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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Nov 10. 2020

삶과 신앙은 분리된다

팔공 남자 시즌 2-72

"그 말이 정말이에요? 어떻게 그럴 수가... 흑흑"


    늦은 오후 교회 예배당에서 그녀와 만났다. 안 에스더는 내가 베이징에서 띠아오챤을 만났던 얘기를 듣고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린다. 그녀의 눈가에는 또다시 눈물이 맺힌다. 그녀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어 보인다. 과거 친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를 시작으로 목자로 만난 약혼자의 죽음에 이어 친동생처럼 아끼던 목원의 사고까지, 재앙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녀를 놓아주질 않는다.


"전 하나님의 축복이 아닌 저주를 받은 사람인가 봐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런 말 말아요"

"희택 형제도 화를 입기 전에 떠나요, 저도 더 이상 사랑하는 이들을 잃고 싶지 않아요"

"목녀의 자리를 내려놓으시겠다는 거예요?"

"저도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드네요"


  자신 주변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그녀가 그토록 간절히 기도했던 바램과 다르게 벌어지는 것에 지쳐가고 있었다. 하나님이 주신 시련에 대해 스스로도 수긍하지 못하는 듯 보인다. 그녀는 목녀의 자리를 내려놓겠다고 한다. 


"목사님께도 이미 얘기드렸어요, 희택 형제도 다른 목장으로 배정될 거예요"

"에스더! 이렇게 나약한 사람이었어요? 예수가 걸어갔던 길을 따라가고 싶다 하지 않았어요? 과거 요셉도 악마의 시험대에 올라 형제들에게 버림받고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면서요? 그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이용하시려고 주신 시련임을 알기에 믿음을 가지고 이겨낼 수 있었다고 에스더 목녀가 말하지 않았나요?"

"..."

"견디지 못할 시련이란 없어요 제가 옆에서 같이 할게요"

"흑흑흑"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두 볼 위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그녀는 시선을 옮겨 나의 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형상을 바라본다. 나는 그녀에서 손을 내민다. 그녀는 내가 내민 손을 바라보고 다시 나를 올려다본다. 나는 그녀에게 미소로 화답한다. 그제야 그녀는 살며시 자신의 손을 나에게 맡긴다. 나는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그녀를 일으킨다. 


"앗! 다리가... 미안해요!"

 

  오랜 시간 바닥에 앉아있었기 때문일까 그녀가 일어나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나에게 쓰러지듯 넘어진다. 순간이었지만 나의 품 안에 들어온 그녀는 보는 것과는 달리 상당히 야윈 느낌이다. 연이어 생긴 일들에 마음 고생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에스더! 금식 수행이라도 하는 겁니까? 이러다 미이라 되시긋어요"

"예?! 미이라요! 하하하 숙녀한테 너무한 거 아녜요?"

"이제 웃으시네 하하하 그러니 얼마나 보기 좋아요"

"참! 희택 형제는 못 말리겠네요 하하"

"근데 도대체 몸무게가 몇 키로예요?"

"여자한테 대놓고 몸무게를 물어보는 게 어딨어욧!"

"에스더 목녀님이 저한테 여자인가요?"

"예?!... 아니... 그게... 말장난하지 마요!"

"일단 먹읍시다.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야죠"


  불판 위에 고기가 노릇노릇 익어간다. 불판 옆에는 갖가지 소고기들이 여러 접시에 수북이 담겨 불판 위로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다. 나는 잘 익은 갈빗살 한 점을 집게로 집어 그녀의 공깃밥 위에 얹혀 놓는다. 


"자! 먹어봐요!"

"고.. 고마워요 희택 형제! 근데 고기를 너무 많이 가져온 거 아녜요?"

"오늘 이거 다 먹어야 집에 갑니다~! 가져온 거 다 못 먹으면 벌금인 거 알죠?"

"아... 너무해요"

"자! 배 터지게 먹어봅시다. 소주 한잔 할까요?"

"희택 형제! 이럴꺼예욧!"


  그녀의 표정이 돌변한다. 소주 없이 소고기를 먹는다는 건 팬티를 입지 않고 바지를 입는 것만큼 어색하다. 주변에 소주잔을 기울이는 테이블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본다. 기독교인과의 모임에서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알코올과의 이별이다. 좋음 음식엔 술이 따라가는 세속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물론 그렇지 않은 신앙인들도 많지만 공식적인 모임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근데 에스더 목녀!"

"성경에 술 먹지 말라는 말이 있어요?"

"그런 건 아닌데... 술 취하지 말라고는 얘기하고 있어요"

"그런데 왜 못 먹게 하는 거예요?"

"술이란게 알다시피 마시면 마실수록 자신을 제어 하기가 힘들기 때문이죠"

"안 취하면 되죠!"

"그런 말 하는 사람들 다 취하던데... 하하하"


  술에 좀 취한들 어떠한가? 취하기 위해 마시는 것이 술이 아니던가? 이성을 마비시키고 내면에 잠자던 감성을 불러내는데 술만큼 좋은 것도 없다. 중독되고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스스로 통제하는 능력만 있다면 뭐가 문제가 되겠는가. 


  인간은 신에게 다가가기 위해 금욕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인가? 성경 속에는 이것을 하지 마라, 저것을 하지 마라며 인간이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가르친다. 하지만 인간은 줄곧 각자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세상이 움직이고 경제가 발전하는 것은 인간이 욕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그런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고 충족시켜주는 방식으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 욕망이 없었다면 인간은 아직도 숲 속에 벌거벗고 뛰어다니며 그때그때 과일이나 따먹고 사냥하며 자연인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자본주의와 종교는 사이좋게 공존한다. 한쪽에서는 욕망을 부추기고 다른 한쪽은 욕망을 억제하라고 한다.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하는 것인가? 그래서일까? 수많은 신앙인들은 이중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듯하다. 평소에는 재물과 권력과 명예의 노예처럼 아등바등 살아가다가 주일만 되면 예배당에 앉아 평소의 삶을 회개하며 눈물을 훔친다. 죄를 지은 것 같아 회개하고 회개했으니 또다시 죄를 짓는다. 마치 습관처럼 일상이 되어간다.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며 스스로를 위안한다. 


 그렇게 삶과 신앙은 분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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