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희 작가의 북토크 후기
"슬픔이에요."
김금희 작가가 말했다.
"작가님은 글을 쓸 때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이 뭐예요?"
어느 10살짜리 초등학생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청중은 작가에게 집중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건 내가 이미 그 아이가 했던 질문 전에 작가가 했던 대답 속에서 확인했다. 나 또한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김금희 작가님에게 그것을 물어본 이유는 그저 그것을 현업에서 활동 중인 순문학 작가에게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문학은 비극이고 슬픔이 없이는 절대 문학을 쓸 수 없다. 문학의 원천은 슬픔이었다. 문학은 삶이고 삶은 비극이다. 때문에 우리는 문학 속의 비극을 통해서만 감동과 공감을 느낀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3번째 북토크였다. (나의 북토크까지 포함하면 4번이다.) 첫 번째는 차인표 작가였고 두 번째는 김상욱 작가였고 이번엔 김금희 작가였다. 차인표는 연기자이고 김상욱은 물리학자이다. 그들을 떠올리면 작가보다는 다른 직업을 먼저 떠올리게 마련이다. 작가는 그들의 또 다른 직업이 되었다. 그들은 또한 남자였다. 이제는 많은 이들이 본캐와 부캐를 가지는 시대이다. 연기자와 물리학자의 삶에서 작가의 삶으로 옮겨간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누구나 자신의 삶을 글로 남기고 싶어 한다. 모두가 기록하고 업로드하고 공유하는 시대이다. 그것만이 자신의 인간으로서 가치를 증명하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이번엔 평생을 글과 함께 해온 전업 작가의 북토크였다. 김금희 작가는 순문학 공모전을 통해 등단한 누구보다도 글의 세계를 잘 이해하는 작가였다. 더욱이 여성 작가라는 점에서 내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것들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컸다. 북토크 강연장에 오신 분의 대부분은 여자들이었다. 젊은 여성들부터 중년 여성 그리고 노년의 여성들까지 아이들도 데리고 온 분들도 적지 않았다. 한국 여성들의 문학사랑이 여실히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그 속에 몇 명의 남성이 끼어 있었다. 나 또한 그중 한 명이었고 유일하게 가장 앞 줄에 앉은 남성팬이었다.
“저는 문학은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님은 고전문학을 많이 접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안톤 체호프가 이런 말을 했더라고요. 소설과 희곡 속의 캐릭터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게 엄청난 치유효과가 있다고요. 체호프는 알코올 중독과 폭력적인 아버지를 증오했는데, 글을 쓰면서 스스로를 치유하고 아버지를 용서했다고 하더라고요. 작가님도 글을 쓰시면서 그런 치유와 용서의 과정을 거친 경험이 있으신가요?”
내가 질문했다. 그녀도 체호프가 남긴 말에 읽고 공감한 모양이었다. 자신도 과거 심리치료를 받은 적이 있으며 글을 쓰면서 상처와 아픔들이 승화되어 날아가는 경험들을 했다고 했다. 글 속에서 아픔을 느끼고 슬픔을 쏟아냄으로써 스스로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내가 작가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은 나 또한 그것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이건 오랜 시간 글을 써온 작가들은 아마 모두가 이해하리라 생각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글은 문학이다. 정치, 경제, 과학 같은 비문학과 혹은 전문 교양서와는 다르다. 이성의 뇌가 작동하는 글은 이런 과정을 거치기 힘들다. 오로지 문학(시, 소설, 산문, 에세이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고, 모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으로 불행하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다. 톨스토이는 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진리의 말로 소설을 시작했다. 문학의 존재 이유이다. 문학은 글로서 삶의 비극을 들여다보는 예술이다. 톨스토이 또한 비극만이 인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건 비단 문학만이 아니다. 음악과 미술과 같은 다른 예술 영역도 마찬가지이다. 베토벤의 비창(悲愴, Pathétique)이나 쇼팽의 녹턴(Nocturnes)을 들으면 느낄 수 있는 것은 기쁨과 즐거움 같은 것이 아니다. 슬픔이다. 그 슬프고 애잔한 음률 속에서 우리는 알 수 없는 울림과 떨림을 느낀다. 이건 삶이 비극이라는 것을 우리의 무의식이 기억하고 있음이다.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은 슬픈 멜로디가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는 것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글을 쓸 때면 이런 슬프고 애잔한 음악이 함께 한다. 이것들이 비극의 서사와 묘사를 이끌어 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문학을 하는 사람치고 음악을 듣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음악이 없이는 글을 쓸 수 없다. 지금도 바깥세상과 나를 차단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글을 써 내려가고 있다. 언제나 글은 비극적인 음악이 보이지 않은 공간에 울려 퍼지면서부터 시작된다. 소설이나 산문을 쓸 때는 더더욱 그렇다. 이성적인 글(평론, 비평, 칼럼 등)을 쓸 때는 굳이 슬픈 음악이 아니어도 괜찮다. 그때는 카페에서 울려 퍼지는 가사 없는 경쾌한 음악도 무방하다. 하지만 문학은 반드시 슬퍼야만 한다. 슬프지 않으면 시작되지 않는다. 삶의 탄생이 언제나 울음을 터뜨리면서 시작하기 때문일까? 삶이 고해(苦海)이라는 말처럼 모든 이야기(문학)의 시작이 비극의 서막인 것이다.
'작가님은 남성의 슬픔은 어떻게 공감하고 표현하시나요?'
내가 물어보고 싶은 두 번째 질문이었다. 사실 앞의 질문과 이 질문 두 개중에 무엇을 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이 질문을 하기에는 강연장에 앉은 대부분의 청중이 여성들이라는 점이 다소 마음에 걸렸다. 그곳은 여성들의 슬픔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자리 같았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남성의 슬픔을 여성이 어떻게 이해하고 글로 표현할까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다.
삶은 남녀가 함께 하는 무대이고 둘 중 하나를 배제하고는 절대 문학을 다룰 수는 없다. 나 또한 항상 글을 쓸 때면 이런 고민을 하기 때문이다. 특히 문학을 쓸 때는 여자라면 이런 상황에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떻게 반응할까? 이건 문학을 하는 작가라면 아마도 피해 갈 수 없는 고민이지 않을까? 다만 여성 작가는 그런 고민에서 다소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건 한국의 문학계는 여성이 쓰고 읽고 하는 시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심을 잘 읽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야 팔리기 때문이다. 독자의 대부분이 여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도 여성들은 남성에 대한 탐구와 고민에 시간을 쏟기보다 차라리 여성들의 심리와 본성을 이해하려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이것이 나만의 편견인지 고정관념인지 여성작가를 통해서 확인하고 싶었다. 한 번의 기회만 주어지는 자리였다. 그 질문은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나는 요즘 여성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다. 그건 내가 쓰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이 과연 현실의 여성 독자들에게 어떻게 읽힐까를 고민하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여성이 나오는 이야기를 읽을 여성 독자는 없을 것이다. 남자 독자들이 씨가 마른 문학 시장에서 내가 읽힐 수 있는 문학을 쓰려면 여자를 연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생존의 문제이다. 과거 대부분의 시간을 남성들의 세계에서만 살아온 나에게는 쉽지 않은 도전이다. 하지만 이 도전은 어쩌면 내가 한국 남성만이 가진 아픔과 고통을 여성들의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역할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혐오가 만연한 한국의 문학계에 음양의 조화를 불어넣고 싶다는 터무니없고 허무맹랑한 사명감 같은 것이 생겨나더라. 근래에 독서 모임에 나가서 여성분들과 토론하고 대화하면서 그들의 생각을 듣고 그들의 사고방식과 심리를 알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신세계이다. 물론 그들에게는 내가 신세계인 모양이었다.
“남자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몰랐어요, 듣고 보니 한국 남자들이 참 불쌍한 것 같네요.”
북토크가 끝나서 독서 모임에서 알게 된 지인들과 작가의 소설을 읽고 나눈 대화 속에서 현대 남성의 심리와 언행의 근본적인 배경에 대해서 나의 솔직한 생각을 얘기했다. 여성분들은 그런 얘기를 처음 들어본 듯 놀란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며 경청했다. 아마도 독서 모임에서 이런 남성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문학을 읽고 토론 모임에 나오는 남성도 적을뿐더러 이렇게 심각하게 현상의 이면을 파헤치듯 말을 하는 남자는 더욱 보기 드물었을 것이다. 그건 내가 적잖은 시간 글을 쓰면서 이것에 대해 적잖은 고민을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풀리지 않으면 풀릴 때까지 생각한다. 그래서 풀리지 않은 궁금증으로 가득 찬 곳이 바로 나의 머릿 속이다.
“여성은 남성의 슬픔을 남성은 여성의 슬픔을 이해하고 들여다보려는 노력이 필요해요.”
그녀들도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 없이도 남녀는 서로에게 끌린다. 그건 육체적 본능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 육체적 본능만으로는 함께 살아갈 수 없다. 대화와 소통이 없으면 남녀가 함께 오랜 시간을 견뎌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대화할 수 없는 관계는 같은 공간에 함께하는 것이 고통으로 변해버린다. 이것이 일인가구, 혼밥, 독신과 비혼주의처럼 타인이 지옥이 되어버린 세상의 모습 아니던가. 그건 서로가 마주하고 대화하는 것이 고통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남자는 울지 않는 게 가장 큰 문제예요”
내가 말했다. 슬픔을 대면하지 않는 남성들은 그 슬픔을 잔뜩 짊어지고 살아가며 슬픔으로 가득 찬 분노와 고통을 다른 이들에게 쏟아내는 것이다. 스스로 울고 씻어내며 그것을 밖으로 내보내야만 한다. 이것이 상처의 치유이고 슬픔의 승화인 것이다.
슬픔을 치유하는 것은 슬픔을 대면하는 방법 밖에 없다.
당신은 동의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