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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Dec 25. 2020

신과 닿기 위해

팔공 남자 시즌 2-88

"어?! 이 시간에 웬일이지?"


  안 에스더가 보인다. 나의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에 눈이 부신지 한 손을 들어 눈을 가린다. 나는 원룸 앞 공터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린다.


"안 에스더! 이 시간에 웬일로 제 집까지 오셨어요?"

"이제 오는 거예요? 유진 자매는 잘 데려다줬어요?"

"예 잘 데려다주고 왔죠"

"할 얘기가 있어서 왔어요"

"이 늦은 시간에... 전화를 하지 그랬어요"


  그녀는 만나서 할 얘기라며 일부러 집 앞까지 찾아왔다고 한다. 시간은 이미 밤 11시가 넘어가고 있다. 가로등 불빛 아래 선 그녀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다. 


"안 에스더, 혹시 술 마셨어요?"

"예?! 냄새나요?"


  그녀 가까이 다가서자 알코올 냄새가 올라온다. 그녀는 입을 가리며 당황한 눈치다. 그녀는 집에서 와인을 조금 마셨다고 한다. 조금이 아닌 듯하다. 그녀가 술을 마시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아... 춥지 않아요?"

"안 에스더 일단 집으로 올라가죠"


  발걸음을 옮기는 그녀가 어찌 위태로워 보인다. 바로 걷지 못하고 좌우로 휘청거린다. 균형이 잡기 힘들었는지 계단 난간을 잡고 힘겹게 계단을 오른다.  


"안 에스더, 조금 마신 게 아닌 거 같은데요?"

"아... 아녜요, 제가 술이 약해서..."

"잠깐 앉아 있어요, 뭐 좀 타드릴께요"


  그녀는 식탁 의자에 앉아 내가 차를 타는 모습을 지켜본다. 술기운에 몸을 추스리기 힘든지 식탁에 몸을 엎드린다. 


"자! 여기 유자차를 좀 탔어요"

"아~ 고마워요 희택 형제 그리고 미안해요"

"뭐가요?"

"아니 그냥..."


  그녀는 말을 끝내지 않고 몸을 일으켜 머그컵에 담긴 유자차를 두 손으로 들고 입술에 가져다 댄다. 좀 전까지 나를 쳐다보던 시선은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듯 내 주변을 한 번 두리번거리고는 작은 찻잔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평소와는 다른 어색한 행동에 나까지 어색해진다.


"아니~ 우리 목녀님께서 술도 다 마실 줄 아시고 마실 거면 나한테 미리 연락을 좀 하시지 목녀님이랑 거하게 한잔 하는 건데... 하하하"

"... 그럴래요?"

"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예상치 못한 그녀의 답변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내가 생각하던 목녀의 모습이 아니다. 그녀는 지금 목녀라는 역할을 벗어버리려 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 역할을 벗어던지기 위해 술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하려는 것일까? 


  우리는 일상 속에서 주어진 자신의 역할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 역할에 투영된 이미지는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 통념과 신앙 혹은 주변의 시선 속에서 만들어진 자신의 이미지는 그에 걸맞은 행동양식을 요구한다. 삶 전체가 그것과 동일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매일을 살아간다.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또 다른 자신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또 다른 자신을 감추며 살아간다. 혹자는 그런 자신이 있는 것 자체를 모르고 살아가는 자도 적지 않다. 이성이 억누르고 있던 감성은 없어진 줄 알지만 그것을 터뜨릴 도화선을 찾지 못한 것뿐이다. 오랜 시간 사회관습적으로 억압되어 있던 것이 터지면 그 위력은 실로 강력하다. 쓰나미가 폭풍해일 보다 무서운 건 폭풍은 바다 표면에 파도만 일으키지만 쓰나미는 바닷물 전체를 출렁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수심이 깊으면 깊을수록 속도와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목녀님께서 오늘 왜 이러실까?"

"농담하는 거 아녜요, 희택 형제, 저 사실 한동안 너무 힘들었어요"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다. 더 이상 웃음 섞인 농담을 꺼낼 수가 없다. 그녀의 눈은 나의 시선을 잡아놓고 입까지 막아버렸다. 어린 시절의 유린과 연인의 죽음까지 꿋꿋하게 이겨내고 일어섰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지금 내 앞에서 무너지고 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유린당하던 시절 자신을 아껴주던 교회의 전도사를 바라봤고 그를 통해 신앙을 키워온 줄 알았지만 그가 교회 안에서 반려자를 만나고 가정을 이루자 시기와 질투가 밀려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신앙이 아닌 사람을 향한 집착이었다. 그를 향한 집착이 사랑이 되길 원했지만 그건 단순히 감기처럼 사춘기 소녀가 겪는 풋사랑이었지만 그녀에게는 폐렴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교회를 떠났다. 


  성인이 되어 만난 요한 목자는 다시 그녀를 교회로 이끌었고 그녀는 그에게 빠져들듯 주님을 외쳤지만 그것 또한 오로지 연인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가 떠나고 한 없이 무너지는 그녀는 성경 속 어떤 말씀도 기도도 그 어떤 것도 자신을 바로 세우지 못했고 사람들의 시선이 사라진 밤이 찾아오면 홀로 내면에 잠든 자신을 끌어내려 술을 찾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녀는 결코 스스로 신과 닿는 법을 몰랐다. 


  그녀가 술에 취해 홀로 눈물과 슬픔을 토해낼 때마다 나에게 연락이 왔었다고 한다. 기도와 말씀이 아닌 나의 관심과 위로의 말들이 그녀에게는 많이 힘이 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그녀에게 희망이 되었던 것일까?


"희택 형제, 우리 다른 교회로 갈래요?"

"예?!"


  그녀가 의지하고 맹신하던 것은 하나님이 아니었다. 그녀는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다. 사람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을 신에게 받으려고 했지만 그건 허울 좋은 핑계였을 뿐 결국 사람의 관심에 대한 집착을 보기 좋게 포장한 것뿐이었다.


  우리는 신과 닿기 위해 누군가를 통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닿기 위해 신을 이용하는 것이 아닐까?


  신은 어디에도 있지만 우리는 어디에서만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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