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녜요 대리님! 오늘은 제가 다 대접하겠습니다. 대리님 아녔으면 도서관도 그렇게 꾸미지 못했을 거예요 뭐 드시겠어요? 제가 사 가지고 올게요"
"뭘 그 정도 가지고... 그럼 뭐 사양치 않겠습니다. 카페모카 한잔?!"
"앗 나도 따뜻한 카페모카 생각났었는데 하하하 잠깐만요!"
그녀는 도서관 페인트 건으로 감사의 식사 대접을 하겠다며 일요일 오후 시간을 비워달라고 했다. 그녀는 수성못에 위치한 이름 있는 고깃집을 예약까지 하며 나를 대접했다. 매번 누군가를 접대만 해봤지 이렇게 대접받는 것이 익숙지 않다. 기분이 좋다. 이래서 접대를 해야 하는 거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노골적인 접대는 받는 사람 입장에서 겉으론 부담스럽긴 하지만 받고 나면 기분이 달라진다. 사람과 사람 간에 얼굴을 맞대고 맛있는 음식을 같이하며 대화하는 것은 없던 호감도 생겨나게 할 수 있다. 누군가가 자신을 생각하고 챙겨준다는 것은 관심받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지라도 그것조차 하지 않는 자들보다는 애정이 더 갈 수밖에 없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고대리! 준비 다 됐어 올라가자?"
"예 오늘 이사님도 같이 가시는 거 알지?"
"예 알고 있습니다."
"장 부장 가자고!"
"옙 이사님 나오셨습니까 가시죠"
"이사님! 부장님! 저기 이거"
"역시 고대리가 참 이런 건 잘 챙겨 하하하"
회사에서도 최소 분기별로 한 번씩은 고객사 담당자를 찾아 접대를 하는 것이 비공식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국내영업팀 고정안 대리는 그들을 뒤쫓으며 검은 봉지를 두 분에게 들이민다. 견이사와 장 부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봉지 안에 숙취해소 음료를 꺼내 마시면서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오늘 국내영업팀 코 빠지게 마시겠구만"
"오늘 이사님도 가는 거 보니 제대로 접대할 일이 있나 본데요"
"어~이! 전대리 우리는 그나마 행복한 거야, 분기 때마다 저래 불리가가 알랑방귀 뀌면서 접대 안 하는 것만 해도 어디야, 게다가 우리 담당자는 또 술을 안 좋아해요. 옛날 독사 과장 담당이었을 때 생각하면 우욱 토 나올 거 같다. 전대리는 복도 많지"
'그래 안 그래음 나갔겠지'
바깥일이 힘들면 안에서는 휴식과 충전이 필요하다. 바깥일이 쉽다면 안에서 좀 괴로워도 견딜 수 있다. 하지만 안팎으로 힘들다면 오래 버틸 수 없다.
구 과장의 말대로 해외영업팀은 시공간의 격차로 정기적인 접대가 쉽지 않아 출장 시에 여건이 되면 현지의 괜찮은 식당에서 접대하곤 한다. 반면 국내 영업팀은 분기 결산이 끝나고 나면 영업이사 혹은 팀장과 담당자가 같이 고객사 본사가 있는 서울로 올라가 거창한 접대를 치르고 온다. 적지 않은 비용을 하룻밤의 유흥을 위해 쏟아붓는다. 회사에서도 영업팀에겐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비용이다.
일반 직장인으로 평소에는 범접할 수 없는 그런 화려하고 거창한 접대가 가능하다. 그러면 담당자는 그 접대를 잊을 수 없게 된다. 그 말은 그 협력사를 더 많이 생각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마음이 오고 가는 것은 오감을 자극하는 무언가로 표현해야만 전달되는 법이다. 누군가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슴속에 간직한 채 말과 표정만으로 표현한다면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냉대받기 십상이다.
"대리님 여기! 무슨 생각을 그리하고 계세요?"
"아! 예 아무것도 그냥..."
그녀는 커피를 건넨다. 따뜻한 커피의 온기가 손을 타고 온 몸으로 전해진다. 그녀와 나와 벤치에 앉아 수성못을 바라본다. 오후의 햇살이 호수 위 수면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다. 살에 닿는 햇살의 따사로움과 아직은 데워지지 않은 초봄의 쌀쌀한 공기가 기분 좋은 긴장을 유지시켜 준다.
"와! 저기 오리배가 있네요"
"그러네요"
"와 재밌겠다"
"탈래요?"
"에이! 아직 다리가 오리배 탈 정도는 아녜요"
"음... 배는 내가 저으면 되죠! 자 가요"
그녀는 깁스를 풀었지만 아직 다 완쾌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나는 그녀가 오리배를 바라보는 표정에 화색이 도는 것을 보고 모른 체하기가 쉽지 않다. 얻어먹었으니 힘이라도 좀 써야 할 모양이다. 돈이 없으면 몸으로 때워야 하는 법이다.
"와 너무 재밌어요 대리님! 저 오리배는 처음이에요"
"후웃~ 후훗~ 그래요? 저도 처음인데..."
페달을 밟을수록 숨소리는 거칠어진다. 오리배는 서서히 호수의 중앙으로 나아간다. 혼자서 열심히 페달을 저으며 먹었던 고기들을 소화시키고 있다. 이마에는 송골 송글 땀이 맺히기 시작한다. 그녀는 환한 표정으로 호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즐거워한다.
'생각보다 힘드네 괜한 말을 했나?'
"대리님은 왜 여기 대구까지 오셨어요?"
"예?! 음... 뭐 돈 벌러 왔죠, 부산엔 일할 데가 별로 없어요 있어도 급여 수준이 낮아서"
"아 그러셨구나"
"근데 유진 씨는 서울 사람같은데 왜 여기 대구까지 왔어요? 일자리는 서울에도 많은데..."
"음... 그냥 떠나고 싶어서요"
"예?!"
그녀는 커피를 입술에 가져다 데며 잠시 말을 멈춘다. 멀리 해가 기울며 붉은빛을 뿜어내고 있다. 그 빛이 그녀의 얼굴에 닿는다. 붉게 상기된 듯한 그녀의 표정에 왠지 모를 쓸쓸함이 묻어난다.
그녀는 노을을 바라보고 나는 그녀를 바라본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속에 깊이 자신만의 사연들을 하나씩 안고 살아간다. 쉽게 꺼낼 수 없다. 누군가와 그런 사연을 공유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자신의 삶의 영역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비밀을 공유한다는 것은 사랑 혹은 우정 이전에 믿음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 믿음이 확신이 되면 사랑과 우정은 그곳에 뿌리를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