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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Dec 09. 2020

순수함이란...

팔공 남자 시즌 2-83

"유진 씨 미국에서 왔다면서요?"

"예? 어떻게 아셨어요?"

"어떻게 알긴요 회사에 소문이 자자하던데..."

"참... 회사라는 곳 무섭네요"


   그녀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왔다. 그리고 미국인이다. 게다가 스탠퍼드 대학에서 비지니스 스쿨을 졸업한 엘리트이다. 그런 그녀가 한국의 지방 도시 대구의 한 중견기업의 신입사원으로 입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그녀는 우리 회사에서 학벌로는 가장 톱이다. 유일하게 회장의 큰 아들인 사장이 그녀와 같은 학교 동문이다. 둘은 엄청난 나이 차이로 학교에서 만났을 리는 만무하지만 사장은 그녀의 이력서를 보고 놀라움과 반가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물론 사장뿐만 아니라 회장 이하 인사 관련 임원들과 인사팀 직원들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그녀가 학벌 위조가 아닌가 확인하기 위해 스탠퍼드 대학에 직접 연락하여 그녀의 졸업 여부를 확인하기까지 한 것이다. 사장은 직접 그녀에게 합격통보를 전달했고 회사에 유일한 동문 라인이라도 만들 기세였다. 

   다들 그녀가 별 생각 없이 넣어본 이력서 이겠거니 했지만 그녀는 최종 합격통보를 받고 정말로 입사했다. 사장은 그녀에게 미국 지사에서 근무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지만 그녀는 대구 본사에서 근무하는 조건으로 입사를 받아들였다. 아무도 그녀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국내 본사로 발령이 났다. 


"정말 이해할 수 없네요 나로서는..."

"뭐가요?"

"뭐긴요? 그 정도 학벌이면 뭐 미국에서도 괜찮은 기업에 들어가고도 남을 스펙인데 굳이 이곳 한국의 지방도시까지 와서 그것도 시골구석 떼기 기숙사에서 박봉을 받으며 지내는 이유가..."

"하하하 대리님 뭐가 그리 길어요, 한국 사람들은 왜 물어보는 게 다들 하나같이 똑같죠?"

"음... 그런가요?"

"제 친구들은 다들 멋있다. 역시 너 답다. 대단하다 그렇게 얘기하던데... 하하"

"예?! 뭐 미국 친구들이요?"

"예"

"전 사실 높은 급여, 좋은 환경 뭐 그런 걸 바라고 그 학교를 들어간 거 아녜요"

"그럼...?"

"대리님... 좀 춥지 않아요?"


   그녀는 코트의 옷깃을 여민다. 해가 산의 윤곽선에 걸려 빛을 잃어가고 있다. 호수에 어둠이 깔리고 있다.


"휘리리릭!"


  멀리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호수변의 오리배 선착장에서 관리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뭐라고 소리치며 우릴 향해 손짓한다. 빨리 호수를 나오라고 손짓하는 듯이 보인다. 주변을 둘러보니 호수 위에는 우리 둘만 남았다. 나는 급히 페달을 밟기 시작한다. 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한다. 너무 멀리 온 것 같다. 하필 바람도 역풍이다. 

  

"후훗 후훗"

"대리님 힘들죠 괜히 제가 오리배는 타자고 해서... 어머! 이 이마에 땀 좀봐!"


  그녀는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준다. 그녀의 손수건이 나의 이마에 닿는 순간 은은한 향이 콧속으로 스며든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그녀가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노동의 가치가 값지다는 말은 이럴 때 써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의 다리는 고통받지만 나의 뇌는 행복을 느낀다. 


  고통과 행복은 완전히 다른 것이라 생각되지만 사실 둘은 같이 다닌다. 고통 뒤에는 행복이 따라온다. 고통이 사라지는 순간이나 강도가 낮아지는 순간에는 안도의 행복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이 강할수록 그것이 멎을 때의 행복감은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만약 고통 속에서 예상치 못한 보상을 받게 된다면 그것이 아무리 소박할지라도 강력한 희열의 순간을 선사한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로 고통도 행복도 없는 무미건조한 삶이다.  


"풍덩!"

"앗! 대리님!"


   오리배에서 내리려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물에 빠지고 말았다. 호수물을 머리털이 쭈뼛쭈뼛 일어설 정도로 차갑다. 아직 봄기운이 오지 않은 초봄의 호숫물은 긴 겨울의 냉기를 그대로 머금고 있다. 


"에취! 으흐흐흐"

"대리님 괜찮으세요?"

"아... 괘.. 괜찮아요"

"감기 걸리시는 거 아녜요 빨리 젖은 옷을 벗고 따뜻한 데서 몸을 좀 녹여야 하는데..."

"으흐흐흐"

"아! 찜질방 가요!"

"예?! 찜질방?"

"예 저기 간판 보이네요!"


 찜질방 카운터에 서 있는 여직원은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들어오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목욕만 하시는 거예요?"

"아뇨! 찜질이랑 같이 해주세요 여기!"

"아니 유진 씨! 이건 제가 계산할게요"

"대리님은 식혜랑 삶은 계란 쏘세요  하하"

"하하하"

"대리님 그럼 좀 있다 봐요!"


  탕 속으로 몸을 넣자 몸 속에 남아있던 냉기가 탕속으로 빠져나가며 더운 열기를 빨아들인다.


"아.... 하...."


   입이 저절로 벌어지고 탄성인지 신음인지 구분하기 애매한 소리가 터져나온다. 눈을 감는다. 잠시 뒤 컴컴해진 눈 앞이 다시 밝아지고 좀 전에 오리배 위에서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나에게 손을 내밀어 땀을 닦아주던 그녀의 얼굴 곳곳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보드란 살결 위에 환한 이마, 짙지도 엷지도 않은 눈썹, 오똑한 코 그리고 그 아래 윤기 있는 연분홍 입술이 눈 안가득 들어온다.  


  순간, 탕 잠겨있는 다리 사이로 피가 몰리는 느낌이 온다. 탕 속의 열기에 이완된 혈관으로 엄청난 혈류가 지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순간 눈을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부끄러운 마음에 몸을 돌려 눕는다.


'아놔! 이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는 그 저속한 생각들을 지워버리려 머리를 흔든다. 그럴수록 그 생각들은 사라지기는커녕 더 생생 해지는 느낌이다. 스스로를 자책한다. 순수한 그녀에게서 느끼는 순수하지 않은 나의 감정에 죄책감이 느껴진다. 또 그 감정에 반응하는 나의 몸이 부끄러워진다.


  사실 매혹적인 이성을 향한 육체적인 반응은 자연스럽고 순수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모습에 때론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것이 더럽고 추악한 모습이라 생각한다. 생명을 가진 만물 중에 유일하게 인간만이 그런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고 보면 인간세상은 순수한 것을 추악하게 만들고 추악한 것들을 순수하게 포장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것 같다.


 '왜 신은 인간에게 그런 죄의식을 주신 걸까?' 


   그녀의 생각을 떨쳐버리고 혈관 속 혈류량을 줄이려 고귀한 신과 나와의 순수한 관계에 대해 고민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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