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서스] 유발하라리
"인간의 정보 네트워크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진실 발견과 질서유지라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 한다."
- 유발하라리 [넥서스] 중에서 83p -
당신은 진실을 아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질서가 유지되는 것이 중요한가? 진실을 몰라야만 질서가 유지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이런 진실을 불편한 진실이라고 말한다. 바람을 피웠다. 그 진실을 알지 않았을 때는 평화로웠다. 하지만 그 진실을 알고 나면 평화는 깨어지고 전쟁이 시작된다. 진실은 모두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좋은 결말과 결과를 가져다줄 수는 없다. 그래서 진실과 질서는 종종 대립하며 서로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서로를 기만하는 상황을 연출한다. 하지만 진실은 언젠가는 드러나게 되어 있고 질서는 항상 변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시간의 문제일 뿐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다.
인류는 호기심과 의심이라는 동물이 가지지 않은 본능 때문에 항상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해답을 찾아내면서 발전해 왔다. 과학과 철학은 그런 인간의 우주에 대한 그리고 인간에 대한 궁금증과 의심이 만든 학문이다. 그런데 결국 과학도 인간이 하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과학과 철학은 떼려야 뗄 수 없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훌륭한 철학자치고 과학적 소양을 가지지 않은 자를 찾아보기 힘들다.
절대주의와 상대주의 사이
철학의 양대 기조인 절대주의와 상대주의가 태동하기 이전부터 회의주의 철학이 소피스트들에 의해서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절대주의가 고대와 중세를 거치면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면서 절대주의 철학은 유일신의 종교와 합세하여 신학과 연결된다. 신학은 철학에서 기생해서 파생되어 나온 학문이다. 신학은 철학에 뿌리를 둔다. 그것을 신이라는 존재와 연결시키는 작업이 신학의 탄생 배경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절대적인 신(유일신)의 존재는 상대주의 철학과 대립 각을 세우면서 발전해 간다. 어떤 학문이든 경쟁자가 있어야만 발전하고 성장하는 법이다.
기독교와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교가 세계의 절반을 이루는 종교가 되었지만 그 반대편에는 또 하나의 거대한 상대주의 종교가 존재한다. 그건 힌두교, 불교, 도교와 같은 종교이다. 이렇게 두 갈래의 신의 세계가 인류의 관념을 수 천년 동안 지배해 왔다. 이 두 세력은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배척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건 인간의 본성과 같다. 나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흥해야 내가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것이다. 교회가 흥해야 목사와 그 아래 성도들과 식구들이 풍요를 누리게 마련이다. 그런데 더 많은 사람이 절로 가고 무위(無爲)와 무아(無我)를 외치면 교회는 철거되고 법당으로 바뀔 것이다.
결국 자신의 이익과 편의와 영향력의 증대를 위해서 내가 믿는 것이 보편적인 것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들 서로 각자의 교리와 경전이 최고라고 주장하며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려 한다. 정치와 크게 다를 게 없다. 국민이 없으면 국가가 없듯이 성도가 없으면 종교도 사라진다. 그런 점에서 표심(사상)과 신념(신앙)은 비슷한 성격을 보인다. 다만 표심은 인간을 향하고 신념은 신이라는 죽지 않는 영생의 존재를 향한다. 그래서 표심은 일시적이고 유한하며 신념은 영원하고 무한한 힘을 가질 수 있다. 종교가 수 천년 동안 인류의 뇌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회의주의
20세기 중반,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의 태동과 함께 인류는 다시 소피스트로 변모하고 있다. 다시 인류의 철학의 시작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르네 데카르트 -
데카르트는 의심하고 있는 자신의 존재만 인정했다. 회의주의는 모든 것을 열어놓은 것과 같다. 정해진 진리도 상대적인 진리도 있다고 확신하지 않는다. 그저 계속 의심하고 탐구하는 인간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MBTI로 치면 P(인식: Perceiving)의 영역에 머무는 자들이다. J(판단: Judging)처럼 판단하지 않고 계속 의심하고 탐구하며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이다.”
- [마태복음] 5:34 -
인간은 절대와 상대라는 두 가지의 진리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수 천년을 살아왔다. 그래서 이 두 가지의 진리는 이미 공고 해질 데로 공고해졌다. 인간의 사고의 큰 프레임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 큰 프레임 안에서 인류의 질서 체계와 생활양식이 만들어졌고 이 테두리를 벗어나서는 살아갈 수 없게 되어버렸다. 과거 인간은 공동체에서 벗어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과거엔 인권보다 신권과 왕권이 더 강했다. 물론 지금도 왕권(지도자)은 강력하다. 하지만 그 왕권의 원천은 수많은 인권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과거와는 달라진 점이라 하겠다. 국민이 주권을 가진 국가를 국민이 선출한 왕이 대리 통치하는 것이 (대통령제) 민주주의 시스템이다.
제왕적인 권력은 진실보다는 질서를 더 중시한다. 그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 전제는 질서이기 때문이다. 질서는 시스템과 법과 같은 것에 의존한다. 하지만 법으로만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한계를 드러낸다. 인간은 로봇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감정과 욕망을 가진 동물이다.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법은 이성적이지만 인간은 비이성이 더 많이 작동한다. 그런 비이성, 즉 감성을 움직이는 것은 그들의 마음과 호르몬 분비이다. 서로가 하나 된다는 느낌과 분위기라는 보이지 않는 힘을 만들어야만 한다. 이것이 항상 변하고 바뀌는 법보다 더 큰 힘과 지속성과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그래서 모든 국가는 신화를 가지고 민족성을 고양하기 위한 역사 교육이 필수적이다. 지구반대편에 있는 인간도 나와 다를 것이 없는 거의 똑같은 유전자(99.9% 동일)를 가진 존재이지만 우리는 아마존 밀림에 사는 인간과 나를 동일하게 생각지 않는다. 그들과 같은 곳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같은 스토리와 신념과 가치관과 시스템에 익숙해야만 함께 살 수 있다.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중요하지 않다. 인간은 진실된다고 함께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을 믿음으로써 함께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포퓰리즘(Populism)
거짓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다만 그 거짓이 다수에게 아주 불편한 것이라면 철저히 그것을 감출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폐쇄적인 환경, 즉 정보를 차단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은 정보 차단이 쉽지 않은 시대이다. Open Ai시대이다. 정보 차단이 어렵다.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정보 교란 작전을 쓴다. 거짓과 진실이 섞어버려 무엇이 거짓이고 진실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대중이 양쪽을 다 볼 수 있다면 무엇이 더 그럴싸한가에 따라서 진실 여부가 결정된다.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가 그리고 완벽한 스토리 텔링을 가졌는가? 그리고 무엇이 더 많은 이들의 이익을 대변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것에 동의하는가이다. 다수결의 표심이다. 하지만 다수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반드시 진실일 수는 없다. 문제는 무지한 자들이 많은 세상은 진실과 거짓의 판단을 논리적 이성적이 아닌 충동적 감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 포퓰리즘(Populism)이고 중우정치(衆愚政治)를 펼친다. 분노와 혐오 같은 감정들을 자극해서 선동하고 호도하는 것이다. 과거 역사 속에는 그런 류의 선동가들이 대중을 이끌어 많은 이들이 피를 흘렸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것이 정당화된다면 그게 진실에 다가가는 행위라고 볼 수 있는가? 우리는 살인을 할 때는 충동적이고 감정적이며 비이성적이고 폭력적이다. 진실은 그런 상황에서 절대 드러날 수 없다. 죽은 자는 더 이상 진실을 말할 기회를 가질 수 없게 된다. 진실은 앞뒤좌우 맥락을 다 들어봐야 밝혀지지만 죽으면 그 맥락은 기억과 함께 사라져 버린다.
진실이 드러나는 과정
감정이 휘몰아치면 진실을 보기 힘들다. 진실은 찬찬히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들여다볼 때에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능력은 대중의 교양과 지적 소양의 수준에 의해 결정 나게 된다. 어떤 정보가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상황을 보고 있는가를 천천히 읽고 사색하고 토론하며 되새김질할 수 있어야 한다. TV와 언론의 자극적인 썸네일과 감정적인 문구들에 이성이 아닌 감정이 앞서는 판단을 조작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래서 독서(율)는 그 나라 국민의 교양 수준을 좌우하는 것이다. 몇 시간씩 앉아서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며 고민하고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현상(표면) 뒤에 가려진 진실과 의도를 바로 볼 수 있겠는가?
"숨은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감추어진 것이 알려지지 않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 [누가복음] 8:17 -
진실을 영원히 감출 수 없다. 진실은 불편하고 불쾌하고 불안할 수 있다. 그것들은 지적 소양과 교양을 갖추어 나가면서 서서히 드러나야 한다. 그래야만 받아들여질 수가 있다.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지속되어 온 불편한 것들이 한순간에 드러나면 사회를 유지하는 질서가 무너진다. 속도가 빠르면 시야가 좁아진다. 순간의 혁명은 속도는 빠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많은 이들이 희생된다. 급진적 혁명은 피를 부르게 마련이다. 우리는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일 지적 수준과 정신적 소양을 끌어올려야 한다. 그래야만 앞으로 다음 세대가 살아갈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국가와 사회가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발맞춰 퇴보하지 않고 발전하는 길일 것이다.
세상이 바뀌고 환경이 급변함에도 계속 구질서에 얽매여 변화하지 않는다면 그건 데워지는 냄비 안에 있는 개구리와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이제 모두가 서로 불편함과 불쾌함 그리고 불안함을 조금씩 나눠가지며 변화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감춰진) 진실을 알고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진실은 영원히 감출 수 없으며 질서는 변하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