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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Jan 06. 2022

고슴도치처럼 상처 주는 우리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 박찬국

"오빠! 이제 말 편하게 해요"

"아녜요 괜찮아요, 나중에 좀 더 친해지면 그럴게요"


책을 읽고 문득 떠오른 장면이다.


'쇼펜하우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이름일 것이다. 나 또한 그의 이름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의 철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작년 연말 공원에서 심취해 읽어 내려간 그의 철학은 모세가 홍해를 가르듯 내 생각의 바다를 또 한 번 갈라놓았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1788.2.22-1860.9.21)

  책을 읽고 알게 된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은 쇼펜하우어가 니체에게 아주 많은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는 것이다. 둘은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동시대를 살다 간 인물들이다. 어찌 보면 니체의 철학적 멘토가 쇼펜하우어였을지도 모른다. 니체는 그의 철학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자신만의 새로운 철학을 만들어낸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일전에 니체의 책을 읽고 서평[사는 게 힘드냐고 니체가 물었다](서평 참조)을 썼던 적이 있다. 책을 읽고 니체의 강렬한 어록들과 철학적 통찰에 깊은 공감을 했고 나의 가치관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해 가고 있었다.


  "톨스토이는 쇼펜하우어를 위대한 천재라고 부르면서 쇼펜하우어가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그가 말했듯이 이 세상이 하찮은 인간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중략...) 철학자가 문학계에 이렇게 폭넓게 영향을 끼친 예는 니체를 제외하고는 찾아볼 수 없다"


                                                              -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 중에서 -


  더욱이 쇼펜하우어는 톨스토이를 비롯해 역사상 문학계에서 유명하다는 수많은 작가들에게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니체 또한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그의 저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그의 문학적 소질을 엿볼 수 있다.


  우연치 않게도 이 책 또한 같은 같은 저자(박찬국 - 서울대 철학과 교수)이다. 저자가 철학적 가치관이 나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의 문체와 스토리텔링 스타일은 흡입력 있고 잘 읽힌다. 믿고 읽을 수 있는 작가를 한 명 더 발견한 것 같아 기쁘다. 니체에 이어 인생에 또 하나의 멘토 같은 인물을 찾은 것 같다.


  첵을 읽고 찾은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공통점이라면 둘은 인간의 고통(+권태)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로 니체는 허무주의(니힐니즘)로 대표되는 둘의 철학은 고통과 권태 속 세상에서 어떻게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극복해 가느냐가 인생을 행복을 좌우한다고 말한다. 또 서론이 길었다.


한 발 다가서면 한 발 물러서는


  서론에 남녀의 대화 장면은 과거에도 지금도 변함없다. 초면이나 몇 번 만나지 않은 관계에서는 나는 웬만해선 말을 잘 놓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상하고저를 떠나서 그것이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예의이고 말로 인한 실수를 미연에 방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 혹은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라는 말이나 '혀 밑에 도끼 들었다'처럼 한 마디 말로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 그만큼 말은 강력하고 무서운 도구이다. 그건 이상하게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욱 강력해지는 것 같다. 어릴 때는 친구들끼리 욕하고 험한 말을 해도 별 신경도 안 쓰고 오히려 그게 더 멋있고 의리 있어 보였지만 지금 듣는다면 적잖은 비수가 꽂힐 것 같다.


  난 과거나 지금이나 말을 잘하지 못한다. 스스로도 타인의 말에 상처받으면서 내 말이 타인에게 상처 주고 있다는 걸 잘 몰랐다. 어느 순간 나의 말이 가시라는 것을 깨닫고는 새로운 관계를 맺는 사람들과는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존칭을 쓰는 버릇이 생겼다. 이 습관은 이런 나의 말실수를 줄여보고자 하는 나의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지금 내가 말보다 글을 더 좋아하게 된 계기도 어찌 보면 그동안 말이 만들어낸 오해와 상처들로부터 벗어나고픈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과거 여자 친구에게도 연애초 오랜 기간 서로 존칭을 썼다. 물론 시간이 지나고 연인관계가 깊어졌을 때는 말을 놓았지만 말이다. 문제는 말을 놓고 난 후 의도치 않게 상처 주는 말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가까워질수록 말을 조심해야 하지만 가까워질수록 편해지고픈 마음에 실수가 많아지고 상처 주는 일은 잦아진다.


  아이러니 한 건 남녀관계에서 존칭은 서로를 존중해주고 말실수를 줄여주긴 했지만 감정표현의 적지 않은 장벽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과도한 존중과 예의가 친근함의 간절함을 반감시켜 어중간한 포지션을 만들어 어느 한 곳으로도 넘어가지 못하는 애매한 관계가 지속되었다. 남녀관계에서 중도는 힘들고도 괴롭다.


  상대방이 말을 놓자고 한 발 다가오는 것은 좀 더 편안하고 가까운 관계로 나아가자는 의미이다. 이에 한 발 물러서는 거절은 상대방에게 어색함을 불러올 수 있다. 한 번이면 뭐 그렇다 치지만 두세 번이 넘어가면 불편한 감정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럼 타이밍을 놓쳐 더 이상 가까워지기 힘들어진다.


  나의 이런 우려 섞인 태도 때문에 인간관계 진전 속도가 더디고 연애전선에 불이 잘 붙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긴 하다. 불을 당겨야 하는 시점인데 자꾸 재를 뿌리니 말이다. 그렇다고 훅 당기면 훅 꺼지기 마련이고 훅 찔릴 수도 있다. 가시가 갑자기 훅 들어오면 '앗 따거' 하며 도망치기 일수이다. 하지만 몸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가시가 천천히 박혀 들어오면 그게 한 몸이 되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러려면 좀 많은 세월이 걸리겠지만... 그래도 천천히 들어오면 도망치진 않는다. 좀 참아본다. 참을 만하면 같이 가는 것이다. 그게 연애의 이치와 비슷하지 않을까? 연애가 어찌 좋을 수만 있겠는가. 인간은 진전과 변화가 없는 관계를 견디지 못한다. 한 발 다가오면 반 발 물러서는 지혜가 필요해 보인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 = 사회적 거리?! (Social distance 1.5m?!) 

   

  글의 제목은 쇼펜하우어의 저서에도 등장하는 '고슴도치 딜레마'를 빌려서 지어보았다. 책 속에 내용 중에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이라 이 부분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그는 그의 저서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고슴도치에 묘사한다.


  한 겨울 두 마리의 고슴도치가 추위에 떨며 같이 있다. 둘은 체온을 나누고 싶어 서로에게 다가가지만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떨어지면 춥고 다가가자니 아프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결국 둘은 서로 찌르지 않는 거리에서 얼어 죽는다. 


  이 우화 같은 이야기가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관계를 아주 잘 축약해서 묘사하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외롭다. 내가 많은 글에서 여러 번 언급했지만 인간(人間)은 말 그대로 인간과 인간 사이다.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도록 설계되었다. 문제는 인간을 고슴도치로 설계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삶은 고해(苦海: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다고 표현한 것이다.


고통은 가깝고 익숙한 것에서


  우리는 항상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상처받고 힘들어한다. 우리가 생뚱맞게 낯선 이방인에게 상처받진 않는다. 혹여 미친 이방인에게 '묻지마' 공격을 받을 수 있을지언정 마음의 상처를 받진 않는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상하게 항상 낯선 이들만 경계한다. 일전에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느낀 것도 이방인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피해도 끼치지 않았지만 나와 다른 곳 혹은 다른 생각이라는 이유로 배척하고 경계한다. 어찌 보면 인간은 낯선 것을 멀리하고 공격하며 익숙한 것만 찾으며 그 속에서 영원토록 고통받으며 '왜 나는 고통스럽습니까' 하며 신에게 끊임없이 되묻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 [레위기 19:18, 마태복음 22:39] -


  우리는 항상 가족, 연인 친구같이 가까운 이들을 네 몸 같이 사랑하지만 항상 그들에게서 찔리고 상처받는다. 아이러니하다. 성경 속 말이 틀리지 않다. 과거 성인들은 자신과 가족을 챙기기보단 소외받고 고통받는 이웃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베풀었다는 것을 알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행동은 성인들을 우러러보면서도 또 다른 이유를 들어 이율배반적인 행동들을 하고 있는 듯하다.


상처는 아물지만 죽음은...


  고슴도치 딜레마처럼 우리는 상처받기 싫어 각자의 방에 갇혀 살아간다.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도 내가 다가가는 것도 싫다. 그냥 온라인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안도감만 느끼고 싶다. 사랑의 감정은 드라마로 대리 만족하고 위로는 개와 고양이에게 받고 허전함은 맛있는 음식으로 채우면 된다고 하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로 각자도생이 살길이라 생각하며 독고다이로 살아간다. 코로나 19의 펜데믹이 이어지며 이 현상은 더욱 심해지고 일상화되어 간다. 이건 고슴도치 우화처럼 결국 모두가 파국을 맞이하는 길이 아닐까? 비록 상처받더라도 보듬고 안아줘야 하는 건 아닐까? 가시에 찔린 상처는 아물지만 홀로 차갑게 죽어가는 영혼은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책을 읽고 난 후, 인간 세상을 냉철하게 통찰하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읽고 있으면 현타가 밀려오긴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동화가 아니듯 현상을 제대로 알고 이 고통의 바다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를 고민해보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나 또한 가까운 자에게 가시를 들이대고 있었던 건 아닌지 혹은 상처가 두려워 누군가에게 다가서지 않는 건 아닌지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비록 고슴도치처럼 누구나 서로에서 상처 주는 따가운 가시를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 고통을 견뎌낼 더 큰 사랑과 위로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고통만 있을 수도 사랑과 위로만 있을 수도 없다. 


그것이 삶이다.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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