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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Apr 18. 2021

가면이 내가 된다

[트렌드 코리아 2021] 김난도 외 8인

당신은 몇 가지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만약 당신이 한 가지의 얼굴(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당신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한 가지의 일관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관된 정체성만 가지고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것은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더 피곤하거나 난처할 수 있다.


  현실의 자신의 모습과 이상(理想)의 자신의 모습과의 괴리가 서로 다른 자아를 만들어 간다. 현실에서의 초라함은 다른 세상의 화려함으로 위안을 받는다. 코로나19 이후 급속히 변해가는 삶의 모습이 어색하다. 서로 모여 앉아 눈을 마주 보고 살을 맞대고 같이 밥을 먹으며 삶을 나누는 모습은 이제 시대를 역행하는 것이 되어버린 걸까?


  먼 타국 생활 속에서도 모국의 소식에 귀를 기울인다. 급박하게 변해가는 한국사회와는 달리 느림이 일상이 되어버린 이곳에서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한국의 트렌드 변화는 적잖은 충격과 자극을 준다. [트렌드 코리아 2021] 언제 돌아갈지 모를 모국의 트렌드를 놓치지 않으려 집어 든 책이다. 예상했던 데로 신선한 충격과 자극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어 내려간다. 책 속에는 올해 한국의 여러 가지 트렌드 변화를 얘기한다. 그중에서 나에게 가장 신선한 공감을 불러일으킨 '멀티 페르소나'에 대해 얘기해 볼까 한다.


  '겉 다르고 속 다르다'라는 말이 있다. 인간의 이중적인 태도를 비난하는 말로 자주 사용되곤 했다. 옛날에는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빴다. 이제는 당연한 말이 되어버린 것 같다. 겉과 속이 같으면 다른 이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시대에 뒤쳐지는 매력 없는 인간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진리(眞理)인가 순리(順理)인가


  진리(眞理)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진리를 따르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은 끊임없는 변화를 요구한다. 마치 중국의 변검(變臉: 가면을 계속 바꿔가며 진행되는 경극)처럼 이중삼중 혹은 사중으로 수시로 자신의 모습을 바꿔가며 살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세상이다. 많은 가면을 가진 자가 더 많은 인기를 얻는다. 그것이 세상의 순리라 되어가는 것 같다. 변함없이 한결같은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위험한 일인지 모른다. 가끔씩 헷갈린다. 무엇이 진리인지... 또 내가 아는 것이 진리인지... 또 진리를 따르는 것이 맞는 건지... 아님 세상이 요구하는 순리(順理)를 따라가야 하는 것인지...


내가 만드는 나


  현실 속 자신의 모습과 이상(理想)의 자신의 모습과의 괴리가 서로 다른 자아를 만들어 간다. 현실에서의 초라함은 다른 세상의 화려함으로 위안을 받는다. 어찌 보면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세상 속에서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가는 씁쓸한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 쳐도 빠져나갈 수 없는 현실의 굴레(가난, 질병, 차별등) 속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다른 세계 속에서 또 다른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러 개의 SNS 계정과 게임 속 아바타들 혹은 자신만의 콘텐츠(영상, 이미지, 텍스트)들을 통해서 현실 속의 나와 다른 세상과 모습을 만들어내고 그 속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코로나 19 이후 그 현상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사람 간의 접촉이 사라지고 자연스럽게 모든 사람이 온라인 세상 속으로 모여들면서 우리는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실제의 자신이 아닌 또 다른 모습의 나를 만들고 다른 이들과의 연결을 시도하고 관계를 만들어간다. 그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고 상대방 또한 그러하다.

  
  이제 우리들에게 상대방의 실체는 중요치 않다. 현재 우리에게 보이는 모습이 중요할 뿐이다. 현실 속의 상대방이 어찌 살아가던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가 보여주는 아바타와 콘텐츠가 나에게 공감을 이끌어내고 유익하다면 그걸로 족하다. 어차피 상대방은 현실세계의 나와 만날 일을 묘연하고 또 서로가 그것을 원치 않는다.


  최근 떠오른 펭수(남극 '펭'+빼어날 '수'秀)의 성별을 묻고 정체를 밝히려는 것은 꼰대 짓이라고 한다. 펭수는 보이는 그 자체의 정체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 안에 남자이든 여자이든 아이이든 노인이든 아님 외국인 혹은 범죄자든 실체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펭수가 던지는 말과 행동들이 사람들의 공감과 사이다 같은 통쾌함을 준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유산슬, 유고스타, 유두래곤, 지미유, 유르페우스, 닭터유...


    누군가가 떠오르는가? 외국에 있어서일까? 저 단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뭐 연예계에 관심이 없는 내 성향 탓도 있겠지만 책을 통해서 저 단어가 모두 '유재석'의 부캐(副 : Sub 캐릭터)라는 것을 알았다. 옛날에는 무슨 이미지 하면 누구하고 떠오르는게 연예인이었지만 이제는 연예인들도 이제 한가지 캐릭터만 가지고는 생존하는 것이 쉽지 않다.

펭수와 유재석

  [트렌드 코리아 2021] 책에선 이러한 현상을 멀티 페르소나(multi-persona)라고 얘기한다.

과거 나 또한 그러했던 것 같다. 직장에서의 나의 모습과 일상에서의 나의 모습 그리고 친구나 연인에게서 보이는 모습이 같지 않았다. 특히 직장에서는 철저히 나를 숨기고 살았던 것 같다. 현대인들이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것은 직장에서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는 시간이 길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일과 일상과의 괴리가 그리 크진 않지만(환경의 변화로 인한) 과거에는 그 괴리감이 커져갈수록 나의 정체성을 의심하고 자주 허무감이 밀려오곤 했다. 나를 위해 철저하게 나를 숨겨야 돈을 벌고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때론 나를 위해 돈을 버는 건지 돈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건지 헷갈린다. 세상이 정해놓은 길을 가야 한다. 돈을 모아 결혼하고 집을 마련하고 자녀를 양육하고 노후를 준비하기 위해 더욱더 나를 숨기고 돈을 벌기 위해 나를 희생해야만 하는 이런 삶의 굴레는 벗어날 수 없는 족쇄 같은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어쩌면 멀티 페르소나 현상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일종의 탈출구 역할을 한 것이 아닐까?


"너무 곧으면 부러지기 마련이지"


  얼마 전 같이 일하던 목수 어르신이 한 얘기가 떠오른다. 그는 얼마 전 박원순 시장의 자살 사건 이야기를 꺼내며 너무 곧고 올바른 성품이 결국 자신을 죽음으로 내몬 것이라고 말한다. 뭐 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무엇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이에겐 자신이 오랜 세월 쌓아 올린 신념이 한 번의 잘못된 실수로 무너지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沧浪之水清兮,可以濯吾缨

沧浪之水浊兮,可以濯吾足”

(맑은 물엔 갓끈을 씻고

더러운 물엔 발을 씻으면 될 뿐)


           - 屈原 <渔父词> 굴원의 어부사 중에서 -


  과거 중국의 시인이자 정치인이었던 굴원도 세상의 더러움에 자신이 더럽혀지는 것을 용납치 못하고 죽음을 선택했다. 그 모습을 본 어부가 한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때론 더러움과 부당함에 섞여 잠시 자신을 죽이고 삶이 이어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삶이 이어져야 자신의 신념도 다시 살릴 기회가 오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지탄하고 손가락질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자신이 지탄받고 손가락질당하는 것은 참지 못한다. 자신의 모습을 드려다 보기보다 타인의 모습을 바라보기에만 익숙한 한국인의 모습은 결국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간다.


  누군가는 살기 위해 자신에게 묻은 더러움과 수치심 견뎌내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세상은 그런 자에게 견디고 버틸 시간과 공간을 허락하지 않고 몰아세운다. 뭐 그런 걸 마녀사냥이라고들 얘기한다. 그런 마녀사냥 뒤에는 다른 무언가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타인의 희생을 통해 사욕을 채우는 인간들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듯하다.


  한국의 이런 냉혹한 현실이 우리가 여러 가지 가면을 쓰고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목사는 목회를 잘하고 정치인은 정치를 잘하면 되지만 그들도 목사, 정치인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 고유의 정체성을 숨기고 억압하며 살아가는 것은 고통일 수 있다. 그들도 교회의 예배시간 와 국회의 공무시간이 아닌 자신만의 시공간이 필요할 수 있다.  


"목사가 왜 저래? 정치하는 사람이 뭐 저렇게 살아?"


  하지만 대중의 시선과 세상의 고정관념은 그들을 그들의 모습으로 살게 놔두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들은 가면을 쓰고 다른 세상 혹은 어두운 곳으로 숨어 들어가게 된다. 과거에는 유명인사들만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거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일반인들도 그런 모습으로 변해간다. 씁쓸하지만 한국인의 몹쓸 관심병이 수많은 가면을 만들어내고 있다. 우리는 이것이 트렌드의 변화라고 말하지만 사실 불합리한 사회가 만들어낸 안타까운 이면이라고 볼 수 있다.


  코로나 19 이후 도래한 언텍트 시대는 더 많은 페르소나를 만들기에 최적화되었다. 얼굴을 마주 보고 듣는 음성과, 바라보는 눈빛과 표정으로 상대방에게 내가 원하는 모습을 심어주는 것은 쉽지 않다. 언텍트 세상은 가능하다. 모두가 마치 연출된 연예인이나 방송인이 되는 것이다.


   내가 만든 여러 가지 페르소나(캐릭터 or 콘텐츠) 중에 가장 많은 관심과 인기를 얻는 것이 바로 내가 되어간다.


   가면이 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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