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죽음] 읽고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문구이다. 내가 번역을 했다면 소설을 상상으로 신문을 사실로 바꾸었지 않았을까?
요즘 세상에는 수많은 팩트(사실)들로 넘쳐난다. 각종 뉴스와 유튜브 그리고 SNS 등의 매체에서 떠들어대는 수많은 사건 사고들로 왈가불가 난리 법석들이다. 우리는 이목을 끄는 수많은 사실들 뒤에 가려진 다른 것들 볼 수 없다. 발생하는 일련의 사실들이 진실을 감추려는 의도로 행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사실과 현상에만 집중하다 보면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들을 놓칠 수 있다.
내가 소설을 쓰고 좋아하는 이유도 작가처럼 그런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허구를 만들어내다 보면 그 속에 진실을 숨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독자는 알 수 없지만 작가는 알고 있는 진실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작가가 믿고 싶은 진실이다. 나의 믿음이 모든 이와 공감될 수 없기에 허구 속에 섞어 넣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공감하길 바라며... 그런 독자를 찾기 위해 오늘도 글을 쓰는 것이다.
"나는 나와 생각이 같지 않은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나와 생각이 같은 이들에게 혼자가 아님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해 말하는 것이다."
- 베르나르 베르베르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중에서 -
소설가는 허구를 핑계 삼아 진실을 얘기할 수 있다. 나중에 그것이 진실이었든 거짓이었든 아무 상관없다. 왜냐 소설은 허구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소설가는 면책 조항을 가지고 글을 쓴다. 그래서 무궁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현실에 얽매여 있는 현대인들의 상상력이 죽어가는 것은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데는 면책 조항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했던 말과 행동들은 모두 내가 책임져야 할 몫이다. 당장 맞닥뜨린 현실을 인지하고 헤쳐나가야 하는 사람들은 근거 없는 허구와 상상보다 논리와 계산에 맞는 말과 행동으로 이해관계를 따지기에 바쁘다.
"나는 왜 죽었지?"
소설은 주인공 가브리엘 웰즈라는 한 소설가의 죽음을 시작으로 전개된다. 죽음 뒤의 사후세계가 존재하고 유령이 된 주인공은 생(生)과 사(死)의 서로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영매((靈媒) 뤼시를 통해 자신의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사후 세계가 인상적이다.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사후세계는 어떻게 만들어 낸들 아무 상관이 없다. 현실이 배경이 아니기에 상상에 그 어떤 제약도 없다. 덕분에 저자는 역사 속의 유명한 인물들을 소설 속으로 끌어내어 그들의 입으로 자신의 소리를 내고 있다. 정말 기발한 아이디어다. 그들이 했을 법한 말을 나의 뇌를 거쳐서 표현함으로써 나의 생각에 한층 더 설득력을 배가할 수 있다. 나도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써먹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내가 보기에 최고의 은퇴는 바로 죽음이야"
- [죽음] 중에서 -
소설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 중 하나는 주인공 가브리엘의 할아버지 대화이다. 유령이 되어 만난 주인공과 할아버지의 대화 속에서 죽음에 대한 적지 않은 고민을 하게 된다.
삶은 고통의 시작이고 죽음은 해방이다. 아기가 태어날 때 우는 것은 슬픔과 고통이 시작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어린 시절 증조할머니의 임종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새벽녘에 동이 트기 전 방 안에서 대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시던 할머니의 표정은 평안했던 걸로 기억한다. 왜냐하면 터져 나온 가족들의 곡소리에도 나는 증조할머니가 여전히 자고 있는 줄로만 알았기 때문이다. 영면(永眠)의 순간이 어쩌면 삶과 육신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삶과 죽음, 현실과 허구(상상), 과학과 문학 그리고 영매(연결)
소설을 다 읽고 내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들이다. 저자는 삶과 죽음을 통해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얘기한다. 같은 곳에 뿌리를 두었지만 서로 다른 과학자인 쌍둥이 형(토마)과 소설가인 동생(주인공)은 영매인 뤼시를 통해 서로 연결된다. 화학과 물리로만 세상을 설명하고 분석하는 그의 형은 동생을 통해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되고 그 세계와 닿고자 한다.
우리는 현재의 삶만 바라보며 눈에 보이는 것들(돈과 물질)의 노예가 되어가지만 사후 세계에선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곳에서는 나폴레옹도 코난 도일도 그냥 옆집 친구처럼 만날 수 있는 곳이며 부도 명예도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곳일 뿐이다.
"타이타닉은 공부를 한 엔지니어들이 건조했지만 노아의 방주는 독학자가 만들었어요"
- [죽음] 중에서 -
과학은 항상 실패를 거듭하며 발전해 나간다. 그 실패에는 적지 않은 희생이 따른다. 그 희생양이 내가 될 수도 있다. 이제 과학의 실패는 돌이킬 수 없는 희생을 가져올지도 모른다.
과학기술은 문명의 발전을 가져왔지만 인간과 인간을 멀어지게 만들고 자연을 황폐화시켰다. 부를 창출하는 과학은 자본과 함께 세상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지만 인간의 상상과 내면 들여다보는 문학은 상대적으로 소외받았다. 과학은 무언가를 계속 발견하고 발명해내면서 발전하지만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풀리지 않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숫자와 증거를 통해 증명해야만 하는 과학은 칠판에 풀이되지 않는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저자는 죽음과 상상 그리고 문학 속에서 궁극적으로 인류가 이루고자 하는 답을 발견할 수 있음을 얘기한다. 현실과 현상에만 집중하는 눈으로는 찾을 수 없다. 죽음이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고 상상과 허구가 삶을 풍족하며 문학이 삶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단절된 두 세계가 연결되지 않음으로 세상은 피폐해져 간다.
이 세상에는 설명하기 힘든 복잡 미묘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상상을 통해 만들어낼 수 있다. 신이 만들어 놓은 계획과 일치할 수 있는 길은 의외로 엉뚱한 상상과 꿈속에서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신은 우리가 설마 하는 곳에 만물의 이치를 숨겨두었을 수도 있다. 한쪽으로만 치우쳐 달려온 세상은 파멸과 종말의 길로 치닫고 있다. 최근 일어나는 자연재앙들과 각종 바이러스들은 분명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믿어 의심치 않다. 세상의 중심이 인간이라 믿고 과학과 기술을 통해 세상을 지배하려는 욕심이 화를 불러오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더디 가더라도 세상에 숨겨진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저자는 왜 죽었을까로 시작해서 결국 나는 왜 태어났을까로 귀결되는 의문을 독자에게 던져주는 듯하다. 우리 모두는 분명 각자의 소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누군가는 과학을 누군가는 문학을 탐구하며 누군가는 신을 쫓는다. 하지만 자신이 향하는 곳이 전부가 아니다. 다른 곳을 들여다보고 이해하면 새로운 것이 보인다. 그곳에 내가 알고자 했던 답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소통과 공감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기발한 상상력과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통찰력에 다시금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전에 그의 [고양이] 소설을 통해서 느꼈지만 세상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생각하는 그의 엉뚱한 도전들이 많은 것을 깨닫게 한다. 그는 이번에 죽음이라는 삶의 반대편에 서서 인간을 바라보며 많은 의문을 던져준다. 소설 마지막의 예상치 못한 반전의 결말에 그의 지식과 지혜 그리고 통찰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지식과 사실들 속에서 허우적대며 무엇이 진실이고 중요한 것인지를 잊어버리고 사는 건 아닐까? 내가 얻고자 하는 것들은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곳에 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