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EP 6 (개정판)
영화 '미션 임파서블'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시리즈는 시즌 3편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톰 크루즈의 아찔하고 은밀한 스파이 연기는 언제나 손에 땀을 쥐게 한다. 그런 스파이 영화를 볼 때면 국정원이나 FBI의 비밀 요원들의 실제 세계는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남자로 태어나 한 번쯤 그런 스릴 있는 삶을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다. 여자들도 한 번쯤 007 영화 속 본드걸처럼 첩보요원과의 아찔한 사랑에 빠져보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나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 아쉽게도 본드걸은 없었지만…
나에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 임무가 생겼다.
전략기획실에서의 생활과 업무가 조금씩 익숙해져 갈 무렵이었다. 직장 생활도 어느덧 반년을 넘어 이제 해를 넘어가고 있었다. 이제 넘쳐나는 업무 속에 야근은 물론이거니와 주말 특근도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토요일은 오전 근무만 해도 잔업 수당이 지급되어 기름값이라도 번다는 생각으로 거의 매주 나오곤 했다. 금요일 밤이 우울하긴 했지만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출근하는 토요일은 복장처럼 마음만은 가벼웠다. 신입 사원 때 패기와 활력에 찬 모습은 조금씩 자취를 감춰가고 있었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안녕하십니까~ DB 중공업 전략기획실 이상한 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네 주주님 이번에 추가적인 주가 상승은 어제 공시한 S중공업으로부터 수주한 20,000 TEU급 컨테이너선 10척의 데크하우스(Deck House) 때문입니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예 안녕하십니까~ DB 중공업 전략기획실 전희택입니다. 아~ 네 지금 담당자께서 통화 중이시라... 네? 추가 수주 건이 있냐고요? 아… 네 그건 저희도 공시 전에 대외적으로 말씀드릴 수가 없는 사안입니다. 죄송합니다. 주주님 양해 부탁드립니다.”
회사는 코스닥 상장사였고, 전략 기획실에서 대외공시 및 IR(Investor Relations)를 업무를 담당하고 있어 외부전화가 빈번했다. 주가가 급락 혹은 급등하는 날이면, 항상 기획실 전화통에 불이 나곤 했다. 다행히 오늘은 급등이라 전화받는 것이 한결 편안하다. 급락이라도 하는 날엔 원성과 욕설이 섞인 개미 주주들의 분노를 받아내야 했다. 나의 뒷자리에 앉은 주담인 상한 씨는 주식 전자공시가 올라가고 나면 항상 그런 항의 전화와 문의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다.
그는 나보다 입사가 2년 빠른 1살 많은 선임이었다. 푸짐한 체구에 둥글고 커다란 금테 안경을 끼고, 두툼한 목살과 턱살은 어디가 어디인지 경계를 알 수가 없다. 고개라도 조금 숙일라치면 목인지 턱인지 모를 살들이 두 손으로 잡은 샌드위치 사이를 삐져나온 마요네즈처럼 터질 듯이 밀려 나왔다. 첫인상은 마치 KFC 매장 앞에 서 있는 트레이드 마크인 하얀 머리와 수염의 할아버지에 수염은 빼고 머리만 까만색으로 염색하면 영락없이 똑같은 모습이었다.
우리는 부서 특성상 대외 업무 때문에 회사 이름을 포함한 긴 전화 응대 멘트를 매번 말해야 하는 수고를 감수해야 했다.
"예 희택씨, 비서실입니다."
"네~ 주현씨 무슨 일로?"
"사장님 호출입니다, 빨리 사장실로 오셔야 될 것 같아요, 급하게 희택씨를 찾으세요"
"예 알겠습니다. 금방 가도록 하겠습니다."
사장이 일개 사원을 사장실로 직접 부르는 일은 드물다. 도다리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급히 사장실로 뛰어갔다. 도다리도 직접 사원을 사장실로 부르는 사장의 의도가 궁금한지 의아한 표정으로 뛰어가는 희택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본다.
"똑똑똑"
"들어와"
"사장님! 찾으셨습니까?"
"어! 그래, 거기 앉아, 다름이 아니라, 중국 계열사에서 근무하는 직원인 것 같은데 나한테 계속 이상한 메일을 보내서 말이야"
"예? 어떤 메일인가요?"
"중국 직원이라 영어를 잘 못하는 것 같은데, 중국어랑 영어를 같이 써서 보내왔네, 내용이 중국 연태 법인장이랑 조선족 여직원 한 명이 짜고 회사 돈을 횡령한다는 그런 내용이야"
"그럴 리가요? 거기서 보고받고 있는 재무 상태 표에서는 그런 징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나도 장난인가 싶기도 하고 그리고 네가 알다시피 연태 법인이 현재 경영실적도 우수하고 해외 법인 중에서는 제일 잘 나가고 있는 상황이잖아, 알지도 못하는 직원 한 명의 밀고로 오해가 생겨 회사 분위기를 흐릴 수도 없는 상황이야"
"예…"
"그래서 널 부른 거야, 네가 가서 그 담당자를 조용히 좀 만나보고 와"
"에… 예?"
"가서 무슨 일인지… 아무도 모르게 알아보고 오란 말이야"
"그럼 혼자 해외 출장을 갔다 오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가 도 팀장에게는 내 개인적인 심부름으로 일을 시킨다고 얘기해 둘 테니까, 아무한테도 이 사실을 알리지 말고 갔다 와, 그리고 그 밀고한 중국 직원이 무슨 근거로 이런 얘기를 하는지 증거가 있다면 알아올 수 있도록 알겠지?"
"예 알겠습니다 사장님!"
"그럼 일단 내가 받은 메일들을 자네에게 보내 줄 테니까, 그 자랑 연락을 해서 이번 주에 출장을 갔다 오도록 해, 내가 인사팀에 얘기해 놓을 테니 한 일주일 정도 거기 있으면서 관련 내용을 조사하고 와, 그리고 매일 상황 보고하고 알겠지?"
"옙! 알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절대로 이 사실이 외부로 새어나가건 안된다는 것을 잊지 마!"
사장실 문밖을 나와서 한동안 어리둥절한 상태로 눈동자를 한쪽으로 추켜올린 채 천장을 올려다보며 서있다.
"거기 멍하니 서서 뭐 하셔요? 사장님이 무슨 일로 희택씨를 따로 부르셨데요?
"아… 아니 뭐 별거 아녜요"
여비서는 나의 이런 모습을 보고 의아한 표정과 함께 물어왔다. 나는 서둘러 대충 얼버무리며 비서실을 나왔다.
'그나저나... 이 일을 어쩐다...'
미션 임파서블에 톰 크루즈도 처음 미션을 받았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이건 기회다! 회사 실세인 사장의 직속 첩보 요원이 되어 출세 가도의 길을 걷을 수 있는 기회이다. 어떻게든 이 일을 잘 완수해야만 한다. 나의 두 주먹과 어금니는 한치의 틈도 없이 움켜쥐고 악물어져 있었다. 기획실로 돌아온 나는 제 자리로 돌아가기 무섭게 도다리의 호명에 불려 갔다.
"희택씨, 사장님께 전화 왔던데, 뭐 급하게 시키신 일이 있다고 하던데…"
"에… 예, 사장님이 따로 개인적으로 지시한 일이라 말씀드리기가…"
"그래, 됐어, 얘긴 들었어. 사장님께서 따로 지시하신 일이니, 뭐 더 묻진 않을 테니, 일단 지금 급한 다른 업무들은 상한씨랑 지호씨에게 넘기고 사장님이 지시한 일부터 빨리 처리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주에 그 건으로 해외 출장을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너 혼자서?"
"예, 사장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사원 1년 차가 혼자서 해외 출장이라니… 우리 회사 창립 이래 네가 처음인 것 같은데… 알았으니 해외 출장 명령서 결재 올리도록 해"
그렇게 나의 비밀 임무가 시작되었다.
우선 사장님이 전달해준 밀고자의 메일을 확인하니 내용은 이러했다. 중국 연대 법인 설립 당시 현지의 한국 회사들의 사업 안정화를 위해 여러 한국 기업의 재정 지원을 받아 ‘한국 기업 투자 진흥회’라는 협회를 설립했다. 당시 거기에 근무하던 조선족 여자 방씨가 연대 법인의 차총경리(총경리= 법인장의 중국 명칭)를 도와 자사의 계열사 법인 설립을 앞장서서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그 방씨라는 여자가 인맥도 많고 말주변이 있어 사업 수완이 뛰어났다는 것이다. 그 능력을 꿰뚫어 본 차총경리는 그녀에게 연대 법인의 관리부 과장 자리를 제안한 것이다. 처음엔 진흥회 회원사들 눈치도 있고 해서 여러 번 거절했지만 계속되는 차총경리의 러브콜에 어쩔 수 없이 관리부 과장 자리에 앉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진흥회의 일을 겸직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거기까진 좋았는데… 그녀가 입사 후 총경리와 둘의 관계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회사 경비가 이런저런 알 수 없는 명목으로 그녀를 통해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은 재무 부서의 담당 주임으로 그 사실을 모두 지켜봐 왔다고 한다. 총경리에게 이 사실을 건의했지만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총경리와 그녀가 못 마땅히 여기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금지된 사랑 그리고 비즈니스, Forbidden love and business’
중국 담당자가 사장에게 보내온 메일 내용을 확인하고 즉석 해서 떠오른 막장 로맨스 드라마 제목이다. 이제 숨겨진 진실을 파 헤져야 하는 건 나의 몫이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 첩보 작전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나는 마치 미션 임파서블 속의 톰 크루즈가 된 기분이다. 입사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는 신입사원에게 이런 첩보 업무의 중책이 떨어지리라 누가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사장으로부터 직접. 나의 심장은 알 수 없는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두근거리고 있다.
“희택씨 도대체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길래 사장님이 희택씨를 따로 불렀데?”
“아…네 뭐 별거 아녜요”
“에이~, 별거 아니긴 별거 있는 거 같은데… 우리 같이 좀 압시다”
“죄송해요 상한씨, 제가 급히 좀 사장님이 지시하신 일을 해야 돼서요”
“어이구, 이제 사장님이랑 같이 일을 하시느라 우리 같은 사원 나부랭이는 상대를 안 하시겠다? 큭큭”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나…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뒷자리에 앉은 상한씨가 비꼬는 듯한 말로 나를 난처하게 한다. 그는 팀장 대행인 도다리의 오른팔로 사원들 중에서는 나름 실세였다. 그런 실세가 도다리도 모르는 일을 추진하며 나 때문에 내가 하던 급한 업무들을 떠맡았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의 꼬임에 넘어가 사장의 비밀 업무를 누설할 내가 아니었다. 그냥 나중에 알려준다는 말로 대충 얼버무리고는 다시 메일 내용을 훑어본다.
나는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우선 그 재무 담당자인 왕씨와의 접촉을 위해 메일을 보내다.
"我是总公司企划部的全喜宅,通过社长我看过你的邮件,我想知道更具体的情况,请您告诉我你的MSN地址和你的联系号码,我会给你联系,好吗?“
(저는 본사 기획실의 전희택입니다. 사장님을 통해 당신의 이메일을 확인했습니다. 더 자세한 상황에 대해 알고자 합니다. 우선 당신의 MSN 메신저 ID와 전화번호를 알려주세요.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에게서 답장이 왔고 메신저와 전화로 더 자세한 상황들을 접수했다. 그녀는 자신이 모든 근거 자료를 가지고 있으며 내가 중국에 오게 되면 자료와 관련 내용을 알려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 홀로 첫 해외 출장은 성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