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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Oct 08. 2020

세상에 나를 맞추다

팔공 남자 시즌 2-66

"와~ 지노 맞나? 好久不见!" (와~ 오랜만이다!)

"Yep! Long time no see!" (오랜만이네)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대학 때 친구를 만났다. LA 다저스 로고가 박힌 반듯한 MLB 모자 창 밑으로 윤기 있는 검은 머리가 이마를 반쯤 가리고 있다. 그 밑으로 드러난 하얀 얼굴과 검은 눈썹 그리고 부리부리 한 눈매의 뚜렷한 이목구비가 인상적이다. 한쪽 귀에는 번화가의 네온사인 불빛에 반짝이는 귀걸이가 달려있다.


"야~ 호주 물 좀 오래 먹더니 이제 영어 쓰나?"

"야야~ 빈티 나게 중국어 좀 그만 쓰자! 쫌! 큭큭!"


  왕지노, 그는 대학 새내기 시절 가장 처음 알게 된 대학 친구이다. 녀석과 친구가 된 건 순전히 나의 호기심 섞인 관심에 의한 것이었다.




"저기 국제학부 99학번 새내기 맞으세요?"

"어... 어 그런데요?"

"아~ 맞구나! 반갑다~ 나도 99학번인데 전희택이라고 해!"

"근데?"

"어?! 아니 항상 강의실 구석에 혼자 앉아 있길래 난 타과 학생인 줄 알았거든...."

"그래서?"

"아니 오늘 저녁에 우리 국제학부 개총 술자리 있는데 와라! 술도 먹고 친목도 좀 쌓게"

"난 별 관심 없는데..."

"술 공짜란다!"

"진짜?"


   그렇게 그와 처음으로 대면했다. 녀석은 아웃사이더 기질이 다분했다. 캠퍼스의 환상과 낭만에 빠져 사는 나와는 달리 녀석은 대학생활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듯 보였다. 학교에는 출석 때문에 오는 것일 뿐 수업이 끝나면 급히 어디론가 사라지기 일쑤였다. 녀석의 수업시간표도 월화수에 다 몰아서 집어넣고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는 매주 황금연휴를 즐겼다. 3일 학교 나오는 것도 귀찮은지 가끔씩 나에게 연락해서 대출(대리출석)을 부탁하곤 했다. 녀석은 부탁을 들어줄 때면 값비싼 양담배를 하나씩 주곤 했고 난 그 미끼의 유혹에 녀석의 대출 전용 창구가 되어버렸다. 물질의 유혹에 한 번 걸려들면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녀석이 그런 인간의 본성을 잘 이용하는 듯 보였다.


"야~ 좀 학교 좀 나온나!"

"뭐할라꼬?"

"과생활도 좀 하고, 이쁜 애들도 많은데 좀 꼬시고 엠티도 가고 하면 재밌잖아?"

"지랄! 이쁜 애들이 어딨노? 다 오징어들 밖에 없구먼"

"헐!"


  녀석은 눈이 상당히 높다. 녀석의 방과 후 생활을 전혀 알지 못하는 나로선 그가 어떤 이성들을 만나고 다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말만 들어 봤을 땐 나에게 궁금증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녀석은 집이 부유한 지 학생답지 않은 비싼 명품이나 고급 스포츠웨어류의 옷들을 입고 학교에 나타났고 하교할 때는 항상 택시를 불러서 타고 갔다. 매일 만원 스쿨버스에서 빈대떡처럼 이리저리 눌려지며 등하교를 하는 나와는 다른 세계의 인간임이 분명했다. 녀석 덕분에 가끔 택시를 얻어 타고 가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아~ 피곤하네 나 집에 갈란다."

"야~ 아직 수업 많이 남았다"

"니가 대출 좀 해도!"

"싫다! 이제 접때 함 들키가 완전 개쪽 팔았다 아이가!"

"두 갑 줄게!"

"어?!... 됐다고마~! 마치고 내랑 어디 좀 가자"

"어딜?"


  난 대학생활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그에게 동아리 활동을 권유했다. 나도 과생활만 하는 것이 좀 싫증 나던 차에 새로운 세계를 한 번 경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혼자 보다는 둘이 가면 덜 어색하고 의지도 될 것 같아 그를 끌어들였다.


"뭐? 댄스 동아리?!"

"미칫나!?"


   당시(99년) 1세대의 HOT, 젝스키스 그리고 SES, 핑클의 영광을 신화와 베이비복스 같은 실력 있는 뉴페이스들이 이어가며 댄스가요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들을 우러러보는 여자들의 시선이 나로 향하면 어떨까 하는 환상을 꿈꾸곤 했다. 지노는 처음에 강한 부정의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계속되는 나의 설득에 그도 나이트클럽에 갈 때마다 몸치라 가오가 살지 않았던 기억들 때문에 춤을 좀 배워놓으면 좋겠다고 하며 마음을 고쳐먹었다.


"마흔하나, 마흔둘, 발 똑바로 안 차나! 마흔셋!"

"헉! 헉! 헉! 털썩!"

"야! 일어나! 새끼야!"

"에잇 X발! X 같아서 못해먹겠네! 이기가 무슨 삼청교육대도 아니고 허 구언 날 체력단련이고 니들이나 존나게 하세요!"


  가입한 댄스 동아리의 분위기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남자 신입들에게는 매일 브레이크 댄스의 기본을 익히기 위한 기초 체력단련이 계속되었다. 선후배 간의 딱딱한 상하관계와 연습 분위기는 마치 군대 같았다. 선배들의 관심과 애정이라는 미명 하에 행해지는 욕설과 강압적인 지시에 대한 불만은 연습 뒤 이어지는 술자리의 감성적인 분위기 속에 전우애로 탈바꿈되었다. 나 또한 그런 분위기에 익숙해져 갔지만 지노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결국 지노는 한국의 대학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중국으로 떠났다. 그와의 짧은 대학 생활이었지만 녀석은 나에게 여태껏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신비한 캐릭터로 각인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지나 내가 중국 유학을 가서 그를 다시 만났을 땐 녀석은 국적을 알기 힘들 정도의 중국 네이티브가 되어 있었다.


  내가 사회에 나와 직장 생활하며 또 한참의 시간이 흘렀고 다시 연락이 닿았을 땐 그는 호주에 있었고 연말의 크리스마스 시즌 연휴를 맞아 한국으로 휴가를 보내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와 이렇게 다시 재회하게 된 것이다.

 



"야! 야! 그냥 때려치고 호주 온나! 그래서 한국이 X같다는 거 아니가"


  그는 호주에서 중국계 화교 회사에서 건축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남부럽지 않은 급여와 대우에 나름 회사에서 인정받는 기술자가 되어있었다. 그는 한국에서 땀 흘리고 일하면 천대받고 매일 노예처럼 야근하고 주말도 없이 일을 하는 나 같은 사람들이 불쌍하다며 혀를 찬다. 열심히 일하며 살아도 부자가 될 수 없는 현실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건 잘못된 거 아니냐며 나에게 반문한다.


"야! 호주는 땀 흘리며 힘들고 더러운 일 하는 사람들이 더 대우받는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다르지"


  그가 사는 곳은 땀과 노동의 가치가 이곳과는 달라 보인다. 물론 그곳은 한국과는 다른 지정학적인 요인이 많지만 결국, 환경의 차이는 생각의 차이를 만들고 생각의 차이가 그 사회의 분위기를 바꾸는 것이다.


  그는 자신과 맞는 세상을 찾아나섰고 나는 세상에 나를 맞추어 왔다.


마치 톱니바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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