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EP 5 (개정판)
사장은 사십 대 초반이다. 볼에 살이 올라 어찌 보면 귀엽게 보이기까지 하다. 외모만으로는 삼십 대 후반으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젊은 나이답게 옷도 캐주얼하게 입고 다닌다. 청바지에 재킷 그리고 스니커즈를 신고 다닌다. 아버지인 회장님이 없었더라면 아마 반바지를 입고 출근했을지도 모른다. 말투도 년간 4천억 원 매출의 중견기업 사장과는 거리가 먼 구멍가게 사장 같은 느낌이다.
"야~ 도다리! 그 자료 언제 볼 수 있냐?"
한 번은 사장이 전략 기획실 사무실을 지나가면서 밑에 사원들 사이에서만 불리는 도대리의 별명을 어떻게 알았는지 크게 외치며 사무실을 지나가는 바람에 전 기획실 직원이 억지로 웃음을 참느라 고생했다. 그래도 나름 기획실 팀장 대행인데 그의 위신은 처참하게 땅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사장은 항상 늙은 임원진들 틈바구니에서 나름 예의를 갖추느라 항상 스트레스를 받는 모양이다. 그 스트레스가 만만한 이들에게로 향하는 듯 보였다.
들리는 소문에는 사장은 학창 시절 공부와는 별로 친하지 않은 듯하다. 하와이에서 대학을 졸업했다. 대학 이름을 알 수 없지만 거기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돌아온 유학파다. 많고 많은 미국에 대학들 중에 하필 하와이에서 공부를 했다는 사실이 지금의 그의 모습으로 미루어보아 공부보단 풍류를 더 즐겼을 거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사장실에는 책이 꽂혀 있어야 할 책장에 RC카와 비행기가 가득하다. 디자인 전공답게 희귀 템들만 수집한다. 가끔씩 주말 근무 때 사장은 제 아들 녀석들을 회사에 데리고 와서 본사 건물 앞 잔디밭에서 RC 비행기를 띄워 같이 노는 모습이 보인다. 회사가 아이들 놀이터가 된다. 사장 비서는 주말에는 애들 간식도 챙기고 놀아주며 보육교사가 되어야 한다. 보육교사 자격증이 있는 여직원만 비서가 될 수 있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그는 보수적인 조선업계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그의 행동과 말은 항상 회장의 걱정거리였다. 그가 생산관리 과장으로 처음 이 회사에 입사했을 때 재규어 스포츠카를 타고 출근을 했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서 디자인 관련 회사에 잠시 몸 담고 있다가 가업을 물려받기 위해 회사로 끌려왔다는 것이다. 처음에 거침없는 그의 행동과 말은 직원들 사이에 큰 화제였다고 한다. 지금은 정말 양반이 된 거라고 한다.
그의 차는 V6 3.8ℓ 람다 가솔린 터보 엔진을 장착한 풀옵션의 LUV(Luxury Utility Vehicle) 베라크루스다. 그것도 부족했는지 튜닝까지 했다. 중후한 검은색 세단인 에쿠스나 제네시스 아니면 그랜져가 대부분인 조선업계 사장들의 차량 라인업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 일으켰다. 재규어를 포기한 것만으로도 그는 많은 양보를 한 듯 보인다. 국내 메인 고객사인 대형 조선사의 눈치에 외제차는 무리수가 컸다. 고객사의 눈 밖에 나서 좋을 게 없다. 업계에서 30년간 쌓아온 회장님의 신뢰와 명성에 먹칠을 할 순 없는 노릇이다. 회장은 일본 조선사뿐 아니라 국내 대형 조선사들 사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 바닥에선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하얀 백발에 중후하고 온화한 인상의 그는 회사뿐 아니라 동종업계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다.
처음으로 사장의 차에 올라탄 건 전략 기획실로 발령 후 첫 회식 때였다.
전략 기획실 직원들이 두려워하는 한 가지가 있다. 그건 바로 회식이다. 회식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워낙 젊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부서이고 사장도 개방적이기 때문에 회식 분위기가 이전 해외영업부와는 다르게 프리한 편이다. 다만 사장의 장난기가 문제다.
"도 팀장~ 오늘 회식이다! 막내 희택이는 내차 타고 가자"
"옙 사장님!"
전략 기획실 회식은 항상 예측 불가이다. 사장이 술 당기는 날이 회식이다. 아침에 출근과 동시에 사장의 입으로 전달된 회식 통보에 다들 비상이다. 점심시간이 지나면 사내 메신저로 회식 장소가 날아온다. 사장이 직접 회식장소를 선정해서 전략 기획실 직원들에게 장소를 공지한다. 사장은 회식의 격식 파괴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회식 장소도 예측할 수 없다. 한 번은 대학가 떡볶이집이 유명하다며 대학가의 허름한 분식집에서 떡볶이에 어묵 국물, 튀김을 시켜놓고 회식을 한 적도 있다. 어떤 때는 고급 호텔 뷔페로 가서 인당 10만 원이 넘는 뷔페를 먹으며 호사를 누리기도 한다. 극과 극을 체험할 수 있다. 사장의 차에 선탑할 수 있는 특권은 막내에게만 주어진다.
"야~ 넌 인사를 왜 그렇게 크게 하냐?"
"죄송합니다. 작게 할까요?"
"아니 그냥 크게 해. 너만 크네 다들 뒤에서 소곤대기만 하는데…"
"…"
사장은 회식장소에 항상 먼저 도착한다. 알다시피 그는 스피드 광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를 따라잡을 수 없다. V6 3.8ℓ 람다 가솔린 튜닝 엔진을 장착한 베라크루스는 출발과 함께 머리가 헤드레스트에 붙어버리는 비행기 이륙 상황을 체험할 수 있다. 좌석과 몸이 한치의 틈도 없이 밀착되는 느낌이다. 과속 카메라도 신경쓰지 않는다. 어차피 법인차이기에 벌금은 회사에서 낸다. 제조업 CEO보다는 카레이서가 더 잘 어울려 보인다.
퇴근시간이 땡 하자마자, 기획실 직원들은 일제히 사무실을 뛰어나간다. 각자의 차에 오르기가 무섭게 내달린다. 이미 근무 시간에 인터넷으로 회식 장소로의 최단 경로를 확인했다. DB 중공업 기획실 배 F1 레이싱 경주가 시작된다.
먼저 도착한 사장은 그 술집의 술을 종류별로 다 시켜놓고 500cc 맥주잔에 섞어 넣는다. 비율은 그의 마음이다. 그렇게 정체를 알 수 없는 폭탄주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한 두 명씩 헐레벌떡 회식 장소로 등장한다.
"아직 안 온 녀석은 누구야?"
"우덕 씨가 아직 도착 안 했습니다."
도 팀장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덕 씨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들어온다. 그리고 테이블의 앉아있는 인원들을 훑어보고는 이내 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군다.
"짝짝짝!! 야~ 오늘은 우덕이야? 축하한다"
오늘 그는 그렇게 사장이 희생양이 되었다. 예외는 없다. 그는 500cc 맥주잔에 가득 담긴 오색영롱한 폭탄주를 끊김 없이 한 번에 마시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좀비가 되어간다.
기획실 직원들의 드라이빙 역량은 날이 갈수록 성장한다.
회식은 공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