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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Sep 24. 2020

이도 저도 아닌 세상!?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2] 채사장

진리(眞理)는 무엇일까? 


  절대적이면서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것을 떠올릴 수 있는가? 그것이 바로 진리다. 찾기도 힘들뿐더러 그걸 또 찾아서 뭘 할 건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인류가 시작되고 생각하는 영장류인 사피엔스는 할 일 없는 기나긴 밤 동굴 벽에 그림을 그리며 나라는 존재와 세상에 대한 쓸데없는 궁금증을 품기 시작했다. 그 쓸데없는 생각에서 세상의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있냐? 없냐? 몰라! 바빠!


  절대적인 진리가 있느냐, 없느냐의 공방 속에 난 모르쇠로 일관하는 불가지론도 등장하고 나랑 상관없다 먹고살기도 바쁘다는 실용주의(한국이 바로 극단적인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급격한 산업발전을 이룩했다 (문송한 나라가 된 이유)도 나타난다. 그 속에서 철학, 과학, 예술, 종교가 발전해 간다. 아니 발전이라기 보단 복잡 다양 해졌다고 하는 것이 더 맞는 말일 수도 있겠다.


너와 나는 왜 하나 될 수 없는 것일까?


    선과 악, 남자와 여자, 보수와 진보, 생물과 무생물 혹은 먹는 것과 못 먹는 것 등 우리는 세상 모든 것을 두 가지로 분류하는 습성이 있다. 선을 긋고 구분 지음으로서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려 한다. 우리는 이것을 이분법적 사고(이원론)이라고 한다. 이분법적 사고는 고대부터 중세, 근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


  이분법적 사고는 세상의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것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철학과 과학 예술 그리고 종교를 아우르는 인류가 이뤄놓은 수많은 업적들은 이 사고방식을 통해 발전했다. 그 속에서 진리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는 듯 보이지만... 닿을 수 없음에 좌절하고 고뇌한다. (현재까지로선...)


  채사장의 지대넓얕 1권(역사, 경제, 정치, 사회, 윤리 편)을 통해 내가 먹고사는 현실 세계가 왜 이럴까에 대한 의문을 풀어줬다면 2권은 현실 이전에 진리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루고 있다.  내가 당장 먹고사는 것과는 동떨어진 주제라고 생각되지만 사실 진리는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 체 평생을 살다 죽는 것과 매한가지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찾으려 파고들면 들수록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게 사실이지만 그 과정 속에서 얻어지는 깨달음이 더 값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목표는 달성하는 것보단 그 과정 자체가 성장의 과정이기에 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실패는 더욱 견고한 성장을 가져다준다. 실패 없는 성장은 모래성과 같다.


  책을 읽으며 1권의 현실세계보다는 한 차원 높은 난해함에 여러 번 다시 읽고 나서야 이해가 될 정도이다. 나의 이해력이 부족함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저자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 통해 철학과 과학, 예술, 종교, 신비에 이르기까지 모두 설명해내고 있다.  양분된 세계는 서로를 반박하고 억압하며 서로의 영역을 발전시켜나가는 형국이라고 해야 할까? 그 속에서 이도 저도 아닌 영역도 탄생한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이도 저도 아닌 영역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그것이 바로 포스트모던(Post Modern) 시대를 이끌어 가고 있다.  뭐 요즘은 포스트 코로나(Post-COVID)로 바뀌었지만... 일단 살고 봐야 철학이고 나발이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시작은 편 가르기부터


  고대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이데아 세계가 있다고 주장한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하고 운동하는 현실세계에 절대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양쪽의 생각은 중세로 넘어와 절대주의는 이데아와 유일신을 동일시하며 그리스도교의 교부철학으로 이어진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혹은 성령)은 따로 존재한다고 주장한 유명론의 스콜라 철학과 대립한다. 이 둘은 근대로 넘어와 이성 중심의 합리론(데카르트)과 경험 중심의 경험론(베이컨)으로 이어진다.


심판이 등장하다. 라운드 간 휴식은 필요하다.


임마누엘 칸트가 등장한다. 그는 평행선 그리며 팽팽하게 대립해 온 두 사상을 중재한다. 우리 모두는 각각의 카메라(Sensor)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지만 결국 같은 소프트웨어(OS)를 통해 인식함으로 보편적 오류를 범한다. 현상을 보는 것은 경험론이나 현실 너머를 생각하는 합리론이나 공통적인 가지고 있는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을 사유하는 인간의 뇌가 똑같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박쥐가 보는 사과랑 인간이 보는 사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우리는 박쥐의 관점에서 세상을 인식할 수 없다. 우리는 비슷한 교육과 생활환경 속에서 자라온 탓에 비슷한 세계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철학의 관심을 외부에 둔 경험론과 합리론의 논쟁을 인식 주체의 내면으로 돌리는 관념론은 그간의 논쟁을 종식시키며 현대철학으로 넘어가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Now I'm here


 고대 소피스트들의 회의주의 사상이 재탄생한다. 그 선봉장으로 망치를 든 니체가 등장한다. 그는 근대 철학의 데몰리션 맨으로 근대 서구 철학의 주축을 이루었던 이성중심의 절대주의와 그리스도교 사상을 전복시키려 한다. 그는 그리스도교가 핍박받으며 살아온 유대인의 원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주장한다. 그리스도교의 윤리관은 노예근성인 겸손, 근면, 순종, 금욕을 선으로 추앙하고 주인 근성인 진취, 결단, 창조 등을 악으로 치부하며 유럽인들에게 선과 악의 양분된 도덕관을 심어놓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삶은 유한한 것 같지만 사실 순간의 반복이며 우리는 먼 미래를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여기 이 순간(Now I'm here)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요즘의 YOLO(You Only Live Once)랑 비슷한 느낌이란 건 나만 느끼는 걸까?


  "만약 네가 영혼의 평화와 행복을 원한다면, 믿어라. 다만 네가 진리의 사도가 되려 한다면, 질문해라"


  니체가 그의 여동생에게 쓴 편지 중 일부이다. 그는 순종적인 삶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스스로 창조하는 주인이 될 것 강조했다. 그는 근대 철학을 의심하며 포스트모던으로 나아가는 시발점이 되었고 현대 철학의 주축이 되었다.


 이제는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대세가 된다.


  저자는 철학을 시작으로 과학, 예술, 종교를 얘기한다. 그 흐름 속에 발견되는 공통점은 절대적인 것은 없고 계속 변화되어 왔다는 것이다. (나머지 파트는 직접 읽어볼 것을 권한다. 내용이 너무 방대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고민의 시작은 결국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인간은 새로움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무언가에 익숙해지면 싫증을 느끼고 다른 것을 원한다. 세상에 대한 생각(철학), 분석(과학), 표현(예술), 믿음(종교)은 계속 바뀌고 세분화되어 왔다. 결국 인간은 대상과 세상을 통해 진리를 깨달아 가려고 하지만 풀리지 않는 의문은 계속된다. 그 의문을 풀어가는 과정 자체가 진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모두가 인정하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며 불변하는 무언가가 발견되지 않는 한 의문은 계속될 것이다.  

 

  니체가 한 말이 가슴 깊이 와 닿는 건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현재 모든 분야에서 모든 것을 의심하며 접근하는 회의적 방법론이 대두된다. 기존의 가치관과 생각으로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만들어내기 힘들다는 판단 때문이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이 이제 모든 것을 의심하기에 이른 건 아닐까? 이젠 너와 나를 떠나 제3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르네상스 이후 펼쳐진 인간 중심의 세상은 발전과 파멸을 동시에 가져왔다. 이제 파멸 없는 발전이 필요하다. 그건 무엇일까?


 신(절대적)에서 인간(상대적)으로 그리고 또다시 그 중심이 움직이려 한다. 그곳은 어디일까?

 

 이도 저도 아닌 무언가가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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