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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Nov 29. 2020

오후 4시

팔공 남자 시즌 2-81

"사내 도서관 가봤어? 생각 이상이던데"

"그니까요? 알록달록하게 꾸며놓은 것이 완전 딴 세상 같던데요 칙칙한 사무실과는 완전 다른 세상이던데요"

"여직원들은 쉬는 시간만 되면 다들 거기로 가서 사진 찍고 난리도 아녜요"

"거기서 무슨 사진을 찍고 그런데?"

"그 벽에 그려진 그림 안 보셨어요? 무슨 순정만화 같던데... 우리 회사 남직원과 여직원의 러브스토리를 연상케 하는... 하하하"

"어 거 나도 봤는데 그림 꽤나 잘 그렸던데"

"근데 누가 한 거래?"

"인사팀에 새로 온 신입 여직원이라고 하던데요"

"신입사원이?! 당차네! 하기야 이곳에 떼 묻은 직원이 감히 그런 일을 할리가 없지"


  사내 도서관이 완성되고 커다란 이슈가 되었다. 아침부터 해외영업팀 팀원들도 돌아가며 도서관에 대해 한 마디씩 낸다. 벽마다 파스텔 톤의 각기 다른 색으로 칠해져 칙칙한 잿빛으로 도배된 회사 건물과는 색다른 공간을 만들어 내었다. 나 또한 그녀가 만들어 준 각각의 페인트를 칠할 때 회사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다채로운 색감에 짐짓 우려스러운 마음이었다.


  인사팀장도 처음 그녀가 만든 도서관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녀가 일을 이렇게까지 벌여놓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처음엔 무턱대고 그녀가 한 행동을 질책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나서 직원들의 폭발적인 반응에 이내 태도를 바꿨다.  


 사내 게시판에는 도서관 이슈로 도배되었고 결국 회장의 귀에도 들어갔다. 회장은 도서관을 방문했고 화사한 도서관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 졌다. 보수적인 자동차 제조업에서 오랜 세월 일해오며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들인 사장은 도서관에 대한 직원의 만족도와 시대의 분위기 변화 등 적절한 설명을 곁들여 회장의 당혹감을 안도감으로 바꿔놓았다. 사장의 제안으로 사내 도서관 활성화 방안으로 별도의 예산이 편성되었고 사내 독서 문화를 정착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근데 저 그림은 누가 그렸나?"

"그림도 인사팀 배유진 사원이 그렸습니다."

"음... 그림 속 여직원이랑 많이 닮았구만, 그 옆에 남자 직원은 누군가 미래의 남편인가? 하하"

"하하하"

"하하하"


  그림 속에는 서로 책을 읽으며 환하게 웃고 있는 여직원과 남직원의 다정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회장은 그림 속 여직원과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며 미소와 함께 웃음 짓는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임원들과 직원들도 다 같이 웃음을 터뜨린다.


"어이! 전대리 뭔 책을 빌린 거냐?  [아플 수도 없는 마흔이다] 하하하, 어이! 이제 갓 서른 넘긴 놈이 무슨 마흔 타령이냐"

"예... 헤헤헤 그냥... 마흔의 느낌이 궁금해서요"

"야 그건 저기 주 팀장님한테 물어보믄 되지! 하하"

"뭐냐!?"

"팀장님! 전대리가 마흔의 심정이 궁금하답니다"

"야! 그런 거 신경 쓸 겨를 있음 중국 공장 이익률 올릴 생각이나 좀 더 해라!"


  구 과장은 농담처럼 던진 말이지만 정말 주팀장의 머릿속이 궁금해서 빌린 책이다. 중년의 직장남성은 왜 저렇게 살까 이해 하려고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해 주지 않을까 해서 빌린 책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버티기에 돌입한 중년의 직장인, 한 가정의 가장으로 자식들과 아내의 버팀목이 되어 살아가는 운명을 책으로 이해하긴 쉽진 않겠지만, 그가 직장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안쓰럽다고 해야 할까? 그는 자신이 원하지도 잘하지도 못하는 것을 억지로 붙잡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오죽하면 부하직원들도 뒤에선 그의 실력을 운운하며 팀장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다. 그동안 쏟아 부운 시간과 노력이 벗어날 수 없는 미련과 집착을 만든 것은 아닐까? 사실 그가 쏟아부은 청춘의 시간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가족의 안위를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곳을 벗어나는 것은 단순히 DG 오토모티브의 해외영업팀장의 자리를 내려놓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가장으로서 해야 할 역할도 잃어버리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공존한다.


"전대리! 부사장님한테 올릴 해외영업 분기 실적 보고 자료 다 정리됐어?"

"예 팀장님! 거의 다 됐습니다"

"보자 얼른!"

"예!"

"야! 이게 뭐야?"

"네?!"

"보고서 양식 바꾸라고 얘기하지 않았어!?"

"앗! 죄송합니다!"

"하아! 참 어쩔 거야 부사장님이 직접 얘기하신 건데..."

"다시 작성해 오겠습니다."

"야! 됐어! 무슨 지금 오후 4시가 넘었는데... 부사장님 좀 있음 나가실 텐데 그냥 줘! 정신 좀 차리자 제발!"


   오후 4시,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엔 애매한 시간이다. 해가 기울고 몸은 나른해지며 얼굴엔 생기를 잃어가고 있다. 마흔이라는 나이랑 닮아있다. 20대의 패기와 30대의 열정은 이제 찾아볼 수 없다. 중년의 노련함이 장착되긴 했지만 그 노련함은 새로움을 싫어한다.


  다시 출발선으로 돌아가 뛰어갈 용기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다른 이들은 다들 앞서 나가는데 자신만 뒷걸음 칠 수 없다. 마치 인생의 낙오자 혹은 패배자라고 생각한다.  


   다수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이라 믿고 그 길 위에서 선두가 되고자 고군분투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 길이 진정 자신이 원하는 길인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다. 사회가 원하고 가족이 원하는 길을 달려간다.


  불혹(不惑)은 마흔을 일컫는 또 다른 말이다. 논어에서는 유혹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 시기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그 말은 다르게 얘기하면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로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마흔이라는 인생의 중반부가 되면 흘러온 자신의 역사를 뒤집을 수 없는 수많은 이유들로 가득 차 버린다.  그것들을 놓을 수 없어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소명(召命)이 아닌 숙명(宿命)을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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