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가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고 말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나에게 가르쳐주었을 뿐이다."
- 카뮈의 [이방인] 중에서 -
사람을 죽이고도 그것이 죄인지 모른다는 말은 일반인이 받아들이기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표면적으로만 봤을 땐 소시오패스 같은 정신적인 질환을 가진 자들에게서나 나올 법한 말이다.
호주의 노동절 연휴 동안 실존주의 작가 카뮈의 [이방인]을 읽었다. 최근 읽은 여러 책에서 [이방인]에 대한 소개와 극찬으로 꼭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단단히 마음을 먹고 읽어 내려간 고전이었다. 기대를 많이 해서인지 시작부터 무미건조한 소설의 전개는 적지 않은 인내심을 필요로 했다. 번역의 문제인가 아니면 원래 소설이 그런 것인지 재미로 읽어내려가는 소설은 아닌듯 느껴졌다.
어렵다.
이 소설을 읽고 난 후 첫 소감이다. 소설 속에 뭔가 작가의 깊고 심오한 철학이 숨어져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난해한 내용은 독자로 하여금 쉽게 소설 속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없게 만들었다. 시작부터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주인공 '뫼르소'의 말과 행동 그리고 무미건조한 전개는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흥미라는 요소를 찾아볼 수 없었던 것 같다. 요즘 같이 신선한 소재와 설정 그리고 흥미등을 두루 갖춘 소설(웹소설)과는 동떨어진 느낌이다. 즉각적인 흥미에 목마른 요즘 독자들을 끌어들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잘 모르겠다."
- [이방인] 중에서 -
엄마의 부고 소식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의 첫 문장은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매우 유명하다. 수많은 다른 책들 속에서 인용되고 또 인용되어 나 또한 너무 익숙하다. 사실 이 첫 문장이 품고 있는 함축적인 뉘앙스가 뒤에 전개되는 소설의 전개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도 한다. 마치 어머니의 죽음을 남일처럼 말하는 주인공의 저 대사 한 마디가 자신에게 가져올 비극적인 운명의 서막이었는지도 모른다.
따뜻한 봄날의 햇살 아래 공원 벤치에 앉아 몇 번이나 졸음을 쫓아가며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졸음으로 이야기가 끊기며 여러번 앞으로 돌아가 다시 맥락을 이어가면서 처절하게 읽어 내려갔다. 나의 이런 노력이 가상했던지 마침내 소설의 후반부 사형판정 후 주인공의 묘사에서 조금씩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생각을 조금씩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보다 회사에서 어머니의 부고로 휴가를 내는 것에 대해 더 큰 고민을 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읽는 독자로 하여금 주인공이 평범하지(이상한) 않다는 생각을 심어준다. 엄마의 시신을 확인하지도 않고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얻어 마시는 모습에서 주인공의 슬픔을 전혀 감지할 수 없다. 뒤이은 여자 친구와의 정사, 건달 무리 친구들과의 어울림 등 부모의 죽음뒤에 바로 이어져서는 안 되는 부적절한 행위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주인공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만든다. 그리고 발생하는 우발적인 총기 살인 사건으로 주인공의 재판이 진행된다.
"도대체 피고는 어머니를 매장한 것으로 기소된 것입니까, 살인을 한 것으로 기소된 것입니까"
- [이방인] 중에서 -
이상하게도 재판은 총기사건이 아닌 그 이전에 발생한 일들을 엮기 시작한다. 피고인 뫼르소는 재판에서 철저히 배제된 채 그의 총기 살인에 대한 단죄는 마치 판검사와 변호사 그리고 배심원들이 그럴듯한 한 편의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그들은 마치 창조주인 것 마냥 그의 죄를 심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단편적인 살인사건이 주인공 삶의 다른 부분들을 끌어들인다. 마치 단편 소설을 장편 소설로 바꾸며 죄를 더욱 부풀리고 뫼르소 전체의 삶을 부인하는 상황을 만들어 간다. 주인공은 결국 비인간적이고 냉혈한 짐승 같은 이 시대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존재로 낙인되고 사형을 선고받는다.
보통 소설을 읽고 나면 밀려드는 감동 혹은 깨달음 아니면 혀를 내두르는 반전 같은 것은 없었다. 읽고도 개운하지 않은 찝찝함이 남아있다. 석연치 않은 내용의 이해도를 높이려 찾아본 해설서와 다른 이들의 서평을 읽고 난 후에야 작가 카뮈가 드러내고자 한 의도를 어느정도 소화할 수 있었다.
존재인가 본질인가
실존주의 작가 카뮈의 소설을 이해하려면 실존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가끔씩 왜 사냐는 질문을 할 때가 있다. 그 말은 인간은 살아가는 이유에 대한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의 존재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언제나 다름없는 일요일이었다. 어머니는 이미 매장되었다. 나는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이방인] 중에서 -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모르고 그냥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자신의 소명(召命)이 무엇인지 보다 당장 내일 출근을, 내일 먹을 양식(생계)을 걱정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사실 카뮈가 소설 첫 부분에 어머니의 죽음과 회사 휴가를 고민하는 부분은 인간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그런 고민을 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부모의 죽음으로 일상이 무너져 내려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부모가 죽어도 나는 계속 먹어야 하고 잠도 자야하고 다시 출근해야 하며 자녀들을 돌봐야 한다. 주인공은 다만 그런 일상적인 것에 더 많은 시간과 의미를 둔 것처럼 묘사되었을 뿐이다. 어찌 보면 처절하게 현실적인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주인공의 본질(의미)을 찾으려고만 했을 뿐 뫼르소의 존재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데는 인색하다. 뫼르소가 뭔가 원대한 혹은 남다른 뜻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그래야만 소설 속에서 뭔가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카뮈는 그런 독자들의 뒤통수를 후려 갈기는 형국이다. 나 같은 사람도 있듯이 그냥 저런 사람도 있는 것이다. 의미나 본질보다 존재가 더 중요하다.
주인공의 존재는 과거 주인공의 모든 것을 다 드려다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현재의 자신은 과거의 축적이 만들어 낸 것이다.
"어머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우리는 이미 서로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었고, 또 누구에게도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으며, 우리는 각기 새로운 생활에 익숙해져 버렸다고 대답했다"
- [이방인] 중에서 -
이 대사처럼 주인공의 부모와 애정관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동화 속의 그것과는 다를 수 있다. 모든 이들이 보고 듣고 배운 데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과연 누가 정해놓은 것인가. 그런 규칙 혹은 관념들이 선과 악을 구분 짓고 죄와 벌을 만들어 낼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은 서로의 존재를 부인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웃긴 건 타인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부인하며 살아가면서도 결코 자신의 존재가 부인당하는 것은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작가는 모든 존재는 그 존재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 것이다. 그 존재의 가치는 타인이 평가하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는 다수의 존재를 위협할 수 있다는 근거를 만들어 소수를 제거하고 부인하며 존속해 왔다.
잔인하지만 그것이 사회가 존속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인류의 역사는 타인의 존재를 부인하며 전쟁과 살육을 자행하면서도 그것의 정당성을 끊임없이 주장해 왔다. 아이러니하게도 한 두 명을 죽이면 살인자이지만 수천수만 명을 죽이면 영웅이 되는 것이 인간이 말하는 역사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르네 데카르트 -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본 말일 것이다. 이성주의 합리론의 선구자인 데카르트의 이 말은 실존주의 입장으로 바꿔 말하면 "나는 존재한다 고로 생각한다"로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본질이나 이성적인 판단보다 앞서는 것은 존재의 의미라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그 실존에 가치가 있으며 인간이 추구하는 진리나 윤리 같은 보편적인 가치는 결국 사회와 국가 혹은 특정 집단의 존속과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얘기한다.
"나는 내가 배운 긴 역사를 부정했다. 사람들은 나를 속였다. 오직 악의의 지배만이 빈틈없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속였다. 진리는 네모지고 무겁고 짙은 것이다. 진리는 뉘앙스를 갖고 있을 수 없다."
- 카뮈의 [배교자] 중에서 -
카뮈는 '뫼르소'라는 그 시대에 보편적이지 않은 인물을 소설 속 주인공으로 등장시킴으로써 세상이 그에게 반응하는 모습을 소설 속에 그려냈다. 그냥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이며 충실하게 살아가는 인간이 다른 인간들에 의해 존재의 의미가 상실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인간 사이의 윤리와 신과의 관계(무신론자)를 부인하는 뫼르소는 단순 우발적인 총기사고로 판결될 수 있는 사건(당시 식민지 알제리의 시대 배경상 프랑스인(뫼르소)을 우대하는 분위기)을 냉혈한 살인마가 되어 사형을 판결받는다.
글의 첫 문장 주인공의 대사가 가슴 깊이 남는 것은 죄라는 것은 결국 자신이 짓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서 안겨 준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말하는 경전 속의 말이 무색하게 죄인들이 죄인을 만드는 것이다.
"내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 [이방인] 중에서 -
소설의 마지막 주인공의 대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도 연결되어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만인의 죄를 짊어지고 죽음을 맞이하는 예수도 결국 다수의 생각과 이익에 의해 희생된 것이다. 주인공 뫼르소 또한 만인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예수를 바라봤듯이 자신의 죽음을 지켜보며 그들의 죄를 바로 볼 수 있길 바랬는지 모른다.
책을 읽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소설 속에 품고 있는 내용이 너무도 무거운지라 이해도 해석도 감상도 쉽지 않다.
알베르 카뮈 (1913.11.7 ~ 1960.1.4) 세상에 쓸모없는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현재 자살 공화국에 살고 있다. 한국은 세계 1위의 자살률을 자랑한다. 며칠 전 세계 1위를 차지한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서평 참조)을 보면서 우리는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다른 것에서 찾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드라마 속 주인공 기훈의 모습은 마치 인생의 낙오자 혹은 쓸모없는 인간으로 비친다. 극 중 빚과 함께 삶의 벼랑 끝에 선 자들은 세상이 정해놓은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 자신을 비관하며 목숨과 돈을 바꾸는 죽음의 게임에 자신을 내 던진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부조리를 바꾸려 저항하기보다는 그 부조리 안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칠 뿐이다. 그 과정 속에서 타인을 죽이기를 정당화한다.
우리가 이 드라마에 열광하는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게임 속에 잘 녹아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타인의 존재를 부인하는 죽음의 게임 속에서도 타인을 존재의 소중함을 깨닫는 인간애를 그려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드라마는 사회에서 쓸모없던 한 인간이 끝내 승리하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남겨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시대의 백수실업자이자 도박중독자, 불효자, 무능한 아빠로 점철되던 한 인간도 존재할 가치가 있다.
우리는 소설의 제목처럼 '이방인'되지 않으려 부단히도 섞이고 순응하며 살아간다. 카뮈는 아마도 '뫼르소'라는 한 이방인(낯설고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을 바라보며 경멸을 일으키는 독자들의 모습을 상상했을 것이다. 부조리와 시스템에 길들여진 인간들(판사, 검사, 변호사 그리고 배심원)의 모습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써내려 갔을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무리 속에 섞여 누군가를 단죄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살아오고 살아가는 방식에서 벗어난 다른 존재(이방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매일 누군가를 죽이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이 소설이 아직까지도 세상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여러 책과 글 속에서 계속 회자되는 것은 아마도 인간이 버릴 수 없는 사악한 본성을 자신도 모르게 발견하게 하는 소설의 신박한 구성과 세상의 부조리를 함축적으로 잘 그려냈기 때문일 것이다. 이방인이 되지 않으려 존재의 이유를 찾아 하염없이 방황하는 이 시대의 인간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소설이다.
우리는 존재하는 이유를 찾기보다 존재의 소중함을 먼저 알아야 한다.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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