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 남자 시즌 2-95
"글쎄요? 유진 씨랑은 기숙사에서 자주 마주칠 일이 없어서요, 저도 요즘 설계 업무가 너무 많아서 거의 매일 야근이고 들어오면 자기 바쁘거든요, 뭐 집이 대전이라 주말엔 집에 가서 월요일 아침에 바로 출근하고 하니 거의 볼일이 없더라구요, 또 유진 씨가 말수가 많지 않아서 얘기를 많이 나눠본 적도 없어요"
"아 그렇군요, 혹시 유진 씨가 누굴 데려오고 한 적은 없나요?"
"아뇨, 항상 방에 혼자 있는 거 같던데요, 아! 근데 최근 들어 밤 늦게 자주 밖에 나갔다 오는 거 같더라고요"
유진 씨의 룸메이트에게서 그녀의 행적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찾아왔지만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듯 보인다.
"죄송한데... 유진 씨 방에 좀 들어가 볼 수 있을까요?"
"영장 들고 오셨어요?"
"예?!"
"하하하 농담이에요, 얼마 전에도 경찰들이 들이닥쳐서 유진 씨 방을 보고 갔거든요, 희택 씨처럼 이것저것 물어보고"
"아 그랬군요"
"들어가 보세요 뭐 훔치고 할 사람은 아닌 듯 하니 하하하"
그녀의 방에 들어선다. 방안 가득 그녀의 체취가 느껴진다. 기분이 편안해진다. 잠시 눈을 감는다. 그녀의 체취와 창가로 비춰 들어오는 햇살의 온기가 마치 그녀가 바로 앞에 있는 듯한 착각을 들게 한다.
"어~ 유진 씨?"
그녀의 형상이 희미하게 눈앞에 나타난다.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눈물을 흘리고 있다. 손을 뻗어 그녀에게 닿고자 한다. 그녀는 멀어진다. 난 눈을 뜨면 그녀가 사라질까 눈을 감은 채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간다. 다가가려 하면 조금씩 멀어진다. 닿지 않는다. 손끝에 잠시만이라도 닿으려 손을 뻗어 한걸음 한걸음 그녀에게 다가간다. 손가락 끝에 딱딱한 무언가가 닿은 느낌에 눈을 뜬다.
"The little prince?!"
[어린 왕자] 영문판 책이다. 책장에는 여러 가지 책들이 꽂혀있고 나의 중지 끝에 닿은 것은 우연찮게도 그 책이었다.
'너는 장미에게 바친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그 장미가 그토록 소중해진 거야'
나는 나도 모르게 조용히 그녀가 했던 말을 읊조린다. 그녀가 과거 어린 왕자 속 문구를 나에게 들려주며 나에게 적지 않은 울림을 줬던 기억(시즌2-76)이 떠오른다. 책장에서 책을 꺼내 펼쳐본다.
"헉! 이게 뭐야?"
무심코 펼쳐 든 책을 보고 화들짝 놀란다. 영문으로 인쇄되어 있어야 할 책 안은 수기로 적힌 한글과 영어가 뒤섞인 글이 빽빽하게 적혀있다.
[ 9/12, It's perfect 날씨 for flight
사장과 미국 business trip (출장)에 올랐다. 마케팅팀으로 입사 후 해외 출장이 quite a lot( 꽤 많다). 미국 출신이라서 일까 아님 같은 동문 후배라서 일까? 그가 미국 출장길에 오를 때면 항상 나를 데리고 간다. 내가 해외 마케팅 파트이긴 하지만 나의 위로 과장 그리고 부장도 있다. 그들의 영어실력도 Not bad 하다.
다른 직원들이 얘기로는 사장과 사원 둘이 출장 가는 건 내가 거의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난 그게 뭐가 이상한가 이해하지 못했지만 한국 기업문화가 그렇단다.
사장은 나에게 젠틀(gentle)하다. 나와 단둘이 있을 때면 항상 speak English 한다. 그는 회사에서 볼 수 없는 웃음과 미소를 나에게 보여준다. 그는 비즈니스 클래스이고 나는 이코노미이다. 그런데 그는 공항에서 티켓팅 할 때 나의 좌석을 비즈니스로 업그레이드해줬다. 덕분에 so comfortable하게 왔다. 역시 사장이 좋긴 좋구나]
이 책은 그녀의 일기장이다. 나는 이러면 안 되는 줄 알지만 멈출 수가 없다. 반쯤 열려있는 방문을 돌아보고 조용히 방문을 닫고는 다시 일기장을 들여다본다.
[10/10, 날씨 is pretty good for picnic
미국의 전시회 참가차 샌프란시스코에 홀로 business trip을 왔다. 사장도 지금 이곳에 있다. 그는 회사 직원들의 눈치 때문인지 나를 데리고 출장 가는 것을 피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가 미국 출장을 가면 나는 그보다 며칠 전 or 며칠 후 출장 일정이 잡힌다. 출장일정이 overlabe(겹친다) 된다. 사장에게서 text message가 왔다. 모교인 스탠퍼드 Univ(대학)에서 만나자고 한다. 그와 모교에서 만났다. 그와 학교 식당에서 햄버거를 먹고 캠퍼스를 거닐며 과거 대학시절을 떠올린다. 그가 말했다. 나와 있으면 좋다고 그의 눈빛이 serious(심각)하다. 무언가가 잘못되어 가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10/11, 비가 내린다 like my mind.
사장이 밤에 나의 숙소로 찾아왔다. 그는 술에 약간 취한 듯한 모습으로 문앞에 서 있다. 그는 나에게 써든리(suddenly) 키스를 하려 한다. 나는 순간 팔꿈치로 그의 얼굴을 hit 했다. 그는 내가 태권도 유단자인 줄 몰랐을 것이다. 그는 균형을 잃고 스러지며 얼굴을 거친 벽면에 부딪치고는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순간 임베레스(embarrass)한 나는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의 얼굴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를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얼굴을 소독하고 약을 발라주었다. 거즈로 상처를 덮어주고 나니 그가 said sorry 했다. 나도 I said sorry too 했다.
사장은 자신의 long stroy를 들려준다. 그는 자신이 아닌 모습으로 사는 게 너무 힘들다고 한다. 아버지인 회장의 기대가 그에게는 shackles(족쇄) 같단다. 그는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를 안아준다. 내가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알 수 없는 Sympathy(동정)가 느껴졌다.
그가 안정을 되찾았을 즈음 나는 그에게 말했다. 회사를 다니기 힘들겠다고 그는 제발 떠나지 말라고 얘기했다. 앞으로 이러지 않겠다면서 그럼 나는 그와 같이 있지 않게 해달라고 얘기했다. ]
[12/12, 대구는 덥기만 한 줄 알았는데 춥기도 totally cold (너무 춥다)
인사팀으로 appointment(발령)가 났다. 그는 내가 했던 부탁을 반만 들어줬다. 둘이 있는 시간은 없지만 그의 사무실을 가는 길목에 있는 인사팀으로 나를 옮겨놓고 출퇴근 때마다 나의 책상 앞을 지나간다. like(마치) 길거리에 떨어진 ten 센트짜리 동전을 바라보듯 무심한 표정으로 한 번씩 쳐다보고는 지나간다.
기분이 not so good(그리 좋지 않다). 그렇다고 이젠 회사를 그만둘 수도 없다. 내가 바라보고 싶은 사람이 회사 안에 생겼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을 보고 싶으면 싫은 사람도 보는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게 세상 살이 아니겠는가. ]
그녀의 마지막 문장에 나의 가슴이 울컥함을 느낀다. 나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글썽인다.
누군가를 사랑하지만 상대방의 사랑을 확인할 길이 없다. 고백이란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만 위험을 회피하고 싶은 것도 사람 마음이다. 상대방도 모두 내 맘 같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게 아니라면 고백으로 그나마 같이 할 수 있던 시공간마저 사라져 버릴 수 있다.
기쁘다. 그녀도 내 맘과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