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뜻 보면 두 단어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저 두 가지를 구분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다행히 락다운(Lock down)이 시작되기 전날 도서관에서 김영하의 단편집을 발견해서 대여했다. 2주간의 락다운 기간 평소 못하던 독서 삼매경에 빠져본다.
편지 형식으로 쓰인 소설 [오직 두 사람 - 오영수 문학상 수상작]은 딸과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고지식한 아버지의 철저한 보살핌 속에서 자라온 딸은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믿고 아버지 또한 자신이 생각대로 만들어가는 딸의 모습에 강한 애정 아닌 집착을 보인다.
작가는 소설 첫 부분에 그 둘의 모습을 세상에서 모국어를 쓰는 유일한 두 사람으로 묘사한다. 모국어를 쓰는 사람이 아버지와 딸 둘이다. 외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외국에서 삶을 영위할지라도 외국어보다는 모국어를 쓰는 사람을 찾고 그들과 생활하려 한다. 그 이유는 외국어로는 접근할 수 없는 감정과 그 표현하기 힘든 터치가 모국어로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버지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지금 유일한 모국어 소통자의 죽음을 눈앞에서 담담하게 지켜보고 있다.
그녀가 슬픔에 잠긴 모습이 아닌 담담한 모습으로 비치는 건 그의 죽음 앞에서 그녀가 살아온 삶이 그의 보살핌이 아닌 길들여짐임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보호하고 가둬두는 울타리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라난다. 연약한 아이는 마치 초원에 풀어진 어린양처럼 위험하다. 울타리가 필요하다. 부모가 지켜볼 수 있는 울타리 안에서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몸집도 커지고 스스로를 추스를 수 있을 때가 되면 부모의 울타리를 벗어나 학교라는 울타리 그리고 사회라는 더 큰 울타리로 나아가야 한다. 때로는 이 울타리를 부수고 또 다른 세계로 나가갈 필요가 있다. 울타리를 벗어나면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곳에는 또 다른 기회와 지금껏 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 수 있다. 울타리를 벗어나 내가 머물렀던 울타리 속을 드려다 보면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주인공은 마흔이 넘도록 아버지라는 울타리를 넘지 못했다. 다른 가족들이 모두 아버지 곁을 떠나도 그녀는 그의 곁에 남아있었다. 다른 이들이 뭐라고 해도 믿지 않았다. 아버지만이 자신과 모국어로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가 떠난 지금 그녀는 양 떼들이 모두 떠나가 버린 울타리 안에 홀로 남겨졌다.
울타리는 지켜주는 동시에 가둬두는 것이다. 누군가가 친절하게 울타리를 열어주지 않는다. 울타리를 뛰어넘든 박차든 기어가든 스스로가 빠져나가야 한다. 새가 힘겹게 알을 깨고 나오듯 고통과 시련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 고통이 싫어 알에 갇혀 있으면 편안하게 죽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는 가정과 학교 혹은 기업과 국가라는 울타리가 자신을 지켜줄 것이란 강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부모의 사랑과 학교의 가르침, 기업과 국가의 책임과 통제 속에서 자신은 보호받고 성장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독립적인 존재이다. 가정과 학교 기업 그리고 국가 또한 그런 독립적인 존재가 만들고 움직이는 집단이다. 다른 독립적인 존재가 만들어놓은 울타리에서 그들의 생각과 가치관만을 링거 바늘에 꽂힌 채 주입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만약 그것이 영원하고 불변하는 진리라면 천만다행이겠지만 그렇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기에 우리는 다른 세계로 나아가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 여러 가지를 경험하면 비교평가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우월을 가리기 힘들다면 내가 끌리고 좋아하는 곳으로 가면 그만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런 울타리를 넘나드는 기회를 가지기 쉽지 않다. 아니 가지려 하지 않는 것이 맞을 수도 있겠다. 익숙함은 편안함을 가져오고 편안함은 안정감을 가져다준다. 그 유혹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The greatest risk is the risk of riskless living"
[위험 없는 삶이 가장 위험한 것이다]
- 스티븐 코비 -
작가는 자칫 아름답게만 보일 수도 있는 아버지와 딸의 사랑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뭐 세상을 아름답게만 보는 단순한 작가라면 이 소설을 [Happily ever after with Dad] (그 후로 아빠와 영원히 행복하게...)처럼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랬다면 소설이 아니라 동화가 되었을지도... 물론 상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보통 세상의 단면만 보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건 마치 일차원의 평면 같은 삶을 사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3차원, 아니 이제 4차원이라고 보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 4차원의 복잡 다양한 세상에서 한쪽만 보고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를 세상에 있게 해 준 신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다.
아름다움 뒤에 감춰진 추함을 볼 줄 알고 추함 뒤에 가려진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