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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Oct 10. 2020

감독처럼 작가처럼

팔공 남자 시즌 2-67

"띠리리링!"

"여보세요?"

"뭐하노?"

"잘라꼬"

"야! 연말연시에 집구석에 처박혀 잠만 자냐? 나온나!"

"귀찮아! 피곤해!"

"快出来!我需要你的帮忙”(빨리 나와!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

"在哪儿? 这么晚帮什么忙?”(어딘데? 이렇게 늦은 시간 무슨 도움?)

“나이트! 일단 나와보면 안다!"


  시계가 11시가 넘어가고 있다. 연말 연휴 모처럼 부산에 내려와 집에서 뒹굴거리며 리모컨 위의 손가락과 눈알만 움직이고 있는 중이었다. 전날 친구들과의 연말 송년회로 과음을 했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숙취에서 간신히 회복이 되어가고 있었고 이제 정신을 좀 차리려 할 때쯤 지노의 연락이 왔다.

 

  그는 연산동의 어느 나이트클럽에 있다고 한다. 도대체 무슨 도움이 필요하다는 건지 알려주지 않으면서 빨리 나오라는 재촉만 한다. 내가 나오지 않으면 인연을 끊겠다느니 하는 우정을 빙자한 협박을 일삼는다.


   나는 하루 종일 뒹굴던 방바닥과 이별하려 접촉면을 줄이며 일어선다. 순간 현기증이 밀려온다. 너무 오래 누워있었던 모양이다. 인간은 직립보행을 일상화해야 한다. 누워만 있으면 없던 병도 생긴다는 말이 틀리지 않는 것 같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간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시간이라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도둑처럼 집을 빠져나온다. 집을 떠나 살기 시작하면서 이젠 고향집이 예전처럼 내 집 같지 않고 어색해졌다. 다행히 12시가 넘지 않은 시간이라 운행 중인 버스에 올랐다. 


  늦은 시간 버스 안은 한산하다. 술에 취해 귀가하는 목이 꺾여 졸고 있는 중년의 승객이 보이고 뒷좌석에는 젊은 연인 한 쌍이 팔짱을 낀 채 기대앉아 가끔씩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오늘 밤 아기 예수라도 한 명 만들 분위기다. 그 앞에는 한 여자가 핸드폰을 귀에 댄 채 짜증과 분노 섞인 목소리로 상대방에 대한 실망감을 토로하며 이별을 얘기하고 있다. 버스기사 뒤에 앉은 한 아저씨는 술이 많이 취했는지 기사에게 연말에 고생하신다는 말을 계속 반복한다. 연말연시 버스 안 사람들의 표정에는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느껴지는 듯하다. 




"야! 왜 이렇게 늦었어?"

"버스 타고 온다고"

"아놔! 이 시간에 버스를... 택시 타고 오면 되지!"

"버스 있는데 택시는 왜 타냐? 돈 아깝게"

"아따~ 스크루그지 나셨네!"

"야! 참! 인사해라! 여긴 호영이 형, 호주에서 나랑 같이 일하고 있어"

"아.. 안녕하세요! 전희택입니다."

"어.. 예!" 


   들어선 나이트의 룸 안에는 세 명의 여자와 두 명의 남자가 앉아 있다. 지노가 소개해준 형이라는 자는 나를 아래 위로 힐끔 쳐다보고는 고개를 한 번 까닥하고는 통성명도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아 앞에 앉아 있는 여성에게 집중한다. 그의 시선을 따라간 곳에 앉아 있는 여자는 어둑한 룸 안에서도 빛이 나는 미모를 지니고 있는 여성이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올해 김연아가 남아공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평창 동계 올림픽 유치를 위해 프리젠이션을 할 때 입었던 옷과 흡사하다. 단정하고 격식 있는 의상이 나이트클럽을 마치 상류층 무도회로 격상시키는 느낌이다. 그녀는 소파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무료한 표정으로 호영이 형이라는 자를 바라보고 있다. 그 형은 쉴 새 없이 무언가를 말하며 어떻게든 그녀의 환심을 사려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하다.


"희택아! 잠깐만!"


  지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의 팔을 잡아당기며 룸 밖으로 끌어낸다. 그는 상황 설명을 이어간다. 그냥 생각 없이 놀러 온 나이트에서 운명의 여자를 만났다는 것이다. 호영이 형뿐만이 아니라 자신도 앞에 앉은 여성이 너무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재밌는 사실은 세 명의 여자가 친자매라는 것이다. 연말 가족과의 모임 후 세 자매가 재미삼아 나이트를 찾았다가 그들과 만난 것이다. 지노의 파트너가 막내이고 호영이 형이라는 자가 공략 중인 여자는 둘째 그리고 남은 한 명이 첫째라고 한다. 소외감을 느낀 첫째 우두머리 여성이 지루함에 동생들을 철수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지노가 나에게 급히 지원 요청을 한 것이다. 


"야! 왜 하필 나냐?
"내가 한국에 친구가 너 밖에 더 있냐?"

"꼭 이럴 때만 친구 찾더라 너는?"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좀 도와주라! 호영이 형도 지금 저 여자한테 꽂혀서 지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야~ 니들 다음 주면 호주 돌아가야 되는 거 아냐? 지금 여자를 꼬셔서 뭐 우짤라꼬?"

"그렇다고 눈 앞에 운명을 놓칠 수는 없잖아! 나중이 어찌 되던 일단 지금 뛰고 있는 이 심장을 속일 순 없는 거 아니겠나? 그리고 아직 우리가 호주에서 왔는지 몰라"


  그는 감정에 솔직하다. 너무 솔직한 것이 나로선 이해하기 힘들 정도이다. 물론 그에겐 감정을 속이는 삶에 익숙해진 내가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난 그랬다. 언제인가부터 이성을 만날 때도 심장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보단 현실의 조건과 미래의 가능성을 먼저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슴이 아닌 머리로 시작하는 사랑 방식은 결국 시작도 어렵게 만들었다.  


  내가 이미 짜여진 완벽한 시나리오에 맞는 배우와 상황을 찾는 치밀한 감독과 같다면 그는 배우와 상황에 맞는 시나리오를 만들어 나가는 초연한 작가 같다고나 할까? 감독과 작가가 만드는 러브스토리는 비슷하게 표현되는 것 같지만 만들어가는 과정은 완전히 다르다. 많은 것을 총괄하며 많은 이의 주목을 받는 감독이 화려하고 멋있어 보일지 모르지만 작가처럼 자유롭진 못하다. 


  그렇게 그와 나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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