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녀만 뜨거웠던 소개팅

평범한 남자 EP 3 (개정판)

by 글짓는 목수

소개팅하면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누구나 있을 것이다. 소개팅의 아련한 추억...특히 첫 소개팅은 잊을 수가 없다.

어느덧 07년 가을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었다. 취업 후 무엇보다 기분 좋은 것 중의 하나가 백수 때와는 달리 금전적인 여유가 생긴다는 것이다. 역시 남자는 지갑이 두둑해야 어깨가 펴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졸업 후 반 년간의 취업 준비의 기간 동안 얼마나 움츠려 있었던가? 인색한 부모님을 둔 덕분에 취업 준비 기간 동안은 지지리도 궁핍하게 보냈다. 그 끊기 힘들다는 담배까지 끊었다. 담뱃값이 없어서... 하지만 당당히 취업 후 나의 통장은 조금씩 채워져 갔고 채워진 통장의 잔고만큼 나의 자존감도 같이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백수 시절엔 최영 장군의 말씀을 받들었다.


"여자 보기를 돌 같이 하라! 아니 황금 보기를 돌같이 였던가?! 어쨌든 점심 한 끼 사 먹을 돈도 없는데 여자는 무슨...얼어주글...”


성욕보다 식욕이 우선이다. 일단 배가 불러야 여자생각도 나는 법이다. 자신의 생존도 책임지지 못하는 수컷에게 암컷은 그냥 그림에 떡일 뿐이다.


백수 시절 K협회에서 취업준비를 하던 시절 연애와 공부를 병행하던 몇몇 교육생 커플들이 있었다. 두 마리의 토끼는 동시에 잡히지 않는다. 취업과 동시에 퇴소를 하는 협회의 규정상 둘 중에 한쪽의 취업은 이별 통보와 다름 없었다. 끼리끼리 노는 법이다. 백수는 백수끼리 직장인은 직장인끼리 말이다. 남겨진 백수만 더 힘들어질 뿐이다.


난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나는 둘 다 할 수 있다. 직장과 돈을 가졌으니... 거리를 활보하는 연인들의 알콩달콩한 모습을 나도 꿈꿀 수 있을 것 같았다. 견물생심(見物生心) 아니 견녀생심(見女生心)이라고 해야 하나?!


"어디 괜찮은 여자 없어? 소개 좀 해줘 잘 되면 한 턱 쏠게~ 나도 이제 번듯한 직장도 있고 연애도 좀 해봐야지 않겠어?!"


주변에 친구와 직장 동료들한테 소개팅을 주선해달라고 시도 때도없이 광고를 하고 다녔다. 굶주린 늑대가 먹잇감을 찾아 숲 속을 뒤지듯이 곳곳에 애인 구함이라는 명함을 뿌리고 다녔다. 드디어 입질이 왔다. 옆 부서 여직원이 소개팅을 주선하겠다는 것이다.


입사 후 나는 항상 밝은 표정과 크고 당당한 목소리로 본사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항상 아침에 출근하면 큰 목소리로 "안녕하십니까~~~!" 쩌렁쩌렁 외치고 다녔고, 3개월 수습 기간이 끝나고 갑자기 본사 전략 기획실로 발령이 났다. 입사는 해외 영업부로 했는데... 이게 웬 생뚱맞은 인사이동인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사장이 매일 복도에서 울려퍼지는 우렁찬 인사 소리에 누구냐고 수소문을 했다고 한다. 그 인사성과 목소리가 마음에 들어 나를 전략 기획실로 불러드렸다는 후문을 인사팀을 통해 들렸다. 그 여직원도 평소 나의 이런 기백 있는 모습이 마음에 들어 친구를 소개 줄까 생각했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나의 첫 소개팅은 그렇게 성사되었다.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나는 여자를 잘 몰랐다. 제대로 된 연애 경험도 없을뿐더러 여자를 만나러 나가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친구의 사전 코칭을 받기로 했다. 꼬치친구 중에선 나름 소개팅을 가장 많이 해본 꼬치 친구 귀덕이를 섭외했다.


"소개팅 나가면 일단 첫날은 간단히 차만 한잔하고 헤어져"

"그게 무슨 소리야? 왜 간단히 헤어져야는데…?"


난 머리를 긁적이며 따져 물었다.


"첫날부터 너무 많은 얘기를 나누면 서로에 대한 관심이 떨어질 수가 있단 말이야. 애프터를 위한 여운과 궁금증을 남겨둬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는 거야. 쨔쉭아~ 그냥 묻지도 따지지 말고 내 말 들어! 그리고 마음에 들었으면 헤어질 때 다음 약속을 잡고 헤어져 꼭!"

"어… 어 그럴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숙맥인 나로서는 달리 기댈 곳이 없었다.


운명의 날이 밝았다. 새로 산 세미 정장에 머리도 하고 한껏 멋을 내고 소개팅 장소인 커피숍으로 향했다.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왔다. 지적인 이미지 연출을 위한 책 한 권도 잊지 않았다. 이것도 다 꼬치친구인 귀덕이의 센스였다.


평소 보지 않던 책을 보고 앉아있으려니 졸음이 쏟아진다. 졸음을 쫓으려 물을 마시려고 물컵을 입에 가져다 대는 순간이었다. 단아한 원피스에 귀밑까지 내려온 단발 생머리가 유난히도 윤기 있어 보이는 여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하마터면 입에서 분수 쇼가 펼쳐질 뻔한 걸 간신히 목구멍으로 넘기며 일어섰다.


"희택씨?!"

"네, 태희씨 맞으신가요?"


나는 아직도 어찌해야 될지 모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멀뚱멀뚱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앉아도 될까요?"

"네… 네 무…물론이죠 앉으세요."


커피를 주문하고 서로 잠시 동안 눈이 마주쳤다. 길거리에서 불량 학생을 만났을 때처럼 이내 눈을 내리깔고 시선을 피했다. 벌써 서열 정리가 된 것인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랐다. 다행히도 그 여자는 주선자 친구 얘기를 자연스럽게 꺼낸다. 고마웠다. 나의 어색함을 눈치챘는지 그녀가 대화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간간이 물어오는 질문에 답을 하고 고개만 끄덕일 뿐, 그다지 말을 늘어놓지 않았다. 가끔 정적이 흐르기도 했지만 그녀의 주도로 이내 다시 대화와 이어졌다. 적극적인 성향의 그녀가 오히려 나를 편안하게 해 주었다. 단아한 모습에 적극적인 성향? 약간 언매칭 한 매력을 풍기는 여자다. 그렇게 2시간쯤 흘렀다. 오후 늦게 만나서 창밖에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친구의 핵심 조언이 떠올랐다.


'간단히 차만 마시고 헤어져!'


"저기 태희씨! 오늘은 이만… 저녁에 집에 일이 있어서요, 주말에 시간 되시면 저녁식사같이 하실래요?"

"음… 그래요 저도 이번 주말에 특별한 약속이 없으니 괜찮을 것 같네요"


대답 전 잠시 멈칫하는 그녀의 표정이 걱정됐지만 이내 애프터의 승낙을 받으면서 소개팅 1차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소개팅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소개팅의 간략한 상황들을 얘기하니 무슨 부장님이 부하직원 칭찬하듯 말한다.


"어 그래 잘했네 수고했어!"


무슨 부장님한테 업무 보고하는 하는 분위기다.


"주말엔 꼭 차를 가지고 나가야 돼!"

"왜?!"

"이제 진도를 좀 나가야지, 애프터를 받았으니 너에게 호감이 있다는 얘기니까, 그날은 차로 집까지 데려다줘, 너도 호의를 베풀면서 집이 어딘지도 알아놓고"

"꼭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그리고 나 아직 차도 없는 거 알면서..."

"니네 집 차 있잖아"

"그게 내 차냐? 그리고 차 상태도 엉망인데"


집에 부모님이 쓰시는 차가 한 대 있었다. 메뉴얼 차(수동)다. 엘란트라 94년, 95년식인가? 나도 가끔씩 출퇴근 용으로 가끔 몰고 다녔다.


"그 차는 누구 태우고 다니긴 좀 그런데"

"성의를 보이는 게 중요하지 차가 뭔지가 중요하냐? 그리고 너 사회 초년생인 거 뻔히 아는데… 차 있는 것만으로도 장땡이지, 두말 말고 차 가져가서 무조건 집에 데려다줘, 알았지?"

"어… 어 그럴게"


주말이 다가왔다. 이번엔 고깃집에서 만났다. 친구가 고깃집은 안된다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그녀가 고기를 좋아한다며 고깃집을 추천하는 바람에 2차전은 고깃집에서 진행되었다.


"이 집 삼겹살이 근방에선 젤 괜찮아요"


그녀가 알려준 고깃집이다. 그녀의 적극성은 여기서도 빛을 낸다. 첫 만남보다 분위기가 더 화기애애 졌다. 역시 사람은 먼저 먹이고 봐야는 가 보다, 마더 테레사의 '먼저 먹이라'라 가슴 속에 깊이 와 닿는다. 배가 부르면 예민했던 신경이 한층 부드러워진다. 우리는 부드러워진 고기 육질만큼 한 층 부드러운 관계가 되어가는 듯했다. 식사가 끝나고 언제나처럼 친구의 메뉴얼을 떠올린다.


"오늘은 제가 댁에 데려다 드려도 될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집도 가까운데요 뭘"

"꼭 데려다 드려야는데..."

"예?!.."

"아니, 꼭 좀 데려다 드리고 싶어서요"

"굳이 번거롭게 그러실 필요까지야..."

"제가 그 쪽을 좋아해서 그런 겁니다."

"…"


그녀는 당황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잠시 머뭇하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우린 올드한 매뉴얼 카에 올랐다. 이 차 옆 자석에 여자를 태워보는 건 처음이다. 난 시동을 걸고 기어를 1단에 걸고 터덜터덜 식당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식당에서의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어색한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주말 저녁시간이라 시내에 차가 많이 붐비고 있었다. 대형 교차로에 차가 뒤섞여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적막한 차 안의 좁은 공간 속 그녀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진다. 나는 애써 외면하고 정면을 주시한다. 도저히 그녀와 눈을 마주칠 용기가 없다. 그녀가 나의 이름을 부른다. 이젠 운명의 순간이 온 것인가?


"희…택… 씨…"

"예?"

"뜨…뜨거워요!"

"에…예?!"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속삭였다.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를 가로 봤다. 그녀의 볼은 상기되어 있었고, 이마엔 땀이 맺어있다. 뭔지 모를 간절한 눈빛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 뜨거워… 워어~"

"예?! 왜… 왜 그러세요?"


내 차는 열선시트도 없을뿐더러 히터도 틀지 않았다. 그리고 10월의 늦가을 차 이 더울리가 없다.


'기회인가?! 남자답게 들이대어야 하나?!'


그런 찰나, 갑자기 주변을 둘러싼 차들이 일제히 경적을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창문을 열었다.


"빵빵빵~~"

"아저씨!!! 차 본네트에 불났어요!"


이윽고 난 조수석 앞 보닛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재빨리 다시 그녀를 확인했다. 이제 그녀는 상기된 표정은 상기를 넘어서 익어갈 듯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는 다리를 가슴팍으로 끌어당겨 감아쥐고 있었다.


"아~ 뜨거워요 희택씨!"

"앗! 죄송해요, 잠시만요 차에 이상이…"


정신이 혼미했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신호 받고 교차로를 벗어나 갓길에 차를 대어야 했다.


"태희씨..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교차로 지나서 차를 갓길에 대어야 할 것 같아요!"

"뜨거워 아~ 뜨거워!"


그녀는 뜨거움이 한계를 넘어섰는지 갑자기 차 문을 열더니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도로 중앙에서 보도 블록까지 차들 사이를 비집고 번개 같은 속도로 사라졌다. 여자가 그렇게 빨리 달릴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난 일단 정신을 차리고 겁에 질린 채 차를 갓길로 몰았다. 주변에선 경적소리와 손가락 세례가 날아들고 난리 법석이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보험사에 연락했다. 다행히 시동을 끄고 시간이 지나니 연기는 잦아들었고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조수석 앞쪽의 라디에이터 파이프에 문제가 생겨 뜨거운 수증기가 새어 나온 것이란다. 차는 수리를 맡기고 돌아오는 길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연결후 통화요금이 부과됩니다. 삐~"


그녀의 전화기는 꺼져있다.


며칠 뒤 회사에서 주선자 여직원이 나를 찾아왔다. 표정이 좋지 않다. 나를 조용히 탕비실로 불러낸다.


"희택씨! 도대체 제 친구에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무슨 짓이라뇨?!"

"제 친구가 희택씨 만나고 나서부터 차를 못 타고 있어요. 도대체 무슨 차를 끌고 나오셨래, 친구가 겁에 질려 승차 공포증에 걸릴 정도예요?!"

"아~ 그게… 어쨌든 죄송합니다."


‘승차 공포증’이라? 나도 무서웠다. 그렇게 차와 함께 폭발하는 거 아닐까 하는 공포 속에 혼자 남겨졌다. 우사인 볼트처럼 질주하던 그녀의 뒷모습은 조금 전 고깃집에서의 호감을 이내 비호감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꺼져있던 전화기는 나를 절망케 했다.


그렇게 나의 첫 소개팅은 막을 내렸다.



keyword
이전 02화제2 외국어의 장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