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EP 4 (개정판)
"희택 씨 술 좀 하나?"
"예! 그럭저럭 마십니다!"
"오 그래? 그럼 오늘 신입사원 회식 때 기대할게 흐흐흐"
회사 입사 후 해외영업부에서의 신입사원 환영 회식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박상무의 지시로 나와 같이 입사한 여자 동기인 현지 씨와 둘의 환영 회식이 열렸다.
해외영업부는 중국 영업과 일본 영업 두 파트로 나눠져 있었다. 일본 쪽 매출 비중이 훨씬 더 컸지만 중국 쪽은 향후 사업을 더 크게 확장하려는 회장의 방침으로 중국 파트에 힘을 많이 실어주고 있었다. 덕분에 중국 관련 인력이 필요했고 나와 여직원 현지씨까지 그렇게 두 명이 충원되었던 것이다.
중국 영업은 현지 중국 고객사에 수출을 통한 직접 매출보다는 현지 계열사의 로컬 영업을 지원해주는 역할이 더 컸다. 중국 쪽 투자규모가 큰 만큼 중국 사업 안정화에 회사의 사활이 걸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중국 영업파트 4명 일본 영업파트 3명에 박상무까지 8명이다. 일본과 중국의 관계처럼 같은 배를 타고 있긴 하지만 알게 모르게 불편한 경쟁 관계다. 나와 현지씨가 입사 전 해외영업부의 막내였던 일본영업팀의 전시중 사원은 바로 위 선임이었고 내년 대리 진급을 앞둔 경력직 사원이었다. 그는 이름에 걸맞게 회사에서 항상 전투적인 모습을 모였고 나를 마치 적군처럼 적대적으로 대했다. 그는 나와 입사동기 여직원인 현지씨의 OJT(On-the-Job Training)를 담당하고 있었다. 전사원 의 뭔지 모를 음흉한 눈빛과 한쪽만 추켜올린 입고리와 함께 던진 “회식 때 기대할게”라는 말에 왠지 기분이 찝찝하다.
박상무는 엔지니어 출신이지만 뛰어난 일본어 능력의 소유자로 과거 일본 영업을 책임지던 사람이다. 일본을 집안 드나들 듯이 오고 간다. 일식을 매우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회식 장소 또한 일식집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희택 씨와 현지 씨! 해외영업부에 온 걸 축하해요, 다들 두 신입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예!” (일제히)
“자자! 그럼 둘이 각자 한 마디씩 입사 소감을 얘기해봐, 건배사도 같이 빼먹지 말고 영업은 이런 거 잘해야 돼. 알지? 식상한 거 하면 벌주야! 하하하"
박상무의 축하인사가 끝나자 해외영업부 넘버 투이자 일본파트장인 이 차장이 건배사를 제안한다. 우선 입사동기인 현지 씨가 두 손으로 받쳐 든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선배님들 따라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쁘게 봐주세요!”
애교 섞인 목소리로 열심히와 이쁘게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를 섞은 건배사를 속삭이듯 말한다.
박상무는 딸 같은 그녀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웃고 있다. 이 차장은 넙적한 얼굴과 큼지막한 입을 한 껏 벌여 ‘귀엽다’를 외치며 박수와 함께 잔을 추켜올린다. 그녀는 소주잔에 입술만 살짝 적시고는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내 차례가 왔다.
"해외영업부 일원이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앞으로 최선을 다해 일하겠습니다. 제가 영업팀을 선창 하면 위하여를 다 같이 외치며 건배하겠습니다."
"벌주 당첨! 아직도 그런 식상한 건배사를… 쯧쯧"
나는 그제야 낮에 전선임이 했던 말의 의미를 조금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나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내가 마실 폭탄주를 제조하고 있다. 나에게 전달된 폭탄주를 한 번에 들이켜고 머리에 털어 보였다.
"좋아~ 다시! 한 번에 가자!"
빈 속에 폭탄주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면서 위 속에 닿는 그 짧은 시간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무방비 상태의 위는 알코올을 이온음료처럼 흡수하는 느낌이다.
"영업은 가족입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 제가 '우리가'를 외치면 '족같이'를 외쳐주십시오! 우리가!~"
"족(좆) 같치!! "
"하하하"
다들 폭소를 터트리며 술잔을 들이켠다. 한 여자만 유독 벌레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흘기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다. 난 나의 사수의 노대리의 눈치에 자리에서 일어나 영업팀의 상사들을 한 명 한 명씩 서열 순으로 돌며 술을 받아마셨다. 반면 동기인 현지 씨는 상사들이 권하는 술을 애교와 몸짓으로 사양하다가 결국 그 술이 나에게 넘어온다.
"희택! 동기가 못 마시면 대신 마셔야지 가족같이 안 그래? 하하하"
정신이 혼미해져 온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는 참아도 끓어 넘치는 내용물은 더 이상 가라앉힐 수 없었다. 화장실 변기를 부여잡고 형용하기 힘든 색깔과 냄새의 국물을 한참 동안 쏟아냈다. 호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진동소리에 핸드폰을 열었다.
[야~ 어디 갔어? 빨리 들어와!]
전사원의 문자 메시지다. 변기에 물을 내리고 쓰린 속을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다. 세면대에 비친 내 얼굴의 윤곽이 여러 개로 보인다. 찬물로 입을 헹구고 세수를 했다. 그러자 희미하던 얼굴의 윤곽이 조금 돌아오는가 싶더니 다시 희미해진다.
"자~ 2차 가야지 2차!"
일식집에서 끝날 회식이 아니었다. 박상무는 법인카드를 이 차장에게 건네주며 더 먹고 놀다 들어가라며 이 차장의 어깨를 한 번 툭 치고는 대리기사가 기다리고 있는 차 안으로 몸을 구겨 넣는다. 웃긴 건 현지 씨도 그 옆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이다.
"현지 씨는 좋겠어 상무님이 집까지 태워다 주시고"
"상무님 감사합니다."
박상무와 현지 씨가 사라지고 남은 정예병들은 네온사인이 즐비한 유흥가 골목을 향해 걷고 있다. 중국 영업 파트장인 정 과장은 어딘가 전화를 하고 있다. 무슨 단골 주점이 있는지 예약을 하는 것 같아 보인다.
커다란 스크린과 ㄷ자 모양으로 테이블을 감싼 빨간 소파가 있는 음침하고 커다란 방에는 이미 술과 과일이 세팅되어 있다. 마담은 이 차장의 품 속을 파고들며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냐며 갖은 아양을 떤다.
직업여성들이 줄줄이 들어오고 음악이 흐른다. 술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하고 여자에 취해간다. 난 가누기 힘든 몸을 가끔씩 여자한테 기대며 중심을 잡았고 손에선 탬버린을 놓지 않았다.
"막내~ 술 말아봐라!"
"옙!"
난 초점을 잃어버린 눈으로 양주잔과 맥주잔에 각각 술을 붓기 시작한다. 술병 주둥이가 갈 곳을 잃은 개처럼 방향을 잃고 허공을 휘젓고 있다. 접대부 여자가 내 손을 잡고 같이 부어준다. 맥주잔 위에 늘어선 양주잔이 다이빙을 준비하고 있다.
"말까요?"
"뭘로?"
내가 손으로 양주잔을 도미노처럼 밀려 하자, 이 차장이 마이크로 뭐하냐며 큰 소리로 나무라며 자기 손으로 이마를 두어 번 치는 시늉을 한다. 친절하게도 전선임이 잔 앞에 물수건을 한 장 깔아준다.
"쾅!"
머리로 테이블을 힘차게 들이받았다. 그러자 양주잔들이 일제히 맥주잔 품 속으로 빠져들었다. 한두 잔이 밖으로 비켜난다.
"야야~~ 다시 다시, 것도 제대로 못 집어넣어서 어디에 쓰냐? 사내 녀석이~"
"쾅! 쾅! 쾅!"
술기운에 아픈지도 모르겠다. 대가리로 폭탄주를 말고 있는 나의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접대부 아가씨는 나에 이마에 물수건을 갖다 대어준다.
새벽이 깊어가고 기억이 희미해진다. 스산한 기운에 눈을 떴다. 사방이 유리로 막혀있다. 나의 몸은 쥐며느리처럼 말려져 좁은 유리 박스에 끼어있다. 올려다본 박스 위에는 전화기가 보인다. 유리벽 밖에는 웃거나 혹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행인들이 나를 흘기며 지나간다. 무덤처럼 볼록하게 튀어 오른 이마에서 쓰라린 통증이 느껴진다. 출근 시간이 임박해 온다.
바로 출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