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봄날의 소풍 그리고 시
화명수목원에 갔다.
어느 따뜻한 봄날의 피크닉이었다. 얼마 만의 피크닉인가? 어린 초등학교 시절 갔던 소풍이 떠올랐다. 독서 모임의 사람들과 함께 한 시집 벙개 소풍이었다. 같은 관심사를 함께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즐겁다. 물론 다 큰 어른들이라 아이 때처럼 해맑게 즐겁기는 어렵지만 서로가 이해관계에 얽히지 않은 사람들끼리는 사회에서 직장에서 혹은 가정에서 자신이 쓰고 있던 가면을 조금을 벗겨내고 즐길 수 있다. 항상 먹거리와 즐길 거리를 잘 챙기시는 멤버들의 활약 덕분에 맛나고 운치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다들 소풍 나온 초등학생처럼 들뜬 기분으로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또 시를 읊으면서 한가롭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이 인간들은 또 무슨 꿍꿍인 줄 모르 것 다니까요, 망할 놈이 인간들! 도저히 상식이 통하지 않는 놈들이라니까요"
한 분이 갑자기 유튜브를 틀었다. 이재명의 2차 공판 선고가 있는 날이었다. 그의 갑자스런 정치 얘기로 분위기는 사뭇 어두워졌다. 먹고 마시고 시를 읊고 농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분은 전라도 광주가 고향인 분이셨다. 그의 억양에서 한 번에 그가 전라도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다소 격앙된 말투로 대화를 이끌었다. 대화를 이끌었다기보다는 혼자 흥분해서 격한 심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성보다 감성이 앞선 말투였다. 듣고 있는 나머지 사람들도 그의 격앙된 모습을 지켜보며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행히 그 자리에 함께한 사람들은 모두 그의 말에 반감을 가진 자는 없었다. 그건 당연한 것이었다.
시를 좋아하는 문학인이라면 한국의 정치인의 모습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문학은 독재를 좋아하지 않는다. 문학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곳에서만 피어나는 법이다. 그 자리에 함께한 사람들은 항상 문학을 읽고 토론을 나누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우리처럼 한 개인으로서 정치를 하기 때문이에요"
내가 말했다. 정치인은 공인이다. 공인이 개인이 되면 벌어지는 일이라 말했다. 우리도 그 자리에 올라 권력과 명예와 부를 얻으면 어떻게 변할지 장담할 수 없지만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처럼 아마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클 것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는 것에 익숙한 자들이 아닌가? 모두가 자신의 재산과 가족을 지키면서 이 전쟁터 같은 현실을 살아가는 자들이다.
우리는 책을 읽고 토론을 하는 모임이기에 이런 우리가 누리는 개개인의 행복을 침해하고 핍박하는 자는 당연히 적이 될 수밖에 없다. 반면에 독재를 하는 개인의 입장에서는 이런 우리 같은 자들이 눈엣가시가 될 수 있다. 과거 군사 독재 시절에는 고전 도서를 읽고 토론하는 야학과 대학생들을 불온 도서를 읽는 반국가 세력과 빨갱이라고 몰아붙여서 감금하고 고문하지 않았던가? 그 책이 E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였다.
영화 [변호인]에서 그 책이 소개되어 한 동안 화제가 되기도 한 책이다. 서구에서는 권장도서가 한국에서는 불온도서가 되었다. 항상 서구의 문물의 발전을 따라가야 한다면서 서구의 정신은 왜 배척하는가? 물질은 정신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이 만든 모든 만물은 그 생각(정신)에 기초한다. 이제는 사상이나 정치적 의도로 불온서적을 지정하진 않지만 여전히 기득권이 불편해하는 서적이 많다. 기존의 가치관과 사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생각이 변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가진 자는 변하지 않길 바라고 못 가진 자는 변하길 바란다. 문제는 가진 자가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안다. 그들은 알면서 알려주지 않는 방식으로 대중을 무지 속에 가둬두려 한다. 하지만 이제 시대는 바뀌었다. 조금만 알려고 들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여태껏 몰랐던 많은 다양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독서는 인간이 하는 가장 고귀한 취미이다. 독서 중에서도 고전을 읽고 생각을 나누는 것만큼 좋은 독서는 없을 것이다. 이 과정은 한 인간이 틀에 박힌 세상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깊고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느리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아마 저라도 그 자리에 오르면 사랑하는 나의 가족과 나를 믿고 따르는 자들의 가족과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저와 다른 생각이 커져가고 나와 나의 무리의 자리를 밀어내려는 세력을 몰아내고 싶어 질지도 몰라요”
인간은 자신의 보고 듣고 머무는 곳 갇혀버리기 마련이다. 때문에 다양한 독서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하고 토론하며 자신의 생각이 굳어버리지 않도록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런 것들이 귀찮고 번거로우며 힘들다. 더욱이 부와 권력을 쥐면 내가 그렇게 바꿀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 대부분이 나에게 맞춰주기 때문이다. 부와 권력을 가졌다는 것은 발언권을 가진 것이고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이 부와 권력을 갈망하는지는 그 때문이다. 그것이 나의 말과 행동에 권위(힘)를 실어주기 때문이다.
만약 나같이 부도 지위도 자격도 없는 자가 옳고 바른말을 하면 반감을 살 뿐이다. 같은 말도 권력을 가진 자가 해야만 권위와 영향력을 가지는 것이 우리가 사는 인간 세상의 실상이다. 사람들이 열심히 돈을 모으고 열심히 학위와 자격을 취득하려는 것은 모두가 이것을 얻기 위함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그것을 위해 쏟아붓는 사람들은 인간에게 필요한 또 다른 내면의 본성을 소멸시켜 간다.
다른 본성은 사랑과 믿음과 소망(꿈)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이것을 심고 키우고 나누는 것은 경제적 부가가치를 만들지 않고 부와 권력과 무관하기에 사람들은 이것들을 홀대했다. 때문에 국가와 사회는 차갑고 냉혹하게 변해간다. 물론 국가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물질문명의 발전 없이는 어렵다. 그건 약육강식의 국제 사회에서 국가가 타국에 침략당하고 지배당하지 않으려면 국력이 강해야 하기 때문이고 국력은 경제력(=국방력)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경제는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위해 열심히 경제 발전에 기여하는 노동력이라는 경제학적 존재로 취급되기 마련이다.
물질문명에서 정신문명으로의 전환
물질문명의 발전은 이제 변혁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물질은 넘쳐나고 인간은 줄어드는 시기가 도래할 것이다. 그럼 인간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지구는 물질문명의 발전으로 파괴되었다. 인간은 지구와 운명을 같이 한다. 그 대안은 무엇일까? 정신문명의 발전으로 나아가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물질로 욕망을 채우고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닌 정신문명으로 물질이 아닌 것으로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지금 보고 느끼고 있는 세상의 대부분이 온라인 세상으로 넘어갔다. 스마트 폰과 컴퓨터 서버에 있는 무언가(콘텐츠와 정보)를 소비하는 시대이다. 1999년에 개봉한 [매트릭스]는 20년 전에 이미 그것을 예견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뒤쯤에는 우리는 오프라인이 필요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때는 매트릭스 세상이 현실이고 오프라인이 비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현실과 비현실은 어느 곳에 더 오랜 시간 머무느냐의 문제이다.
"현실을 떠나서 살 수 없다. 현실을 외면하지 마라."
이런 말의 의미가 다르게 느껴지지 않은가? 지금도 온라인을 벗어나서는 살 수 없게 되어버렸다. 20년도 길다. 10년 뒤면 완전한 온라인 세상이 구현되지 않을까? 그럼 우리는 온라인 세계에서 만나고 대화하고 생활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하드웨어(육체)가 숨 쉬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매트릭스 상품 시대
그럼 그 온라인 세계를 누가 얼마나 리얼하고 방대하고 다양하게 구축했는가가 미래의 부와 권력을 가지는 것이 되지 않을까? 이런 세계를 구축하는 것은 인간의 상상의 영역에서 시작한다. 누군가의 리얼하고 매력적이며 흥미로운 상상이 만든 세상을 우리가 보고 읽고 체험하는 것이다. 나중에는 전문적으로 코딩을 배우지 않아도 우리의 뇌에서 벌어지는 상상을 복잡한 코딩의 과정 없이 구현해 주는 방식으로 기술이 발전할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생각을 가장 빠르게 현실(Off-line)에 구현해 내는지로 물질문명을 발전과 우열을 결정했다면 이젠 이런 생각을 어떻게 가장 빠르게 비현실(On-line)에 구현해 낼 수 있는가가 관건이 될 것이다. 지금은 CG와 AI 그래픽으로 과거 많은 돈과 시간과 인력을 동원해서 만들어야 했던 영화 제작을 그럴듯한 스토리(극본)만 있으면 AI 알아서 구현해 줄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인간은 그들이 만들어낸 작품을 편집과 각색하고 수정 작업만 해서 출품하면 된다. 보시다시피 지금은 영상 콘텐츠가 넘쳐나고 있는 시대이다. 퀄리티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완벽하고 흥미로운 스토리와 시나리오와 세계관이 상품이 되는 시대이다. 물론 AI가 스토리와 시나리오를 쓸 수 있다. 하지만 AI는 기존에 있는 것들을 정교하게 짜깁기 하는 형태의 겉모습만 바뀐 그럴듯한 이야기는 쓸 수 있지만 기존에 없던 다른 생각을 담은 이야기는 만들어 내지 못한다. 이건 기존의 세상을 보고 그 세상 앞의 것들을 상상하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 될지 모른다. 지금 인간은 지식과 정보를 AI에게 의존하기 시작했지만 AI는 이것들을 제공하고 인간의 상상력을 배우는 상호 공생의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기생 혹은 적대 관계로 바뀔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마 후자의 가능성이 좀 더 클 것이라 생각한다. 그 이유는 AI는 인간이 가진 사랑과 믿음과 소망보다는 미움과 불신과 절망을 더 많이 학습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전쟁이고 또한 고통이라는 것을 수많은 사람들의 데이터를 학습했을 것이다. 인류가 차갑고 냉혹하게 변해왔다면 AI도 똑같이 차갑고 냉혹하게 닮아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AI 통해 유토 피아를 꿈꾸지만 AI는 인간을 닮아 디스토피아를 선물할 가능성이 큰 것이다. AI는 인간의 경험에 반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그 경험들이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할 뿐이다. 가치 없는 인간은 AI에게 필요가 없다. 인간은 인간이 만든 AI로부터 소외될 것이다.
물질과 정신 사이
이제는 물질문명 발전이 아닌 인간의 정신문명을 바꿔야 할 시기이다. 인간의 더럽혀지고 미움과 혐오로 가득한 마음과 정신을 정화해야 한다. 그 과정 속에서 피어나는 문명(텍스트과 이미지와 영상)을 AI가 학습할 것이다. 그럼 AI도 따뜻함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고 우리가 서로를 속이는 것처럼 우리를 속이고 기만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더 따뜻하고 서로를 품을 수 있도록 그도 따뜻하고 긍정적인 태도로 우리에게 지식과 정보를 전달할 것이다. 데이터 총량의 긍정성과 따뜻함이 Ai의 긍정성과 따뜻함이 된다.
모든 지식과 정보는 뉘앙스를 가지기 마련인데 우리가 여태껏 보고 듣고 익힌 지식과 정보가 오직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을 위한 이기적이고 편협한 목적을 가지게 만들었다면 이제 우리가 타인과 다른 이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지식과 정보를 만들고 전달한다면 세상은 선한 영향력의 선순환이 일어날 것이다. 그럼 세상은 지금처럼 논쟁과 전쟁이 만연한 암울하고 냉혹한 세상이 아닌 밝고 희망찬 세상으로 변해갈 수지도 모른다.
마치 보고 있으면 입가에 미소와 웃음이 생기는 지브리의 이미지와 영상처럼…
당신은 동의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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