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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Dec 26. 2020

순수한 관심

팔공 남자 시즌 2-89

  안 에스더가 가만히 나를 응시한다. 그 시선은 정확히 나의 입가를 향하고 있다. 나의 답변을 기다리는 것이다. 나의 뇌를 거쳐 입으로 출력되어 나올 그 한 마디는 기원전(BC)과 기원후(AD)를 나눌 역사적인 순간이 될 것임을 직감한다. 그녀는 그 상황을 만들었고 나는 피해나갈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미안해요... 안 에스더"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진다. 잠시 적막이 흐른다. 그녀는 떨어진 시선을 찻잔 속에 고정한 채 생각에 잠긴다.


"혹시 유진 씨 때문인가요?"

"예?!"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입을 연다.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그건 예상치 못했던 그녀의 물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에게 나의 내면을 들켜버린 것 때문이기도 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가장 이상적인 대답을 찾아내야 한다.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아 보이는 그런 류의 말이 필요하다. 그 어떤 말도 상처를 피해 갈 수 없지만 경중을 조절할 수는 있다. 마치 수술할 때 마취를 하는 것처럼 고통을 덜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내면을 간파당한 나는 그녀를 어떤 말로 대면해야 할지 도저히 알 길이 없다. 


  남녀 간의 감정은 타이밍이다. 스파크가 튀었을 때 시동이 걸려야 출발을 할 수 있는 법이다. 스파크가 튀었지만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른 이동 수단을 찾아야 한다. 가끔씩은 여러 번 스파크를 튀기다 보면 한 번쯤 시동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과거 그런 류의 행동이 끈기 있는 모습이라고 칭찬했을지 모르지만 이제 계속 스파크만 튀기는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할 사람은 없다. 완벽한 시공간의 조화가 이루어졌을 때 스파크를 튀기고 시동을 걸어야 한다.  


  처음 안 에스더가 내게 보여준 관심은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 관심은 남녀 간의 관심이 아닌 신앙인으로서의 낮은 자를 바라보는 순수한 관심이었고 나는 그 관심을 남녀 간 오고 가는 그런 스파크로 오해하긴 했지만 시동을 걸 수도 걸릴 수도 없는 상황이라는 걸 알고는 마음가짐을 고쳐먹었다. 


   상황은 바뀌었고 그녀가 힘든 시기에 그녀가 내게 줬던 관심처럼 돌려줬던 관심은 그녀에게 스파크가 되었고 그동안 적지 않은 내적 갈등을 겪었을 것이다. 


  그녀는 시동을 걸어보려 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 시동이 걸리지 않으면 방전되어버린다. 


"아닌가요?"

"그런 거 아녜요, 안 에스더가 무슨 오해를 하신 건지 모르지만..."

"... 그런가요?"


  그녀의 직감은 정확하다. 하지만 인정할 수 없다. 지금 그녀의 말에 수긍하는 것은 그녀에게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 미안해요 희택 형제! 늦은 시간에 제가 너무 실례한 것 같네요, 가 볼게요"

"아니... 자.. 잠깐만요"


  그녀는 탁자를 집고 의자를 뒤로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잰걸음으로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채 제대로 신지도 않은 채 문을 열고 나가버린다. 내가 그녀에게 대답을 하고 그녀가 현관문을 나서기까지 그녀는 한 번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녀를 뒤쫓아보지만 어느새 계단을 내려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본다. 전화기는 이미 꺼져있다. 


  안 에스더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유진 씨를 데리고 왔을 때 그녀를 바라보는 나의 눈빛을 그녀가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혼자서 키워버린 감정을 다시 스스로 잠재우는 것은 그녀에게는 삶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불씨를 꺼뜨리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시 잿더미 속에 살아있을지 모를 불씨를 살려보려 용기를 내었지만 불씨는 이미 꺼져버렸고 그나마 남아있던 온기에 찬물을 끼얹혀 버렸다. 이제 되돌릴 수 없다. 


감정 없는 관심이 있을 수 있을까?  


  타인의 관심이 만들어낸 감정은 스스로 커져간다. 그 감정은 스스로 커지지만 스스로 꺼지진 않는다. 타인은 씨앗을 떨어뜨렸을지 모르지만 씨앗은 스스로 싹을 틔운다. 


  우리는 타인의 관심이 분명 어떤 감정이 섞여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건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관심이라고 단정 짓는다. 인간은 본디 의미 없는 행동에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지 않는다. 물질적 혹은 육체적 아니면 심리적 보상이 따르지 않는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의미 없는 것에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는 자들은 비현실적인 인간이거나 아니면 역사 속에서나 가끔 나타나는 예수 혹은 부처 같은 성인들이라 생각한다. 가시적인 성장효율을 중시하는 현실 세계에서 그것들과 동떨어진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자들은 극히 일부분이다. 그런 부류의 사람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이들의 대부분도 부와 명예를 쫓는 훌륭한 연기자일 가능성이 크다. 혹여 정말 성인 같은 사람이 나타난다 해도 우리는 의심할 것이다. 


  감정도 없고 관심도 사라진 인간세상이 삭막할 것이란 건 누구도 의심치 않는다. 감정 섞인 관심이 우리 삶의 희로애락(喜怒哀樂) 가져온다. 우리는 기쁨(喜)과 즐거움(樂) 충만한 삶을 바라지만 삭막하지 않을 거라면 분노(怒)와 슬픔(哀)도 가져가야 하는 것이다.


  그럼 순수한 관심은... 무엇을 가져다주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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