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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Mar 17. 2021

선과 악을 오고가다

팔공 남자 시즌 2-96

   나는 그동안 묘연해진 그녀의 행적에 대한 의혹과 궁금증들이 한순간에 풀려나가기 시작한다그녀의 실종이 사장과 연관되어 있다는 확신이 든다나도 모르게 어금니를  깨물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나는 최근의 일기를 확인하려 마지막 장으로 책장을 넘긴다. 거기서 그녀가 사라지기 직전 무언가를 발견할  있을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2/20, it's good 날씨 for painting

  On the ladder(사다리 위에서) 그를 내려다본다. 그는 얼굴에 페인트를 묻힌 채 열심히 칠하고 있다. 그가 한 엉뚱한 농담에 웃음이 터졌고 사다리에서 fall down(떨어)했다. 발목에서 전해지는 통증에도 그가 한 농담이 너무 웃겨 아픈 것도 잊고 있다가 일어서려 하니 참기 힘든 통증이 엄습한다. 그가 등을 내민다. 따뜻하다. 그의 등에서 싫지 않은 땀냄새와 온기가 나의 가슴을 타고 전해져 온다. 나는 그 포근함에 눈을 감고 나도 모르게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고통 뒤에 찾아온 행복이라고 해야 하나?  No pain No gain이라고 해야하나? 하하 너무 좋다 at this moment (이 순간이) ]



[2/22 날씨 is between cold and chilly (냉랭함과 서늘함 사이)

   그가 홀로 페인트 칠을 다 했다. amazing and touching (놀랍고 감동적이다). 나는 늦은 밤 회사에 남아 붓을 들고 그가 칠해놓은 아이보리 벽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곳에 나와 그의 추억을 만들어 넣는다. 아주 잘생긴 모습으로 그려본다 Nobody can figure it out.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다 그리고 보니 그래도 그가 더 잘생긴 것처럼 느껴지는 건 그냥 기분 탓일까? 이런 게 사랑인 건가? 부모에게 버림받고 또다시 버림받지 않으려 부단히 도 나를 잊고 또 다른 나로 여기까지 달려왔다. 사랑을 받기보다 버림받지 않으려는 생각만으로 살았던 것 같다. 이제 나도 사랑을 있을까...]


"유진 씨 도대체 어디 있는 거예요?"


  그녀의 일기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녀의 일기의 마지막 장은 나와 사내 도서관 페인트 칠을 했던 시점에서 멈췄다. 그 이후의 벌어진 일들은 다른 새로운 일기장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책장의 다른 책들을 뒤적인다. 책장을 다 뒤져도 다른 일기장은 나오지 않는다. 


'아, 도대체 어디 있는 거지?'

"희택 씨! 안에서 아직 뭐하세요?"

"아! 네! 그냥 뭐..."

"언제까지 계실 거죠? 저 좀 나가봐야 될 거 같은데..."

"아 죄송합니다. 저도 나가볼게요"


   그녀의 기숙사를 빠져나왔다. 하늘이 마치 나의 기분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먹구름이 잔뜩 끼었다. 아파트 뒤쪽으로 난 샛길을 따라 걷는다. 유진 씨를 처음 만났던 곳이다. 아파트 샛길을 한참 내려가다 버스 정류장에 닿았다. 지금은 누런 들판으로 변했지만 그녀를 처음 만났던 그날(시즌2-73)은 온 세상이 하얗게 눈으로 덮여있었다. 버스가 지나가는 논두렁길을 따라 걸으며 사색에 잠긴다. 늦가을 논두렁길 주변은 추수가 끝나고 황량함만 가득하다. 


"어! 안 에스더, 여기서 뭐해요?"

"앗! 희택 형제?!"

"뭐한다고 논두렁 밑에서 올라오는 거예요?"

"아... 논두렁 밑으로 뭘 좀 잃어버려서"

"논두렁 밑에요? 아니 목녀가 여기까지 무슨 일로 왔데요?"

"아.. 니 그게 지나가던 길에 흘렸어요"


   논두렁 밑에서 힘겹게 올라온 안 에스더를 목격했다. 그녀의 한쪽 손에는 흙이 잔뜩 묻은 신발 한짝이 들여있다. 그녀는 신발을 다른 손에 들여있던 검은 비닐봉지로 감싸 안는다. 내가 뭐냐고 하니까 봉지를 허리 뒤로 숨기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급한 일이 있다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논두렁이 끝나는 곳에 세워둔 차로 뛰어가더니 금세 차를 몰고 사라져 버린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나는 그녀가 올라왔던 논두렁 밑으로 조심히 내려가 본다. 그곳에서 낯익은 신발 한쪽이 눈에 띈다. 신발은 논두렁 안쪽 흙속에 반쯤 묻혀있다.  


"앗! 이건 분명 유진 씨 운동화인데... 뭐지 이건?" 


   그때 하늘에서 한 방울씩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한두 방울이던 빗방울은 빗줄기로 변하며 장대같이 쏟아진다. 나는 그녀의 운동화 한쪽을 들고 비를 피할 틈도 없이 논두렁 위에서 쏟아지는 비를 온전히 맞으며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다시 아파트 뒤쪽 샛길로 접어들었다. 그곳은 이미 쏟아지는 빗물이 모여 좁은 골목을 콸콸 흘러내리며 진흙탕이 되어 버렸다. 

   내가 신고 있던 구두가 진흙탕에 빠져 벗겨졌다. 진흙탕 속에 묻혀버린 구두를 손으로 빼어 들고 맨발로 그곳을 빠져나온다.


  차 안으로 돌아온 나는 손에 들고 있는 그녀의 운동화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머리에서 물방울이 뚝뚝 내가 바라보는 운동화 위로 떨어진다. 도대체 안 에스더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유진 씨의 실종이 안 에스더와 연관이 있는 것인가? 그동안의 정황으로 미루어 내가 생각하던 시나리오에 예상치 못한 변수가 등장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유진씨 도대체 어디 있는 거예요?'


  차창 밖에는 어둠이 깔리고 차 안은 요란한 빗소리만 가득하다.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말처럼 세상을 살다 보면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서 예상치 못한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사람 마음을 알기란 쉽지 않다. 내가 잘 알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그런 모습을 발견하면 충격도 충격이겠지만 왠지 모를 배신감마저 들게 된다. 사실 우리 모두는 그런 모습을 감추고 살아갈 뿐 들키지 않았을 뿐이다. 그만큼 철저히 자신을 숨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선(善)과 악(惡)을 모두 가지고 살아간다. 어떤 것이 더 많이 표출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을 착한 사람 혹은 나쁜 사람이라 얘기하곤 한다. 하지만 선한 자의 마음속에도 항상 악이 존재하며 그 악은 선한 자의 연약한 부분을 비집고 튀어나온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그런 연약함을 드러내고 선과 악을 끊임없이 오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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