고자 하는 자들이다. 한 번 길들여진 고급스러움은 절대 저급스러움으로 내려갈 수 없다. 그게 그 어떤 실제적인 제품의 변화 없이도 그 제품이 포장된 그리고 놓인 곳의 브랜드와 공간의 차이만으로도 고급과 저급으로 나뉠 수 있다. 같은 인간도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급이 나뉘는 것처럼.

별다방 & MGC

노란 세상은 젊었다. 매일 아침 그곳에 나타나는 사람들은 노란 개나리처럼 봄을 상징하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반면 그전까지 출근하던 별다방에는 중년의 직장남성 혹은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그 정도의 비용 차이는 크게 신경 쓸 것이 되지 않는다. 기존의 공간과 기분을 그대로 느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람들이 MGC로 옮긴 덕에 사람이 줄어 더 좋을 수 있다. 좀 더 특별해진 기분이다. 더욱이 노란색은 다소 부담스럽고 유치스럽다. 어른은 유치함과 멀어진다.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자들이다. 약간은 어둡고 차분한 분위기가 그들에게는 안정감을 가져다주는 모양이었다.


나 또한 그러했다. 그린과 브라운의 차분함이 좋았다. 하지만 이젠 노란색도 좋다. 국내외를 불문하고 오랜 시간 사는 환경과 일하는 환경을 너무 자주 바꾸며 살다 보니 환경의 변화에 그리 민감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또한 커피 맛을 구별할 수 없는 나의 저렴한 혀의 감각 덕분인지 나는 양 쪽의 커피 맛보다는 카페인만 흡수하면 되었다. 집에서 다소 멀리 떨어진 노란색 카페는 내가 매일 아침 1km가 넘는 강변 산책로를 걸으며 사색하는 시간을 가져도 주었다. 그렇게 오디오북을 들으면서 산책 간에 많은 상념들이 떠오른다. 메모한다. 노란 세상에 도착하면 산책과 사색 간에 떠올랐던 것을 노트북에 적어 내려간다.

[비밀 문장] with STarbucks and MGC

30여분의 걷기가 끝나면 글쓰기가 시작된다. 글 속에서 하루가 다 지나간 줄 알았다. 그런데 1~2시간이 지났다. 눈을 뜨고 있었지만 눈을 뜬 상태에서 깨어난다. 눈앞에 노트북 화면에는 또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했다. 그동안 주변에 몇몇 젊은이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서 나처럼 노트북으로 무언가에 열중하는 모습이 그제야 눈에 들어온다.


이른 아침 카페를 찾는 젊은이들은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는 열정을 품은 자들일 것이다. 이전에 이른 아침 별다방을 찾던 중년의 남녀들과는 그 분위기가 다르다. 출근 전 카페에 들른 중년의 남자는 커피를 마시며 하루 일과를 체크하고 책이나 태블릿을 들여다보며 하루 일과를 준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옆에 앉은 중년의 여성은 최근 불어 닥친 문학 열풍의 조류에 올라탄 듯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탐독하고 있었다. 다른 한쪽 구석에는 이른 아침부터 부부인지 연인인지 모른 중년의 커플이 손을 꼭 잡고 서로에게 기대어 창밖의 경치를 구경한다. 이른 아침 별다방과 MGC는 다른 분위기이다.


중년과 청년 사이


중년은 이제 열정보다는 편안함과 아늑함 속에서 삶의 안정과 여유를 찾고 청년은 언제나 불확실한 미래의 불안을 열정으로 불태우며 살아간다. 이건 한 인간의 삶이 언제나 불안정에서 안정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고자 함이다. 하지만 고통이 사라지고 안정이 찾아들면 권태가 그 자리에 스며들기 마련이다. 그래서 차라리 약간의 불안을 항상 가지고 사는 편이 나을 수 있다. 그럼 고통도 권태도 불안에 밀려 스며들지 않기 때문이다.


Starbucks and MGC

나는 불안이 어울리나 보다. 사실 그 불안이 나의 열정을 불러오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처럼 부리나케 타자를 갈겨나갈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타자를 갈기고 있으면 중년의 남녀들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본다. 사실 나는 그들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지 모른다. 내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어느 날 너무도 조용한 카페에서 한참을 몰입 후에 깨어났는데 그 넓은 공간에 세 명의 남녀가 앉아 있었는데 모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단 한 장면으로 추측하는 것뿐이다.


지금 여기 노란 세상은 젊음과 어울리는 흥겹고 빠른 템포의 음악이 아침부터 흘러나와 나의 키보드 소리를 가려준다. 그리고 최근에 바꾼 노트북의 키보드는 저소음 기능이 탑재되어서 인지 예전 것보다 소음이 덜하다. 그리고 뭐 주변에 앉은 다른 젊은이들도 나처럼 모두 저마다의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을 귀에 끼고 앉아 주변에 신경을 끄고 자기의 일에 몰두하고 있다. 주변에 시선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MZ세대를 MGC가 아주 잘 공략한 듯 보인다.

이제 카페는 더 이상 커피를 파는 곳이 아니다. 카페는 다용도 공간이 되었다. 그래서 카페는 내부의 인테리어와 좌석의 배치와 흘러나오는 음악과 그곳을 찾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미묘하고도 복잡한 포뮬러가 그 카페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좌우하게 된다. 그래서 카페는 저마다의 개성을 가져야 한다. 그 개성이 이처럼 여러 가지 요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돈이 많다면 이것을 처음부터 의도하고 유도할 수도 있다.


카페의 4가지 종류


개인적인 생각으로 앞으로 카페는 크게 4가지로 분화되지 않을까? 프랜차이즈 카페와 럭셔리 개인 카페와 무인카페 그리고 테마와 관계를 담은 카페이다. 프랜차이즈 카페는 별다방과 MGC처럼 양극화로 갈 것이고 돈 많은 은퇴자들은 경치가 좋고 목 좋은 곳에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로 꾸며진 카페를 지을 것이다. 반면에 소규모 자영업자는 올라가는 인건비를 피해 곳곳에 무인카페를 늘려갈 것이다. 그리고 돈 없는 감성팔이는 테마와 이야기를 품은 카페(북 카페, 테마 카페, 이벤트 카페등)로 소규모 지역 단골 커뮤니티 공간을 형성하지 않을까. 나는 이 넷 중에서 마지막에 마음이 간다.

럭셔리 카페 and 무인카페

지금은 프랜차이즈 카페에 앉아 글을 쓰지만 나중에 내가 카페를 하게 된다면 감성을 파는 지인들과 단골들이 매일 찾아오는 카페에서 대화와 토론을 나누는 커뮤니티 공간을 운영해 보고 싶다. 그 감성이란 커피와 차를 마시며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다. 그 이야기가 이어지고 퍼져나가서 주변에 그런 카페들이 계속 늘어나는 것이다. 모든 카페는 자기만의 테마를 가지고 개성을 가진 한 인간처럼 카페들이 생겨나고 번식하는 것이다. 카페가 지역 커뮤니티 공간처럼 되는 것이다. 꿈같은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그래서 간절할 수 있다.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루에 일부를 떼어내어 바쁨에서 벗어나 느림과 여유와 이야기 속에서 잠시 자신 만의 생각을 꺼내어 종종 사람들과 그것을 나누며 함께 키워가는 공간이다.

북카페

“아주 그냥 소설을 쓰고 앉아 있구만.”


그렇다. 소설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가 자신 만의 소설을 가지고 있다. 이 세상에 소설 아닌 것이 어디 있겠는가? 사실은 소설이 객관화된 것뿐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소설이 허무맹랑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그 소설이 자신 안에만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나누고 드러내다 보면 세상은 조금씩 그렇게 변해가기 마련이다. 소설 같지 않은 삶이 어디 있는가. 소설은 삶을 담은 이야기이다. 기록되지 않기 때문에 소설이 아닐 뿐이다. 삶의 기억과 상상이 연결되고 과거와 현재의 느낌이 융합되면 자신 만의 이야기가 탄생한다. 나는 그런 삶을 나누고 이야기하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것을 책 속에서 끄집어내는 것이다. 서로 다른 너와 내가 대화하기 위해서는 공통의 매개체가 필요하다. 책은 그 매개체이고 공간은 그 촉매제이다.


전쟁터인가 놀이터인가


삶을 전쟁터 같은 현실로만 여기고 사는 자들은 미간에 주름이 늘어가지만 삶을 놀이터 같은 꿈처럼 생각하고 사는 자들의 얼굴에는 눈가에 주름이 늘어간다. 세월이 가면 얼굴에는 그 자의 삶이 스며들어 각인되는 법이다. 너무 늦으면 인상은 딱딱하게 굳어져 더 이상 바꾸는 것이 어려워진다.

영화 [기생충] 중에서

“돈이 다리미라구, 돈이 주름살을 쫘악~펴줘”


영화 [기생충]에서 극 중 기택의 아내 충숙이 부잣집에서 술판을 벌이며 하는 대사이다. 맞다. 돈이 많으면 주름도 사라지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미간의 주름도 눈가에 주름도 모두 없애 버린다. 그들은 세월의 흔적을 모두 지워버린다. 세월이 없는 인조인간이다. 돈으로 젊음의 껍데기를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젊음의 그 열정과 순수함과는 더욱더 멀어진다. 그 때문에 더욱더 물질과 돈으로 그것을 가리고 위장하려 한다.


과거 호주에 머물 때는 날씨가 좋은 날은 공원의 벤치에서 글을 쓰곤 했다. 미세 먼지 없는 푸른 공원의 잔디 위에는 하얀 앵무새들이 잔디의 연한 뿌리를 뜯어먹으며 노닐고 넓게 트인 시야는 사색의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텀블러에 담아 온 커피에서 김이 피어오른다. 땅에서 올라오는 풀냄새와 커피 향 섞이면서 오묘한 향이 만들어진다. 카페인이 몸속에 퍼지면서 각성된 뇌가 잔잔히 울려 퍼지는 뉴에이지 음악과 만나고 주변의 무음 처리된 풍경이 눈 안을 가득 차 오르면 상념들이 피어오른다. 그럼 나는 내 몸이 머물던 공간을 떠나 다른 시공간으로 날아간다. 그럼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Writing in George Kendall Riverside Park

그때는 몰입이 쉬웠다. 그만큼 환경이 중요하다. 몸이 숨 쉬는 공간이 정신을 지배한다는 말은 아주 유효하다. 그건 내가 지금 미세먼지 가득한 한국의 도시로 돌아온 뒤 그것을 몸소 실감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도시에서 몰입과 상념의 세계로 빠져들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카페이다. 익숙하지 않은 공간 속에서 우리는 낯선 세계로 나아가며 그 속에서 또 다른 나를 찾는다. 낯선 여행지에서 자유를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


매일 여행을 떠날 갈 순 없다. 일상을 살아야 한다. 지금과 그때의 가장 다른 점이라면 그때는 자연스럽게 낯선 곳이었다면 지금은 인위적으로 낯선 곳이라는 것이다. 전자의 환경에 있을 때는 몰랐지만 후자의 환경으로 돌아오니 그때가 그리울 수밖에 없다.


그건 아마도 인간의 영혼도 자연에서 왔기 때문일 것이다.


Writing in Parramatta park
keyword
수요일 연재
이전 07화책과 사람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