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EP 2 (개정판)
전략 기획실은 해외영업부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일단 부서원들의 평균 연령이 상당히 젊다. 대부분이 20대와 30대 초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갓 40대 초반의 젊은 사장의 직속부서인데 젊은 사장의 트렌드에 맞추려면 젊은 인력이 필요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내가 사장이라도 60대 말 안 듣는 꼰대 임원들이나 눈치만 살피는 40~50대의 차, 부장들을 데리고 일을 하는 것보단 젊고 패기 있는 20~30대들과 어울리는 게 나을 것 같다는 단순한 생각을 해본다.
"희택 씨, 기획실에 온 걸 환영해요, 앞으로 열심히 해주길 바래요"
"옙! 열심히 하겠습니다"
"새로운 환경과 업무에 힘들겠지만 잘하리라 믿어요, 사장님도 희택씨에 대한 기대가 크신 듯해요. 전략 기획실 업무나 생활에 관련해서는 선임인 상한씨랑 지호 씨가 잘 도와줄 거예요"
"희택 씨~ 나 이상한이야, 주담이야. 잘 부탁해, 필요한 거나 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요. 특히 주식 관련한 거면"
"주담이요?"
"주식 공시 담당이란 뜻이야, 우리 회사 코스닥 상장사인 거 몰라? IR(Investor Relations) 관련된 일은 대부분 내가 하고 있어, 대외적인 공시담당자는 도 팀장님이지만, 실무는 내가 다해, 일개 사원 나부랭이가 말이야 큭큭”
"아~ 네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반가워요 난 김지호예요 PR(Public Relations) 홍보담당이에요 뭐 홍보일 보다 잡일이 더 많지만 하하하, 참 저보다 형이던데 편하게 지내요"
기획실에 서열 1위 팀장 대행인 도도한 대리의 환영사와 그의 자리 앞 양쪽 책상에 앉아있는 좌청룡 우백호 역할을 하는 이상한 사원과 김지호 사원의 소개로 나의 기획실 생활의 서막을 열었다.
내가 입사하기 몇 달 전에 기획실 총괄이었던 모부장이 퇴사를 했다고 한다. 뭐 자기 사업을 하겠다며 컨설팅회사를 차려서 나갔다고 한다. 그게 기회인지 위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리 말호 봉의 깡마르고 항상 근심이 드리운듯한 얼굴 표정이 트레이드 마크인 도도한 대리, 그는 이제 갓 삼십 대 초반인데도 사십대라고 봐도 누구 하나 알아채지 못할 것 같은 인상을 가지고 있다. 일부로 그러는 건진 모르지만 낮게 깔아내는 목소리와 나이답지 않은 보수적이고 격식을 차리는 행동이 여간 거북스럽지 않다. 그가 회사의 컨트롤 센터인 전략 기획실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일명 도다리(도대리)로 팀원들로부터 별칭이 붙여져 있다. 그는 모르지만 그가 없는 자리에서 팀원들은 그를 도다리라고 부른다. 봄이 되면 팀원들과 제철 도다리를 씹으며 뒤에서 그도 같이 씹는 재미는 전략 기획실 팀원들만의 특별하고도 재미있는 추억이다. 그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지만 말이다. 한 번은 도다리와 팀원들이 부서 회식으로 도다리를 먹는 날 모든 팀원이 자신을 보고 미소 짓는 것을 보고 흐뭇해하던 도다리의 모습 때문에 팀원들은 다음날까지 둘만 모이면 그 얘기로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어쨌든 그는 회사 내에서 최연소 팀장 대행이라는 중역의 시험대에 올라있었다. 그는 팀장 대행이지만 말투나 행동은 이미 팀장이 되어 있었다. 도다리 밑으로 나를 포함해 7명의 대리와 사원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말 그대로 대리 천국, 사원 나라다.
"환영합니다. 희택 씨~"
"희택 씨, 다들 기대가 커요 하하하"
"해외영업부 인재라면서요? , 이제 기획실도 글로벌하게 바뀌는 건가?"
"하하하"
"희택 씨, 중국말 잘한다면서요? 이 참에 나도 희택 씨한테 좀 배워야겠네"
"같이 잘해봅시다!!"
부서원들은 나의 전략 기획실 합류에 일제히 환영의 말들을 쏟아낸다. 모든 부서원들의 연령대가 비슷하다 보니 해외영업부와는 달리 자유로운 분위기이다. 나는 비록 원하던 해외영업은 아니지만 화기애애한 그 분위기 때문에 딱딱하고 보수적인 해외영업부보다는 더 나을 거라는 기대감이 생겨나고 있었다.
나의 업무는 국내외 계열사의 관리 업무였다. 특히 중국 쪽 사업이 커지는 상황이라 중국 계열사 관리가 사장님의 큰 관심사 중의 하나였다. 계열사의 비중도 중국 쪽이 압도적으로 컸다. 컨트롤 타워인 기획실에서 전 계열사의 경영현황을 취합하고 보고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급선무였다.
계속되던 조선 호황으로 계열사가 많아지고 덩치가 커진 회사는 이제 그룹관리 체제로 넘어가야 하는 단계에 와 있었고 그룹 관리 시스템 구축이라는 중책을 사원 나부랭이인 나에게 맡긴 것이었다. 적지 않은 부담감이 있었지만 그만큼 자부심도 생겨났다. 최고가 될 수 없다면 차라리 최초가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먼 훗날 글로벌 전략기획실장의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성경 속에서 말하던 그 창대한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업 활황에 힘입어 회사는 국내는 물론 중국(대련, 연태, 양주)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한 상황이었다. 우선 계열사들의 경영/재무/일반 상황들에 대한 주기적이고 체계적인 경영보고 시스템을 만들어야 했다. 간단히 축약하자면 각 계열사들의 분기별 경영자료 받아내고 이슈사항들을 정리해서 사장에게 보고하는 일이다. 일단 시스템 구축을 위해서는 각 계열사들의 담당자들과의 친분을 쌓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你在干嘛? 吃饭了没有? (뭐해? 밥은 먹었어?)"
"吃了呀~ 你呢? 对了! 我最近迷住了韩国的电视剧呢"(먹었지~ 넌? 참! 요즘 나 한국 드라마에 빠졌잖아)
"真的吗?你喜欢哪个明星呢?"(정말? 너 어떤 배우 좋아해?)
"Rain!! 我非爱不可他, 我最喜欢看浪漫满屋 "(비!!! 난 걔한테 홀딱 빠졌어, 난 풀 하우스 너무 좋아해)
"哎呀~这些女人都一样啊~!,不只是你一个"(아이고~ 이 여자들이란 다 똑같구먼, 너만 그런 게 아냐)
점심 식사 후, 밀려오는 졸음에 대처하는 나만의 방법은 중국어로 전화 잡답하기이다. 계열사 관리와 원활한 연락을 위해 모든 해외 계열사와 본사 간에 인터넷 직통 전화가 개설되었다. 원래 팀장급 이상 직원들의 전화기에만 허용되었지만 해외영업부서 담당자들과 전략 기획실에서 나만 유일하게 허용되었다.
중국 계열사 중국인 담당자랑 잡담을 하다 보면 졸음이 달아난다. 나의 하루의 활력소라고 할까? 다른 직원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나에게는 가능하다. 자주 만나서 얼굴을 볼 수 없는 해외 계열사 직원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루에 최소 한 번씩 이상은 통화를 한다. 특별히 관련 업무가 없더라도 일상의 잡담을 나누며 식후 몰려오는 졸음도 쫓으며 그들을 내편으로 만드는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발휘해 본다. 쌓여가는 통화의 시간만큼 그들의 나를 향한 신뢰와 충성도 또한 쌓여가고 있었다.
그렇게 제2 외국어인 중국어는 회사에서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얼마 전 해외영업부에 있을 때만 해도 이건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당시 내 사수였던 회사 내에 ‘중국통 노가리'로 통하는 노대리가 내 뒤에 버티고 있었다. 180센티가 넘는 훤칠한 키에 왼쪽 이마에 커다란 점이 유난히도 눈에 띄어 주변에서 직원들 사이에선 점 대리라고도 불리곤 했다. 중화권 영업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베테랑 실무담당자이다. 원래 나는 그의 중국 영업의 부사수로 입사했던 것이었다. 지금은 타 부서 아저씨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옵저버 같은 그의 보이지 않는 감시 때문에 지금의 이런 중국어 잡담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당시, 그는 나의 뒤에서 앉아서 항상 나의 말과 행동을 모니터링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업무로 해외 고객사 혹은 해외 계열사에 통화할 때마다 항상 긴장해야 했다. 내가 고객사와 전화 통화가 끝나고 수화기를 놓으면 3초 안에 어김없는 그의 잔소리가 날아든다.
"희택 씨야! 고객사 담당자가 네 친구야?"
"예?! 무슨 말씀이신지..."
"희택씨가 쓰는 말이 비즈니스 용어라고 생각해? 어디서 그런 싸구려 뒷골목 중국어를 배워가지고 와서 써먹고 있는 거야? 어디 도떼기시장에 물건 팔러 왔어?"
"아... 네 죄송합니다. 아직 잘 몰라서요, 앞으로 시정(是正)도록 하겠습니다."
"계속 지켜보겠어~ 똑바로 합시다! 좀!"
그는 완벽주의자가 분명하다. 해외 고객사와 통화가 끝나면 항상 뒤통수가 따갑다. 그런 그의 성향 때문에 되도록이면 고객사와 전화보다는 이 메일로 업무를 진행하려 했다. 나는 점점 벙어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부득이 전화를 해야 할 때는 용무만 간단히 하고 신속히 전화를 끊었다. 말이 길어지면 실수가 생기기 마련이다. 해외영업부에서 전화기를 손에 드는 것은 공포의 시간이었다.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전략 기획실엔 나의 중국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나만의 세상이다.
[오~~ 희택씨 장난 아니다!]
[뭐야 뭐야? 난 무슨 중국 무협영화 본 줄... 무슨 얘기를 그리 오랫동안 심각하게 한 거야?]
[이야~ 희택씨 완전 짱개 같아 보여. 하하하]
[희택 씨, 있어 보인다. 정말~ 나도 중국어 좀 가르쳐줘요~]
[우~아, 희택 씨 아주 멋져!]
처음 전략 기획실에서 내가 중국과 전화 통화를 한 날이었다. 부서원들은 내가 수화기를 채 내려놓기 무섭게 사내 메신저로 메시지를 보내온다. 다들 업무시간 사무실내에서 부서원들이 잡답하는 것을 싫어하는 도팀장의 눈치 때문에 다들 주로 사내 메신저를 이용해 이야기를 했다. 나는 대충 계열사 담당자와 중요한 업무 관련 협의가 있었다고 둘러대면 그만이다. 도다리(기획실 팀장 대행)가 다가온다.
"희택씨, 무슨 얘기가 그리 심각해?!"
"예~ 계열사에서 받은 자료에 이상한 점이 있어서 담당자랑 확인하느라 통화가 좀 길어졌습니다."
"그래? 무슨 문제야?”
“연태 자회사에서 받은 재무제표 수치에 오류가 있어서요 알고 보니 담당자가 실수로 잘못 입력 것이더라고요”
“그래, 그런 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봐야지, 잘했어 계속 수고해 줘! 희택씨가 고생이 많네"
"아닙니다.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인데요"
그는 나의 어깨를 토닥여 주며 지나간다. 컨트롤 센터의 수장인 도다리는 나로 인해 시저 탱크의 장거리 포격 기능이 업그레이드되어 해외 계열사까지 사정권에 넣을 수 있어 흡족한 모습이다. 그럴 때마다 이상한 희열이 느껴졌다. 신입사원인데도 불구하고 회사 내에서 아무도 터치할 수 없는 나만의 공간을 가졌다고나 할까? 비록 직급은 사원 나부랭이지만 직책은 해외 총괄 본부장이 된 기분이다.
그렇게 중국어는 나에겐 없어서는 안 되는 비밀병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