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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Aug 11. 2019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관계

[관계의 힘] 레이먼드 조

   도서관 바로 앞에 일터를 잡았다. 아직 햇살의 온기가 식지 않은 늦은 오후에 일을 마치고 도서관으로 향하는 것이 나의 작은 일상의 행복이다.

  지저분해진 작업복을 입고 도서관에 들어서도 누구 하나 불쾌한 시선으로 쳐다보지 않는다. 여긴 나의 외면의 지저분함이 내면을 대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The power of relationship

소설이었다.

  한참을 한국도서 코너를 서성이다 집어 든 책이다.  너무 특색 없고 상상의 여지를 전혀 주지 않는 제목이 괘심해서 집어 들었다. 인문교양서적쯤으로 생각했던 나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소설이었다.

  주인공 '신'이라는 인물이 회사 속 인물들 사이에서 진정한 인간관계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의  그린 내용이다.
   '원더랜드'라는 완구회사의 기획팀장인 신은 회장의 죽음을 시작으로 펼쳐지는 회사 내의 두 아들의 경영승계권을 두고 펼쳐지는 싸움 속에서 휘말리게 되고, 조 이사(회장의 창립멤버)라는 대주주의 위임장을 얻어야 하는 임무를 맡는다. 그의 위임장을 얻어내기 위해 그와 내기를 하는데...
  
   "일주일에 한 명씩 4명의 친구를 만들어라"

   오직 성공과 필요에 의해서만 인간관계를 맺어온 주인공은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그 과정 속에서 회사와 얽힌 사연들을 알아가고 회사 동료들과의 갈등, 배신, 사랑을 겪으며 인간관계의 의미를 깨달아간다.

관심, 먼저 다가가기, 공감
 진실한 칭찬, 웃음

  친구를 만들 때 유념하라며 적어준 조 이사의 쪽지에 적힌 다섯가지이다.


 요즘 사람들은 주변에 관심을 주는 것보단 관심을 받기 위해서만 애쓰는 듯하다. SNS 속에서 화려하고 멋진 장면들을 매일 업로드하며 지인들과 대중들로부터 좋아요를 갈구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외면의 아름다운과 화려함이 내면의 아름다움을 대체하는 세상이 안타깝다.  지금 바로 앞에 앉아있는 가족과 연인, 친구에게 먼저 다가가서 웃음 띤 따뜻한 말 한마디와 칭찬이 더 값진 관계를 만들어 주지 않을까?  


 인간(人間, human being)이란?

  인간은 한자의 뜻을 풀이하면 사람 인(人) 사이 간(間) 사람과 사람 사이를 뜻한다. 인간은 하나로 설명할 수 없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네가 있기에 나라는 존재가 성립된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만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인간관계에 지쳐가는 현대인들은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듯하다. 관계 속에서 상처받기 두려워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피한다.  

   교회에서 혼자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을 좋아한다. 힘든 일이 있거나 괴롭거나 할 때 교회를 찾아 기도하고 찬양을 하고 나면 기분이 후련해지는 걸 느낀다. 그 순간을 좋아한다. 기도와 찬양이 끝나면 집에 가고 싶다.  알다시피 교회라는 공간은 관계를 중요시한다. 구석에서 혼자 조용히 기도하고 찬양을 할라치면 어느샌가 내 옆에 누군가가 다가온다. '집사'라는 호칭을 가지고 있는 분이 오셔서 교제 속으로 끌어들인다.  한 번 두 번 거절을 하지만 계속되는 권유와 회유에 미안해진다. 교회를 잘 몰랐을 땐 그들이 왜 이럴까 이해하지 못했다. 기독교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전도이다. 하나님을 널리 알리고 믿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최상위 목표인 것이다.

"모임엔 참석 안 하면 안 되나요? 그냥 교회에서 기도하고 찬양만 하고 싶은데요!"
"**형제~ 그러시면 안 됩니다. 교제 속으로 들어오셔야 해요"

  관계에 지쳐있던 나에겐 교회마저 관계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공간이고 싶지 않았다. 관계를 강요받는 느낌이 싫었다.  교회에서 사람 간에 관계 속에서 실망하고 배신당하고 그 안에서도 지위와 권력이 존재하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 돈과 명예가 그들에게 장로와 권사의 지위를 쥐여주고 교회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권력을 쥐여주었다. 교회 안에서도 자본주의 논리가 지배하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한 주간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고통받은 영혼이 하나님 품에서 쉬어야 하는 교회라는 공간마저 가진 자들의 비즈니스 공간이 되어버렸다. 과거 많은 친구들이 그렇게 교회를 떠났다. 하나님과 성경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그 속에서 생활하는 신앙인이라는 사람들의 성경 속과는 다른  이중적인 삶을 살고 있는 모습에 질려버렸던 것이다.


   관계 속에서 상처받지 않으려 관계를 회피했던 나는 더 이상 상처를 받진 않지만 상처를 치유할 수도 없다는 것을 몰랐던 것 같다. 관계를 떠나있는 삶이 당장은 편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차오르는 외로움과 마주하는 순간과 익숙해질수록 관계하는 방법을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생겼다. 앞으로 다시는 관계를 가지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생겨났다.  상처받는 관계만 생각한 나머지 치유받는 관계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는 사회에서 수많은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생계(비즈니스)를 위해 좋든 싫든 계속 새로운 관계 속으로 내몰려야 하고 때론 그 어려운 관계를 지속해야 한다. 그 과정 속에서 소중했던 관계가 외면되고 방치된다. 그렇게 방치했지만 훼손되지 않은 관계들이 얼마나 많은가? 가까웠지만 소원해진 가족과 친구 그리고 소중한 인연들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과거의 친밀했던 관계가 유지될 수 있을 거란 믿음은 욕심일 뿐이다.
  
  갑작스러운 옛 친구의 연락을 받으면 혹시 경조사나 금전적인 도움을 바라는게 아닐까 하는 의혹이 앞선다. 반가움보다 당혹함이 더 크게 느껴지는 건 관계를 지속하려는 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쁜 일상 속에서 모든 관계를 내 뜻대로 할 수 없다. 시간은 제한적이다. 무엇이 소중한지 우선순위가 필요하다. 많은 친구를 사귀는 것보단 나를 알아주는 몇 명 아니 한 명만이라도 지킬 수 있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이해관계로 얽혀진 사회 속에서 몇 명이라도 진정한 인간관계를 가진다는 것이 나에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른다. 인맥의 과부하로 우리의 인생을 낭비해선 안된다.


  성공이라는 단어는 삶 속에서 우리의 뇌를 지배한다. 누구나 성공하는 삶을 살고 싶다. 성공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많은 이들이 말하는 성공이란 자신의 재능을 세상에 발휘하고 부와 명예를 쌓는 것을 말한다. 재능을 발휘하고 부와 명예를 쌓아가는 과정이 사람을 짓밟고 이용하고 속이더라도 성공을 이룰 수만 있다면 서슴치 않은다. 과연 인간관계가 바로 서지 않은 성공이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


  관계 속에서 바로 서는 삶을 살아가는 자가 인간으로서 성공하는 삶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온라인의 피상적인(비대면) 관계가 넘쳐나는 세상 속에서 진정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쉽지 않다. 얼마 전 '우울하고 무기력한 집순이를 위하여'라는 주제로 글을 쓰는 브런치 작가의 글을 읽고 물음을 던진 적이 있다.

  "왜 집순이가 되어가는 것일까요?"
  "글쎄요 사람마다 다른 거겠죠 다만 돈도 없고 우울해지면서 더 혼자되는 시간이 많아지네요,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이 좋고 나쁘다고 말하긴 힘들지 않을까요?"

  그들은 집 속으로 숨었지만 관계의 끈을 놓고 싶진 않은 것이 아닐까? 혼자만의 시간을 원하지만 사람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건 두렵기에 온라인에서 글을 쓰고 소통하며 적당한 거리를 둔 관계를 선호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관계일까?!

아니면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요즘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긴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운동을 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좋다.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있다. 수많은 관계를 놓고 이곳으로 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혼자가 아닌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바로 서야 한다고 말한다. 스스로를 관계 속으로 다시 밀어 넣으라고 얘기한다. 관계 속에서 온전한 나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헷갈린다.

  근 40년을 살아오면서 겪은 수많은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나"라는 존재에 대해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다. 누구의 아들, 무슨 회사의 과장, 누구의 친구 등 수많은 관계 속에서 수많은 역할만 해왔다.
  소크라테스의 "나 자신을 알라"라는 말처럼 스스로가 자신을 아는 것이 먼저 가 아닐까?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가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존감'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퍼진 건 그 때문이 아닌 였던가? 타인이 인정하는 내가 아닌 스스로가 인정하는 자신이 야말과 타인과의 관계에서 바로 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관계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스스로 자신 존재를 바로 세우고 관계 속에서 자신을 완성시켜는 것이 인생을 의미있게 만드는 것이 아닐?

Relationship starts from conce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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