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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Jan 05. 2021

같지만 다르다

팔공 남자 시즌 2-91

"헉헉! 대리님! 좀 천천히 가요"

"아! 미안해요, 좀 쉬었다 갈까요?"


  등산로 초입에 들어서고 나도 모르게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항상 혼자 등산하는 습관 때문에 나만의 페이스에 맞춰 올라가다 보니 뒤에 따라오는 유진 씨를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의 부름에 뒤를 돌아보고 나서야 그녀가 저만치 뒤처져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등산을 좋아한다는 나의 말을 들은 그녀는 자신도 등산을 가보고 싶다며 나에게 산행 대장의 역할을 부탁했다. 주말의 이른 아침 그녀와 대구의 앞산을 오르기로 했다. 그녀가 등산 얘기가 나오고 그녀는 팔공산을 얘기했지만 산행 초보인 그녀에게 팔공산은 무리이다 싶어 앞산으로 변경했다. 


   대구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지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나 또한 대구에 오기 전 팔공산 밖에 몰랐다.  


"앞산이요?"

"예"

"여기 근처엔 산이 없는 거 같은데"

"하하하"


  처음 그녀에게 앞산을 얘기했을 때, 내가 처음 앞산이라는 명칭을 들었을 때와 비슷한 반응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도 집 앞 근처의 산쯤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대구에 와서 이곳 지리를 잘 모르던 나는 대구의 한 온라인 등산 동호회를 통해 대구 근교의 산들을 탐방했다. 그곳에서 처음 발견한 앞산 등산 일정을 보고 뒷산은 어디냐며 물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대구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모두가 알 수 있었고 어디서 왔냐며 나의 출신을 물어왔다. 


  앞산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고유명사 이름을 가진 산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과거 성불산(成佛山)이라는 이름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구의 앞산이 앞산이라면 뒷산은 팔공산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병풍처럼 대구의 북쪽을 둘러싸고 있는 팔공산(1,192m)은 대구의 대표하는 명산이다. 팔공산이 북쪽의 추운 기운을 막아주는 산이라면 앞산(658m)은 남쪽의 따뜻한 기운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한 나지막한 산이랄까? 그만큼 대구사람들에게도 친근하고 가볍게 다가갈 수 있는 산이다. 그런 느낌 때문일까? 앞산과 그 주변은 대구사람들이 즐겨 찾는 명소들이 즐비하다.


"앞산이라고 얕볼게 아니네요 하아~ 하아~"

"그렇죠 산이 높다고 힘든 게 아녜요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산의 높이는 크게 의미가 없어요"

"예? 무슨 말이에요?"

"산의 높이는 해발고도잖아요, 해수면에서의 높이예요, 우리는 바다에서 시작해서 올라가는 게 아니니깐요"

"사실 높은 산일 수록 높은 곳에서 시작하니까요"


   우리의 개개인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의 출발점은 모두가 다르다. 누군가는 바다에서부터 누군가는 등산로 입구에서부터 누군가는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갈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정상이라는 곳에 빨리 가는 것에만 집중한 나머지 높고 거대한 목표를 단숨에 이뤄내는 남다른 재능과 배경을 가진 자들을 우러러본다. 


  사실 힘들이지 않고 올라간 정상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경치가 주는 아주 짧은 감탄밖에 없다. 길고 험난한 과정을 거쳐 올라간 정상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경치가 주는 감탄보다는 그 과정을 이겨내 온 자신에 대한 감격이 더 크다. 그 후에 눈에 들어온 경치는 그 노력에 대한 보상이기에 더욱 값지고 의미 있다. 같은 것을 보더라도 느끼는 것은 다르다.


"아~ 그렇군요! 대리님 역시!"


  그녀는 엄지 척을 내어 보인다. 난 우쭐한 기분에 더 늘어놓으려다 자중하는 모습을 보이며 가방에서 오이를 꺼내 그녀에게 건넨다. 시원한 오이는 등산할 때 갈증과 허기를 달래기에 가장 좋은 채소이다. 깨어물 때 터져 나오는 오이의 과즙은 달지 않고 시원한 천연 이온음료이다. 


"와! 시원하다. 대리님! 이런 오이는 처음 먹어봐요"

"하하하"


  처음이다. 그런 맛은 내가 처음 산에 올랐을 때 누군가가 나에게 건넸던 그 오이의 맛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그런 것이었다. 산에서 땀과 근육의 통증에 혹사된 몸이 느낀 오이의 맛은 저 밑에서 일상에서는 절대 맛볼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같은 것을 먹더라도 어디서 먹느냐에 따라 맛은 달라질 수 있다.


  그녀의 하얀 이마에서 샘솟는 땀들이 중력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한 방울 두 방울씩 흘러내린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이마를 닦아준다. 아무 생각 없이 그녀의 이마를 닦아주던 나와 그녀가 눈빛이 마주친다. 오이의 신비한 맛에 빠져있던 그녀는 신경이 나에게로 옮겨오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산비탈의 위쪽에서 그녀의 내려다보고 그녀는 나를 올려다본다. 오이를 물고 있던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손이 아래로 내려간다. 나의 얼굴도 그녀의 얼굴로 내려간다.


"와~아! 산비탈이 장난이 아니네!"

"아이고~ 저 커플도 장난이 아니네!"


  뒤에서 등산객 한 무리가 올라온다. 순간 그녀에게 다가가던 나의 얼굴은 다시 정상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그녀도 다시 오이를 입에 물고 나를 뒤따른다. 하늘은 나에게 너무 짧은 시간만 허락하시는 것 같다는 불만이 터져 나오며 다시 종아리와 허벅지에 힘을 실어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부끄러움 때문인지 산행으로 열이 올라서 인지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그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나를 따라 올라온다. 그녀의 마음도 나랑 같은 것일까? 

앞산 전경

"우아! 너무 멋져요!"

"하아아~~ 후 우우우~~ 그렇죠? 하하하"


  정상에 도착했다. 멀리 뒤로 팔공산의 산줄기가 보이고 그 품 안에 들어있는 대구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모습이 마치 회색도시를 담은 녹색 바구니 같아 보인다.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장관을 바라보다 불어오는 바람에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쉰다. 이마에 맺혀있던 땀들은 바람에 날아가고 땀에 붙어있었던 머리카락들이 자유롭게 흩날린다. 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본다. 그녀가 다시 눈을 뜬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린다. 


"후 우우우~ 너무 좋다. 이런 게 대리님이 말한 등산의 묘미군요"

"음... 벌써 느꼈어요 그 묘미를? 하하하"

"제가 좀 빨라요 하하하"


  그녀의 말과 행동들은 나를 더욱 그녀에게 빠져들게 만든다. 아니 이미 빠져든 것이 분명하다. 사랑이 스며든 지금 눈 안에 들어온 풍경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아름다워 보인다. 


  같은 것을 봐도 누구랑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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