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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사람 사이

[크레타] 일일방장 지기 후기

by 글짓는 목수

얼마만인가?


8년 만에 다시 영업사원이 된 기분이다. 과거 영업담당 직원으로 동해 번쩍 서해 번쩍하며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돌아다니며 고객응대를 하던 때가 떠오른다. 제품을 팔던 것이 책이라는 문화 상품으로 그 대상이 바뀌었다. 제품을 홍보하고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마음이 편안하다. 그건 아마도 미팅 룸의 협상 테이블이 아닌 아늑한 서점이라는 공간이 만들어낸 기분일 것이다. 긴장감이나 압박감이 없는 자연스러운 대화가 이어진다.

서면 [크레타]

“찾으시는 책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특별히 찾는 책은 없는데요, 소설류 중에서 볼만한 것 좀 찾아보고 있어요.”

“어떤 류의 소설을 좋아하시죠?”

“음… 좀 어둡고 슬픈 그런 장르의 소설을 좋아해요”

“그래요? 그럼 이 책은 어떠실까요?”


나는 그녀 앞에 놓인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집어 들었다.


“어린 왕자 아시죠?”

“네, 그럼요”

“어린 왕자가 약간 동화스런 느낌이잖아요?”

“네”

“이건 어린 왕자의 잔혹 동화버전쯤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네요”

“네?! 잔혹동화요?”

“네, 매춘부 사이에서 자라난 고아의 시선으로 바라본 어른들의 세계거든요.”

“아~ 그래요?”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여성 고객은 그제야 그 책을 손에 집어 들어 책장을 펼쳐 보았다. 나는 그녀가 잠시 책을 감상할 시간을 주려 자리로 돌아와서 다시 일일 방장지기 방명록을 적어나갔다. 어쩌면 우리는 대부분의 삶을 자연스럽지 못한 공간 속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이처럼 자연스러운 대화가 힘들어진 것은 아닐까?

문학 속에 피어나는 타인의 삶 속에서 각자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그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대화는 따뜻하다. 이곳은 마음에 드는 작가의 작품 속 이야기를 함께 나누며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도 끄집어내어 위로받고 공감받으며 서로를 힘듦을 덜어내는 공간이 아닐까?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만의 불행과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우리는 그런 불행과 아픔을 쉽게 드러내지 못한다. 하지만 책은 서로가 함께 그 아픔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좋은 매개체가 된다.

크레타(Crete),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태어나고 유년기를 대부분을 보낸 섬의 이름이다. 우리도 과거의 추억이 깃든 공간 속에서 옛 기억을 떠올린다. 이 작은 서점은 어쩌면 책 속에서 자신의 유년기와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길 수 있는 곳이 아닐까. 책장에 꽂혀있는 수많은 책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고 그 이야기를 읽으며 잊혔던 자신의 이야기를 상기하고 누군가와 그것을 나눌 수 있는 공간, 책과 사람,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공간이다.

푹푹 찌는 무더위 속에서 적지 않은 손님이 후미진 골목에 위치한 작은 서점을 찾았다. 다소 아쉬운 점이라면 대부분의 손님이 여성분들이었다. 한국의 독서는 여성이 주도하고 있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는 것 같았다. 간혹 여자친구의 손에 이끌려 따라오는 남성 분들이 보였다. 연애와 독서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독서를 좋아하는 연인을 만난다면 그보다도 좋은 게 없을 듯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과 사랑에 대한 책을 읽는 것 중에서 택일해야 한다면 책을 선택할 정도로 타락해 있었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중에서 -


카잔차키스의 말대로 타락하지 않고 교양까지 쌓는 방법은 책 읽는 연인을 만나 사랑하는 것이다. 책은 결국 스스로 찾기보다 보통 누군가를 통해서 접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오늘 내가 여기 일일방장을 하며 서점을 찾는 손님들에게 책을 추천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이 깨닫고 스스로 책을 찾고 읽는 자는 존경받을 만하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삶에서 맺은 관계 속에서 타인의 영향으로 삶의 변화 혹은 변질을 경험한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고 사귀고 함께 하는가는 아주 중요하다. 자신이 평소 가장 오랜 시간 함께 하는 지인 5명의 평균이 자신이라는 말이 있다. 자신이 처한 환경과 사람의 영향에서 벗어날 방법 없다면 책이라는 가상 세계의 위인과 문인들을 통해서 자신을 바꿔나갈 수 있다. 가장 현명하고 후회 없는 방법이다. 독서가 재밌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재미를 들이기까지 고통이다. 이 길은 많은 인내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또한 아주 느리다. 빠른 것에 찐심인 한국인이 독서와 친밀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느린걸 견디기를 마다하지 않는 많은 여성들 덕분에 한국의 작가들과 서점 그리고 출판업계가 먹고 산다.


반나절의 시간 동안 많은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손님 중에는 서울에서 온 분도 있었다. 지금이 여름휴가 시즌이다 보니 부산으로 피서를 왔다가 SNS를 통해 알게 된 이곳 서점에까지 방문했단다. 대화를 나눠보니 책에 대한 조예가 그리 깊진 않았지만 여기저기 사진을 찍으며 서점 홍보 대사가 되기를 자처하는 모습이었다. SNS는 이제 홍보와 브랜딩에서 피할 수 없는 필수가 되었다.


“아니에요, 제가 오자고 했어요!”


한 중년 여성이 살짝 격앙된 목소리로 내게 답했다. 네 가족이 함께 서점을 찾았다. 다 큰 딸 둘을 둔 중년의 부부는 따님의 손에 이끌려 온 것 같아 보였다. 그런데 오해였다. 어머니께서 전 가족 독서 문화 조성에 힘쓰고 있었다. 그 덕분인지 딸이 책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SF 문학을 좋아해요."


그녀는 SF과학소설에 찐심인 독서광이었다. 김초엽, 정세랑, 천선란 등 SF문학 작가의 책을 탐독하는 애독자였다. 부모의 습관은 결국 자녀의 습관이 되기 마련이다.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부모가 자녀에게 책 읽고 공부하라고 잔소리를 하는 것만큼 부조리한 가정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그런 가정에서 자랐다. 그래서 그것이 부조리인지 모른 체 그렇게 또 자녀에게 강요한다. 부자연스러운 것이 자연스럽게 되어버렸다. 그럼 이게 비정상의 정상화인가?


“이러다 따님께서 공학 전문 작가가 되시겠는걸요. 하하”


그 따님과 한참동안 과학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환담이 오고 가니 책을 많이 사더라. 내가 매출 증대와 독서문화증진에 적잖은 기여를 한 듯하여 뿌듯했다. 주변에 다른 손님들도 나와 고객이 나누는 대화가 흥미로운지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크레타에 붐비는 손님들


“가볍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를 좀 추천해 주실 수 있을까요?”


또 다른 추천 요청이 들어왔다.


“요즘 김영하 작가가 소설가에서 에세이스트로의 변화를 꾀하는 듯해요. 그가 나이가 들고 과거의 기억에 감성을 불어넣는 것이 더 잘 읽히는 것 같아요. 여행과 부모에 관한 그의 에세이가 저에게는 아주 깊은 인상을 줬거든요. 뭐 남성 작가라서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전 개인적으로 너무 좋았던 것 같아요”


그 여성분은 나의 추천사를 듣고 [여행의 이유] 찾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전 매번 해외여행을 갈 때면 항상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를 비행기 안에서 읽어요.”


그녀도 앞으로 비행기에서 이 책을 읽게 될 것 같아 보였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없을까요? 책을 거의 읽지 않아서요”

“그럼 시집부터 시작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이번엔 남자분이었다. 시집 코너를 안내해 드렸다.


“전 개인적으로 초보 독서가시라면 나태주나 류시화의 시집을 추천해 드립니다. 그리고 나중에 시에 찐심이 되신다면 페르난두 페소아를 꼭 읽어 보시길 추천드려요. 지금은 이 책이 아마 힘드실 거 같아서 감히 추천드리기 어렵지만 전 개인적으로 페소아의 책이 산문시의 최고봉이 아닐까 감히 생각합니다. 하하”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그렇게 나의 인생 책인 [불안의 서]를 소개했다. 비닐로 덮여 있어 안을 들여다볼 수 없어 아쉬웠다. 그날 일일 방장지기의 추천 도서인 [불안의 서]는 한 권도 팔지 못했다. 뭐 팔릴 거라 생각지도 않았다. 쉽지 않은 책인 것은 분명하다.


나는 독서 모임에서도 그걸 여러 번 실감했지만 초보 독서인들에게 페소아의 세계는 정말 딴 세상 이야기일 뿐일 수 있다. 하지만 삶이 무르익고 읽은 책들이 쌓여가면 페소아의 세계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가 포르투갈의 국민 시인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는 마치 한국의 시인 김소월과 같은 존재이다. 철학적이고 감성적인 그의 산문시는 삶과 우주와 인간의 내면을 상징적이고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악필의 방명록 250707

그의 상징과 은유가 자신의 삶에게 느껴진다면 그때는 페소아를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어진다. 페소아는 여러 가지 페르소나로 자신을 표현했다. 그건 자신을 겹겹이 둘러싼 포장지를 벗겨내는 과정이었다. 우리가 삶에서 여러 가지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걸 보여주려면 자신의 가면을 벗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현실의 삶을 침범받지 않고 드러내기 위해서 여러 페르소나(이명)로 표현한 것이다. 삶은 현실이고 글은 이상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는 연결되어 있지만 또한 분리되어야 함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작가였다.


세상에 책은 많다.


무슨 책을 읽게 되는가는 누구를 만나게 되는 것처럼 중요하다. 우리의 기억은 모두 관계에서 비롯되고 이야기(책)도 관계 속에서 피어난다. 책과 사람이 연결되면 우리는 더 오래도록 기억하게 된다.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가? 그럼 책과 사람과 함께하면 된다.

크레타 사장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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