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개와 고양이 사이

공감과 유대감 사이에서 사색하다가...

by 글짓는 목수

사색은 혼자서만 가능하다.


세 마리의 개 집사가 된 지 3일째 되는 날이다. 집안이 개판이 되어간다. 개들은 정말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많다. 밥 주기 똥 치우기 놀아주기, 산책시키기 등등 사람의 손길을 끊이질 않는다. 글을 쓰는 이 순간 잠시 노트북 화면 밖으로 시선을 옮기니 똥을 누고 있는 한 녀석이 보인다. 치워야 한다. 여름이라 조금만 놔둬도 날파리들이 꼬인다. 아이를 키우는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듯하다.


한국인들의 반려동물 수가 급증하는 것은 아이를 키우지 못하는 것에 대한 대체 심리 때문인 건가? 사랑을 줄 곳을 찾지 못해 그 사랑이 동물에게 향한다. 사랑을 배신으로 갚는 인간보다 동물이 나을지도 모른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사라진 한국은 반려동물들로 채워지고 있다. 출생아 수가 감소할수록 반려동물 개체 수는 증가한다. 결혼과 출산을 하지 않은 노처녀와 노총각은 아이 대신 개와 고양이를 돌본다. 고양이는 양반이다. 개는 진짜 아이랑 별반 다를 게 없는 듯하다.

개판

작가와 개는 어울리지 않는다.


작가가 개를 키운다는 것은 아주 쉽지 않은 일이다. 뭐 전업작가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시간이 넉넉하지 않은 작가는 개에게 쏟아야 하는 관심과 신경 때문에 읽기와 쓰기와 사색이 힘들 거라 생각된다. 나는 산책과 등산 간에 사색을 즐긴다. 산책은 사색을, 등산은 운동과 사색을 동시에 즐기는 나만의 방식이다. 편안하게 강변 산책로를 걸으면서 오디오북을 들으며 인상 깊은 구절들이 들려올 때마다 잠시 멈춰 서서 그 구절을 여러 번 되뇌며 사색에 잠기고 메모를 남긴다.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이리저리 킁킁거리며 돌아다니는 개들 때문에 듣는 것에 집중할 수가 없다. 시선을 강탈하는 녀석들 때문에 귀로 들어오는 정보는 그냥 흘러나가 버린다. 산책 내내 개들의 움직임에 신경을 써야 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해야 하고 똥을 싸면 바로 치워야 하고 물고 주고 간식도 줘야 한다. 등산을 가서도 마찬가지이다. 함께 운동은 했지만 사색은 전혀 할 수가 없었다. 서로에게 신경을 써야 하는 존재와 함께 하는 시간은 나를 현실에 붙잡아 두기 때문에 나의 정신은 다른 세계로 나아갈 수가 없다.

개등반

현실을 부대끼는 것


개들과 등산을 하면서 녀석들과 강한 유대감이 생겼다. 사실 동생이 키우는 개들이라 나와의 유대감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근래에 녀석들과 함께 산을 오르면서 땀 흘리며 힘든 시간을 함께 했다. 시원한 숲 속에서 같이 물을 마시고 간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할 때는 집안에서 있을 때와는 다른 유대감이 느껴졌다. 녀석들은 신이 나서 산을 뛰어다녔다. 아직 팔팔한 나이의 녀석들의 체력을 내가 감당하기 힘들었다. 녀석들을 쫓아가느라 무리하게 속도를 올렸더니 뒷골이 당긴다. 혼자서 나의 생체 리듬에 맞춰 산을 오를 때와 다르다. 숲속에서 땀 흘리며 사색을 하던 운동이 녀석들의 속도에 맞춰 끌려다니는 노동이 되어버렸다.


물론 혼자 등산을 할 때도 충분히 체력단련이 되고 운동이 된다. 녀석들과의 등산은 군대에서의 산악훈련을 떠올리게 한다. 가파른 산을 내려올 때는 혹여 떨어지거나 나의 발에 밟힐 수도 있는 녀석들 두 녀석을 모두 가방에 넣어 짊어지고 내려가야 했다. 혼자서 산을 탈 때보다 2배의 주의와 체력이 필요하다. 집에 와선 녹초가 된 몸을 쉴 새도 없이 숲 속의 흙 밭을 뒹굴어서 더러워진 녀석들을 씻기고 털을 말려야 했다. 쉴 수 없다. 녀석들을 위한 일은 계속 이어진다. 다 씻기고 말리고 또 밥을 줘야 한다. 그러고 나면 내가 씻는다. 씻고 욕실에서 나오니 하루 종일 뛰어다녀 피곤했는지 녀석들은 잠이 들었다. 아이를 씻기고 먹이고 잠든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다음날 새벽잠에서 깨어났을 때 녀석들은 어느새 내 옆에 와서 자고 있다. 유대감이 생겼다. 여동생은 산을 오르지 않는다. 녀석들은 아마 태어나서 경험해 보지 못한 흥미롭고 신비로운 모험을 다녀왔을 것이다. 셋이서 다녀온 모험은 서로에게 강한 유대감을 만들어 주었다. 낯선 외부 환경 속에서 서로에게 관심과 보살핌을 쏟는 것은 서로에게 강한 유대감을 형성하게 된다. 안전과 편안함이 보장된 익숙한 환경 속에서는 서로의 소중함을 알기 힘들다.


과거 수렵채집 생활을 하던 사피엔스 가족들의 유대감은 지금의 가족의 유대감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하지 않았을까? 내일 남편이 사냥을 갔다가 살아서 돌아올지 아이가 숲 속에서 독초를 먹고 죽을지 알 수 없는 환경은 매일 밤 함께 잠들 수 있는 것에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함께 운동을 하는 관계는 아주 빠르게 친밀해지는 경향이 있다. 이건 아마도 오랜 세월 유전자에 남겨진 사피엔스의 유대감 형성 메커니즘 때문일 것이다.


낯선 산속에서 서로의 숨소리를 들으며 땀 흘리며 관심과 보살핌을 줌으로써 서로 간에 생겨나는 강한 유대감이다. 유대감이란 위험과 고통을 함께하면 더 강해진다. 전우애가 그 어떤 우정보다도 강한 것은 죽음 앞에 함께 놓여있다는 것 때문 아니던가. 하지만 현대인은 그런 상황에 놓일 일이 별로 없다. 그래서 서로에게 진실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공감과 유대감 사이


작가는 현실을 부대끼는 존재라기보다는 비현실을 부대끼는 삶을 살며 공감을 찾아내고 그것을 끄집어내는 존재이다. 물론 작가가 과거 살아온 현실에서 얻은 직접적인 경험과 기억이 관여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그것들에만 의존해서 글을 쓸 수는 없다. 직접경험과 간접경험 그리고 상상력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룰 때에야 비로소 공감 있는 글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래서 작가는 기억에만 의존할 수 없다. 읽고 사색(상상) 하는 것을 멈추면 안 되는 이유이다. 만약 이 둘이 멈추고 계속 쓰기만 한다면 그 작가는 언젠가 밑천이 드러날 것이다.


그건 독자들이 가장 빨리 알아챈다. 작가의 삶이 계속 쓰기만 반복되고 있구나… 작가가 현실의 삶을 살아내지 않아도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이 읽기와 사색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을 얼마 살지 않은 젊은 작가들도 그들만의 상상의 세계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나처럼 중년 혹은 노년의 작가들보다 더 놀랍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것은 그들의 글은 삶과 경험보다는 읽기와 사색에서 나온 것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그래서 나는 젊은 나이에 이름을 알리는 작가들은 조금은 우려스럽다. 그건 삶을 제대로 살아내기도 전에 작가라는 명성에 묻혀 일반 대중의 삶 속에서 경험해야 할 보편적인 고통과 고뇌에 대해서 과연 제대로 느끼고 쓸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노벨 문학상의 수상자들의 평균 연령이 약 65세 정도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최연소 수상자(러디어드 키플링)는 41세였다. (알베르 카뮈가 44세로 2등)

러디어드 키플링(1865~1936), 알베르 카뮈(1913~1960)

작가(소설가)는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는 직업이다. 고전에는 항상 사람과 사랑 그리고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을 책으로 사색으로 간접 경험이 가능할 수 있을까? 물론 선험적 경험, 즉 책에서 보고 현실에서 그것을 확인하는 과정을 겪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른 나이에 작가로 부와 명성을 얻은 자는 그것을 확인하는 과정이 자연스럽지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부와 명성이 만든 삶과 인간관계는 자연스럽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처음부터 빨리 모은 재산은 행복하게 끝을 맺지 못한다.”

- 잠언 20:21 –


사실 작가는 행복하기 쉽지 않은 존재이다. 그건 작가의 본업이 삶의 불행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안나 카레니나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고, 모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으로 불행하다.”

- 톨스토이 [안나 까레니나] –


안나 까레니나의 첫 문장이 그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우리는 비슷한 행복을 들여다보기 위해 소설을 읽지 않는다. 그 말은 작가는 매번 다른 형태의 불행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불행, 즉 비극을 쓰는 것이다. 비극만이 감동을 줄 수 있다. 매번 비극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비극적인 상황을 계속 떠올려야 하는 것이고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행의 감정을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이 느끼고 예민해질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작가의 이 예민해진 감각은 현실의 삶을 살아내는 데는 그리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감수성이 너무 풍부한 사람은 현실의 삶에 적응하기 어렵다. 노벨상 수상자 ‘한강’의 표정을 떠올려 보라. 왠지 모르게 쓸쓸하고 어두워 보이지 않는가? 한강이 현실의 삶을 능숙하게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이 보이는가? 작가는 작가로 성공하지 못하면 가장 무능한 인간으로 비칠 가능성이 농후하다. 작가는 세심한 관찰자이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방관자 혹은 도피자처럼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을 팔아야 한다. 그래야 사회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럼 출판사 사람과 독자와 그와 관련된 산업 종사자들과 옥신각신 다투고 얘기하며 삶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는 글과 삶이 함께 뒤섞이며 서로의 공간을 잠식하려 든다. 거기서 또 다른 고뇌와 갈등이 글감으로 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한강

한강은 작가로 이름을 알리지 않았다면 현실의 삶에서 아마도 크게 쓸모 있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여기서 쓸모란 현실(경제적 가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능력을 가진 것을 의미한다. 감수성은 현실의 삶이 아닌 비현실의 세계, 즉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할 순 있어도 현실의 삶에선 멀어져야만 더 많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한강은 다행히 지독하게 고독한 능력으로 현실의 삶까지 풍요롭게 만들어 냈다. 음지가 강하면 양지가 더욱 빛낼 수도 있다. 그녀는 음지의 세계를 여행하면서 글을 썼지만 그것이 양지를 밝힌 거라고 볼 수 있다. 대중의 (선한) 양심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또한 출판계와 문화 산업 성장에 아주 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이 경우가 이후 작가 본인에게 이로울지는 의문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작가는 비극을 만들어 내기 위해 자신의 내면으로 계속 파고 들어가야 하는 존재인데 유명 인사가 되어버리면 계속 외부로 자신을 끄집어내려는 온갖 유혹과 자극에 시달리게 된다.


작가는 홀로 읽고 쓰고 사색해야지만 계속 새로운 불행(비극)을 떠올릴 수 있다. 과연 작가가 유대감과 공감을 모두 다 가질 수 있을까? 나는 경험해 보지 않았기에 말할 수 없다. 궁금하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선 다소 회의적이다. 진정한 공감의 글은 간절함과 고독함 속에서 피어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내 앞에서 꼬리를 흔드는 반려견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간식을 주면서 녀석들과 유대감을 느끼지만 그 시간은 공감을 쓸 수 없다. 그건 유대감은 현실에서 부대끼며 생기는 것이고 공감은 현실과 떨어져서 바라볼 때 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감을 쓰려면 그들과 떨어져 있어야 한다. 그럼 유대감은 자연히 줄어들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서 작가는 고양이에 가깝다.

그럼 나는 개냥인가?


Writing with Noodle
keyword
수요일 연재
이전 03화물질과 정신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