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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Dec 27. 2020

매 맞는 코끼리

팔공 남자 시즌 2-90

"어이! 전대리,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서관에 책도리랑 많이 닮은 거 같단 말이야"

"그쵸? 구과장님, 저도 어디서 많이 낯이 익다 했어요 하하하"

"소문에 전대리가 도서관 페인트칠 다 했다며, 도대체 그 인사팀 여신이랑 뭔 사이야? 큭큭"

"사실이야? 어이! 전대리~ 회사에서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연애 사업을 하고 있었구만"

"오! 전대리 한 번 잘해봐, 미국 유학파 엘리트에 사장님 동문 라인인데 하하하"


   사장의 독서 활성화 지시로 사내 도서관에 신간도서는 물론이고 각종 편의 시설들이 비치되었고 그곳은 사내 직원들의 휴게 명소로 자리 잡았다. 많은 이들이 그 도서관내 벽에 그려진 남녀 캐릭터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고 별칭까지 붙여주었다. 남자는 '책도리' 여자는 '책수니'였다. 그리고 그 캐릭터는 인사팀을 비롯해서 총무팀, 마케팅팀 같은 관리부서에서 사내 포스터나 홈페이지 게시판의 회사 홍보 캐릭터로 적극 활용되었다. 


   여자 캐릭터는 도서관의 설립자인 유진 씨임이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남자 캐릭터에 대한 사내 직원들의 관심이 들끓었고 내가 야밤에 홀로 남아 그 도서관 페인트칠을 했다는 소문이 퍼지며 그 의혹의 시선이 나에게 쏠리고 있었다. 해외영업팀 파티션을 지나다니며 수군대는 여직원들이 여간 신경 쓰이지 않는다. 다른 사무동에서 근무하는 여직원까지 도서관의 '책도리'와 나를 비교해보려 찾아들었다.




"미안해요 대리님, 괜히 저 때문에 곤혹을 치르시고"

"아... 아녜요 괜찮아요"

"제가 괜한 그림을 그려가지고..."

"근데 그 남자 캐릭터 혹시 저예요?"

"설... 설마요 그... 그럴 리가요 하하 사람들이 그냥 오해한 거예요"


  그녀는 말까지 더듬으며 당황한 표정이 역력하다. 강한 부정은 긍정을 의미한다. 속마음을 들킨 어린아이 같은 그녀의 모습이 귀엽게까지 느껴진다. 그녀는 애써 무관심한 척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가요? 전 혹시나 해서 속으로 좋아했는데 하하하"

"예?!"  

"제가 괜한 오해를 했네요"

"..."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녀는 그런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하는 모습이다. 


"유진 씨! 사랑의 반대말이 뭔지 알아요?"

"예?!"

"말해봐요"

"음... 글쎄요 미움이나 증오가 아닐까요?"

"무관심이래요"

"그래요?"

"삶에서 정말로 소중한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게 무관심이래요"


  삶에서 소중한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사랑이 가장 으뜸이 아닐까? 사람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이야 말로 삶을 가장 의미 있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차라리 증오나 미움 같은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해볼 수 있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시체 같은 사람들은 세상을 잿빛의 차가운 세상으로 만들 뿐이다. 울고 웃고 화내고 기쁘게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감정이 충만한 사랑이 세상을 더욱 인간답게 만들어간다. 


"전 그 그림을 다시 보며 관심과 사랑을 느꼈어요"

"..."

"제가 지금 이 시간에 여기 유진 씨 기숙사 앞에 찾아온 것도 관심과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거 아닐까요?"


  그녀와 나는 아파트 복도에 서서 멀리 수많은 공장들이 불빛을 내뿜는 공단을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슬며시 복도 난간에 올린 그녀의 손위에 내 손을 포갠다. 그녀가 나를 쳐다본다. 천천히 서로의 얼굴이 같은 속도로 가까워진다. 


"끼이이익 쿵!"

"아~ 시원하다! 이제 좀 살긋네"


  바로 옆 아파트 현관문이 열리고 사각팬티 바람의 배불뚝이 아저씨가 러닝셔츠 밖으로 튀어나온 배와 아랫도리 사이를 긁적이며 슬리퍼를 끌며 걸어 나온다. 얼굴에서부터 목까지 땀이 흘러내려 마치 사우나에서 나온 것 같은 모습이다. 입에는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려다 우리와 눈이 마주친다.


"야! 이 웬수야! 담배연기 들어와! 문 닫아!"

"쿵!"


   문이 열린 집안에서 여자의 찢어지는 듯한 쇳소리가 들려온다. 남자는 한 쪽 발을 뒤로 빼며 현관문을 차듯이 닫아버린다. 그리고 우리 쪽으로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꼬나본다. 


"오~ 여기는 이제 시작인가 보네 큭! 시작이 좋지"


  끝은 나쁘다는 말인가? 사랑은 시작과 끝이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사랑이 끝나면 무엇이 찾아올까? 그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것은 권태와 공허함 뿐이다. 그들은 어쩌면 밀려드는 권태와 공허함을 일시적인 육욕(肉慾)을 통해 해소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뭐 다른 이성을 찾아 해소하는 것보다는 나을지 모르지만 마음과 육체가 일치되지 않는 듯한 사랑을 유지하는 것이 애처로워 보인다. 더 살아보지 않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그런 사랑이라면 굳이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밀려든다.


'아놔~ 이 자쉭은 하필 이때 튀어나올게 뭐람?'


"대... 대리님 전 먼저 들어가 볼게요"

"아... 네 들어가요 유진 씨"


  그녀는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당황한 모습으로 서둘러 집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어이! 형씨! 뭐하고 섰어, 같이 들어가야지 큭큭"

"그런 거 아니거든요"

"뭐가 아냐, 다 그런 거지"


   그는 담배를 입에 물고는 주먹과 손바닥을 여러 번 마주치며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과거 나 또한 친구나 남자후배들 사이에서 저런 행동과 표정을 지었던 기억이 있다. 그땐 마치 그것이 뭔가 다 아는 듯하고 내가 너보다 어른이다라는 듯한 모습으로 비쳤을 거란 우월감을 가져다줬다. 지금 그 상황을 당하고 있는 내가 느끼는 것은 혐오감뿐이다. 이런 게 바로 내로남불인가?  


  세상은 자기중심으로 움직이기에 남을 짓밟음으로써 자신을 올리는 것이 일상화되어간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우월감을 느끼는 것을 가장 선호한다. 내가 못되더라도 남 잘되는 꼴을 못 보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영혼을 파괴한다.


  나는 어느 곳에서는 매 맞는 코끼리였고, 또 다른 곳에서는 몽둥이를 든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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