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 보면 어린 왕자가 계속 반복하는 말과 행동이 있다. 어린 왕자는 끊임없이 질문한다. 귀찮을 정도로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주인공과 책 속의 다른 어른들과의 오고 가는 질문과 대답 끝에 항상 저 말을 한다.
어린 왕자, 더군다나 다른 별에서 온 어린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어른들의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나 또한 어린 시절 이해할 수 없었던 어른들의 말과 행동을 지금 내가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섬뜩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어린 시절 한 번쯤 읽었던 기억이 있지만 기억나는 것이라곤 귀가 유난히도 큰 사막여우와 모자처럼 생긴 이상한 그림 그리고 긴 망토 같은 코트에 노란 목도리를 두른 귀여운 어린아이의 모습만 떠오를 뿐이다. 그땐 그랬다. 그 책이 꼭 읽어야 할 필독서에 베스트셀러라는 이유로 내 주변에 심심찮게 눈에 띄었고 읽는 척은 해야 하는 것이었기에 책 속의 그림만 보고 넘겼던 기억이 난다.
중년의 아재가 된 지금 다시 읽은 어린 왕자는 시리 듯한 아픔과 먹먹한 안타까움에 사무치게 된다. 책 속의 어린 왕자와의 대화 속 한마디 한마디가 깊은 여운을 남긴다.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세 시부터 벌써 난 행복해지는 거야] - [어린 왕자] 중에서 -
어린 시절 남중에 남고까지 6년이라는 시간을 수컷들 속에서만 파묻혀 살았다. 음양을 조화가 깨어진 삶은 균형을 이루기 위한 방법을 찾기 마련이다. 못 이기는 척 친구의 꼬임에 따라간 교회에는 암수의 조화가 이루어진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질풍노도 시기 수컷들만 모인 곳은 이맛살을 구기며 온갖 욕과 음담패설이 난무하지만 만약 그곳에 예쁜 꽃들이 섞이면 미소와 평화가 찾아든기 마련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시고 불완전함에 하와를 만드신 건 그런 이유에서였지 않을까? 뭐 어쨌든 난 성경과 찬양 속의 하나님의 복음보다는 교회의 어느 한 자매의 미소에 빠져들었고 매주 일요일 아침이면 거울 앞에서 여르름으로 뒤덮인 나의 얼굴을 바라보면 한 숨 지으며 얼굴이 안되면 옷빨이라도 세워보려 이 옷 저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며 애꿎은 어머니께 옷 투정을 하다 매질을 당할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히 기억남는 건 교회를 가기 한 시간 전부터 나의 심장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누군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분명 행복의 시작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른이 되어가면서 그런 순수한 관심과 애정은 조금씩 사라져 간다. 상대방에 대한 관심은 이해관계없이는 생겨나지 않는다. 그런 관심도 이해관계가 없어지면 같이 사라진다.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관계 속에서만 싹트는 관심과 애정에 익숙해져 가고 순수했던 관심과 애정은 쓸모없고 어리석은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저 여자애는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생각을 하는 아이일까?"가 아닌 "저 여자는 나에게 무얼 해줄 수 있을까? 내가 저 여자를 만나면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일까"를 먼저 생각하게 한다. 그건 비단 남녀관계만이 아닌 모든 어른들의 세계 속에서 만연해져 있다.
"그 뭐 돈도 안 되는 거 해서 뭐할라꼬?"
친구 중에 입버릇처럼 이런 말을 내뱉는 친구가 있다. 어린 시절 돈도 안 되는 친구가 불량배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맞는 것도 나눠 맞으면 좀 덜 아프지 않긋냐?"며 그들한테 같이 맞아주며 서로 엉망이 된 얼굴을 바라보며 웃던 친구였다. 이제는 바쁘다며 만나는 것은커녕 전화 통화도 힘들 정도이다.
[사람들은 이제 무얼 알아 갈 시간도 없이 살지. 그들은 상점에서 다 만들어진 걸 사니까. 하지만 친구를 파는 상점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제 친구가 없는 거야]
- [어린 왕자] 중에서 -
우리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을 업신여긴다. 만약 내가 돈이 많고 지위가 높고 권력이 있다면 내가 찾지 않아도 나를 찾는 사람은 넘쳐날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화려하고 멋있고 비싼 것에 환호하고 열광하며 그것들을 쫓기에 여념이 없다. 그곳에 열정과 시간을 쏟아붓는 사이에 소중한 것들을 잃어감을 알지 못한다. 돈과 물질을 잃어감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 감성과 상상을 잃어감을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그렇게 얻은 세간의 관심은 가진 것이 사라질 때 같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더욱더 그것들을 부여잡게 된다. 허영과 위선으로 계속 자신을 포장한다. 결국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지 않을까?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 [마태복음 25:40] -
성경에는 가난하고 굶주린 자들을 대하기를 하나님 대하듯이 하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가난한 자와 굶주린자들과 같이 하면 그들처럼 될 것이라 생각하여 그들과 멀리하고 가진자와 이름 있는자들을 선망하고 추종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자신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 줄 것이라 생각한다. 마음의 빈곤이 그들에게 찾아옴을 알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눈으로 보는 게 아니야]
- [어린 왕자] 주에서-
순수한 아이의 눈은 감성과 상상으로 가득 차 있다. 아이들은 누군가가 울면 같이 울음보를 터뜨린다. 공감하는 것이다. 감정을 공유한다. 그리고 보이는 것 너머에 것들은 생각하고 만들어내는 엉뚱하지만 기발한 생각을 한다. 눈으로 들어온 것을 마음으로 가져간다. 하지만 우리는 눈으로 들어온 것을 머리로 가져가기 바쁘다. 숫자를 보며 부모와 친구의 생일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통장잔고가 얼마인지 최근에 오른 집값이 얼마인지가 먼저 떠오른다.
[만일 네가 날 길들이면 너와 난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 거야...]
- [어린 왕자] 중에서 -
우리는 보이는 곳에만 시간을 쏟는다. 외모와 통잔 잔고와 나의 명함 속 직급에 모든 시간을 쏟아붓기에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집 앞에 핀 들꽃에 관심을 가지고 시간을 쏟아붓는다면 그것이 소중해질 수 있다. 무엇에 시간을 바치느냐가 소중함의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과 물질을 얻는데 시간을 쏟아붓는 시간 동안 세상은 많은 것들을 잃어왔다. 그것들이 소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 [꽃] 중에서 -
사소하지만 지속적인 관심을 받은 것은 무엇이든 언젠가는 소중한 존재로 바뀌게 되어있다. 우리는 돈과 물질에만 집중하는 삶에 익숙해져 그 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알아가는 시간의 소중함을 알지 못한다. 물질이 쌓여갈수록 마음이 공허해지고 그 공허함이 물질이 부족해서라 생각해 더 많은 물질을 채워 넣으려 한다.
호주에 온 뒤로 보지 못한 것들을 보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돌아가던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사색을 즐기고 집 앞 벤치에 앉아 하릴없이 햇살을 쬐는 행복함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일을 하지 않아 벌지 못한 돈을 안타까워하기보다 지금 누릴 수 있는 여유를와 빠져드는 상상으로 글을 쓸 수 있는 것에 감사하는 삶을 느끼게 되었다. 이해관계를 완전히 벗어날 순 없겠지만 순수한 관계를 회복하려 한다. 서로 한 주의 삶을 얘기하고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누며 마음의 피로를 녹일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 가고 있다.
배운 어른들이라는 정치인과 기업인이 지지율이 떨어지고 경제가 무너짐을 걱정하며 다시 바삐 돌아가는 세상을 만들려 하지만 그 속에서 회복되는 것들에는 관심이 없다. 온통 경제 위기와 바이러스의 공포로 사람들을 선동하기만 한다.
그렇게 어른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쫓아간다.
동심(童心)은 어른이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을 잃어버린 어른들이 만들어 가는 세상은 삭막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