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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Mar 06. 2022

남녀 갈라짐의 기원?!

[인생 학교 - 섹스 편] 알랭 드 보통  - 두 번째 이야기 -

최초 남녀의 헤어짐은 섹스 때문이었다?!


  무슨 말인지 의아할 것이다. 우리는 태초의 남자와 여자를 생각하면 누구를 떠올리는가? 아마도 아담과 하와(이브 : 영문명칭) 일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흙으로 남자인 아담을 빚으시고 그의 갈빗대를 하나 떼어내어 여자인 하와를 만들었다고 되어있다. 하지만 아담에겐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또 한 명의 여자가 있었다.


  아무래도 한국인에 정서에는 자극적이고 은밀한 내용이 잘 먹히는 모양이다. 얼마 전 썼던 서평 [피스톤 운동의 목적_ 거꾸로 섹스]이 업로딩 된 이후 지금까지 연일 최고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인간은 고상한 동물인 것 같지만 숨겨진 내면은 고상하지 않은 것들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섹스에 관한 글이 이렇게 많은 호응이 있을 거라 생각지 못했다. 다시 한번 더 확인하고 싶어 진다. 그래서 나도 고상하지 않게 조회수를 좀 더 올려보려 다시금 섹스에 관한 글을 써보려 한다.


  과거 [인생학교 섹스 편]을 읽고 서평 (제목 : 숨어서 하는 이야기)을 썼던 기억이 있다. 그때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을 다시 집어 들고 다시 한번 그때의 감흥을 느껴보고자 한다. 역시 책은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 새롭게 밀려오는 상념들을 적어볼까 한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

"창세기를 보면, 조물주가 아담과 하와(이브)를 에덴동산에서 추방할 때 큰 벌을 내렸는데, 그 벌 가운데 하나가 육체에 대한 수치심이었다"

                                                                            - [인생학교 섹스 편] 중에서 -


 누군가는 얘기할 것이다. 우리가 옷을 입는 것은 비바람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혹은 멋있고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것보다는 남들에게 혐오감을 일으킬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만 자신의 나체를 드러낸다. 그건 태초의 아담과 하와가 둘만의 에덴동산에서 벌거벗고 노닐던 때와 같다. 지금은 그 에덴동산이 어둠 속 침대 위로 바뀐 것뿐이다.


최초의 여성은 하와(이브)가 아니다?!


 고대 유대 신화에는 태초의 여자가 하와가 아니라고 얘기한다. [벤 시라의 알파벳]이라는 고대 유대교 문헌에는 아담의 첫 아내가 '릴리트(Lilith)'라고 얘기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처음부터 흙으로 아담과 릴리트를 동시에 만들었다는 얘기이다. 남녀는 선후에 구분이 없고 동등하게 동시에 만들어졌다. 물론 이 부분은 성경 밖의 고대 유대 신화 속 얘기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문제는 이 최초의 연인은 다툼으로 헤어졌다는 것이다.  

릴리트 (lilith)

   그 헤어짐의 원인이 바로 섹스였다. 릴리트는 아담과의 성관계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아담이 원할 때 섹스에 응해야 한다는 것과 남성 상위의 섹스 체위에 대한 성관계 주도권에 대한 불만이었다. 결국 릴리트는 에덴동산에서 아담 곁을 떠나 홍해를 따라 메소포타미아 남쪽으로 떠나게 된다. 그곳에서 악마인 루시퍼를 만나 그의 연인이 되고 아이를 낳는다. 그렇게 인류는 아담과 하와의 후손 그리고 루시퍼와 릴리트의 후손 두 가지로 퍼져나가게 된다.


   성경 속 창세기에 보면 아담과 하와의 후손 중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는 다른 인간과의 결혼이 언급된다. 아담과 하와가 최초의 인간이라면 다른 인간은 존재할 수 없지만 그들의 후손과 다른 인간과의 결합이 있었다는 것은 다른 인간의 후손도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이것 또한 종교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많은 가설이고 증명된 것은 없다.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아담과 하와의 또 다른 자녀들과의 근친결혼이라고 설명한다.

루시퍼와 릴리트 [출처 : Pinterest]

  우리는 선에 대해서는 드러내 놓고 얘기하지만 악은 얘기하기 꺼리기 마련이다. 어찌 보면 루시퍼와 릴리트 보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가 더 보편적이고 친근한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공식적으로 기독교에서도 악의 존재인 루시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밝고 선한 것만 보기도 부족한 시간이다. 사람들에게 선을 심고 선을 행하게 해야 하는 종교적 관점에서 악을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하지만 세상에 선만 존재할 순 없다. 선만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도 악은 반드시 생겨나는 것이 하나님이 만든 우주의 섭리이다.


가리는 여자들


  내가 있는 이곳 호주에는 많은 이슬람교도들을 볼 수 있다. 다들 알겠지만 이슬람교 여성들은 히잡이라는 천으로 머리와 목을 가리고 다닌다. 여성마다 차이가 있지만 심한 경우에는 온몸을 검은 천으로 둘러싸고 검은 장갑까지 끼고 있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그 모습이 마치 검은 사신(死神)이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살이라곤 오로지 눈꺼풀밖에 보이지 않는다. 특히 뜨거운 한 여름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보는 사람마저도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이슬람교에서는 여성들이 예배당에 들어가지 못한다. 여성들은 별도의 장소에서 남성들과 분리되어 별도로 예배를 드린다. 하루 다섯 번 이슬람 성지 메카를 향한 기도(살라트:Salat)도 또한 남자들에게만 해당된다.

이슬람 여성들

"사람들이여 주님을 공경하라 한 몸에서 너희를 창조하사 그로부터 배우자를 두어 그로 하여금 남녀가 풍성히 번성토록 하였노라"


O mankind, fear your Lord, who created you from one soul and created from it its mate and dispersed from both of them many men and women. And fear Allah , through whom you ask one another, and the wombs. Indeed Allah is ever, over you, an Observer.

                                                                                 - Quran 꾸란 4:1 -


  이슬람에서도 남녀의 공동 창조를 믿는다고 한다. 그런데 왜 여성에 대한 차별이 다른 종교에 비해 유별하게 심한 것일까, 나는 이곳 호주에 온 이후 이슬람 여성들이 왜 저렇게 신체를 가리고 다니는지에 대해 항상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뭔가 내가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뭔가가 있을 거란 추측만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릴리트에 대한 존재를 알고 난 후 왜 여성에 대한 그들의 생각과 의식이 그렇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그 미궁의 실마리가 조금씩 풀리는 듯했다.


선악의 분리


   이슬람교 또한 유대교 그리고 기독교와 그 뿌리를 같이 한다. 모두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생각한다. 그 뿌리가 같음은 그들 모두가 하나님이 만든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라는 얘기이다. 그 누구도 그들이 악마 루시퍼와 그의 연인 릴리트의 후손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이슬람에서 여성들을 통제하고 그 많은 금기를 요구하는 것은 아마도 태초의 여자인 릴리트 존재를 의식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특히 성적인 부분에서 여성들을 옥죄는 그들의 관습은 섹스에서 시작된 남녀 간의 갈등과 분열로 인해 생겨난 악의 존재를 의식한 것이 아닐까..

아브라함

  성경에서 말하는 선과 악은 하와가 뱀의 유혹(악)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서 아담과 함께 먹으면서 생겨났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성경 밖의 또 다른 이야기에서 선악의 분리는 남녀의 헤어짐으로 대변되는 것이다. 어쩌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선악을 동시에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여자를 악으로 대변한다는 것이 어찌 보면 여성들의 입장에서 너무 비약적이고 불쾌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성경에서 그것을 배제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성경의 구약성서에서는 여자를 사람의 수에 포함시키지 않는다고 되어있다. 이건 부계 중심 사회로의 나아가기 위해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종속관계로 만들어야만 했기 때문 아니었을까?


대등한 조화 = 일원론


  하지만 동양의 일원론적 관점에서 볼 때 선과 악, 양과 음, 해와 달, 남과 여, 너와 나 이 모든 것은 동시에 같이 존재해하고 무엇이 좋고 나쁘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일 뿐이다. 두 가지의 힘이 대등하게 조화를 이룰 때에 만물은 평온한 상태를 이루게 된다. 좋고 나쁨, 상하 종속의 개념은 인간이 문명화 사회화되고 되면서 위계질서를 유지하며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개념인 것이다. 이 개념과 질서가 무너지면 결국 인간 또한 동물과 다를바가 없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문제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억압하고 더 강해지려는 과정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선을 지향(志向)하고 악을 지양(止揚)하는 개념을 만들어 놓았지만 선과 악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공존해 왔다. 다만 어느 쪽이 더 강했느냐에 따라 전쟁과 평화의 시기가 교차했을 뿐이다. 인류의 역사는 항상 강육강식(弱肉強食)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당연한 것이다. 자연의 섭리인 것이다. 다만 인간 세상은 동물의 세계와 차별화하기 위해 선악의 개념을 만들어 더 큰 혼돈을 방지하고 늦추는 작용을 할 뿐이다. 어찌 보면 인간만이 유일하게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고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도 아마 자연의 섭리에 따라 태초의 남녀가 조화를 이루고 살거라 생각한 것은 아닐까? 그럼 이것도 신의 실수인가?


분열의 시작은 섹스?!


  유대 신화 속 이야기만 보면 결국 섹스로 인해 선과 악이 나눠졌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은 겉으로 드러내고 알리려 하는 반면 악한 것과 더러운 것은 숨기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숨어서 섹스를 하고 섹스에 대해서는 드러내지 않고 말하기를 꺼려하는 것 또한 그 때문 아닐까. 그 누구도 자신의 섹스에 대해 드러내 놓고 얘기하지 않는다.


  왜 일까? 이건 수만 년을 이어오며 형성된 인간의 무의식 속에 섹스로 인한 갈라짐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아닐까? 내가 쓴 글 중에서 섹스에 관한 글이 가장 많이 읽히는 것 또한 결국 익명성이라는 공간에 자신을 숨기고 타인의 생각과 모습을 드려다보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이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포르노와 관계된 전 인류의 시간낭비는 가히 충격적이다. 금융분석가들은 포르노 산업의 가치를 100억 달러(현재 1500억 달러 18년 기준)로 평가하고 이것은 그 실질적 규모를 가늠하기에 어림없는 수치이거니와, 인력의 낭비에 대해서는 간과한 평가다"

                                                                                  - [인생학교 섹스 편] 중에서 -


 이 은밀한 본성은 영상 콘텐츠 소비에서도 드러난다. 우리는 영상 콘텐츠를 생각하면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포르노 및 각종 AV(Adult Video) 영상의 조회수는 그것들 못지않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포르노 관련 영상 산업은 코로나 유행 이후 폭증했다고 한다. 다만 공개적인 통계 자료가 많지 않아 실감하지 못할 뿐이다. 사람과의 접촉이 차단되니 이성과의 만남 즉 신체적 접촉 또한 줄어들었다. 성적 욕구를 분출할 수 있는 다른 수단들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실에서 해결할 수 없다면 가상현실 속에서라도 그 욕구를 해소해야 한다. 양지가 강해질수록 음지 또한 강해지는 것이다. 햇볕이 강하면 그늘이 짙어지는 이유이다.


 "섹스의 쾌감은 배우자와 함께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양육하는데 쏟아붓는 뼈 빠지는 수고에 대한 보상으로서 필요한 것이다"

                                - [인생학교: 섹스 편] 중에서 -


  위의 말에 동의하는가? 남녀의 만남은 섹스어필에서 시작하지만 만남의 지속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남녀의 결합은 많은 것을 요구받게 되어있다. 부부가 같은 같은 삶을 이어감에 있어서 고민하고 생각해야 할 요소들이 적지 않다. 그런 고민들로 부부는 하루가 멀다 하고 논쟁과 다툼이 끊이질 않는다. 돈 걱정, 집 걱정, 자식 걱정, 부모 걱정 등등 결혼생활은 싱글일 때와는 다른 더 많은 숙제들을 안겨준다. 부부는 이 숙제들을 하나씩 풀어나가야 한다. 내 마음 같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2~30년을 넘게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남녀가 부딪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위로의 시간


  자위(自慰)는 사전적 의미로 자기 마음을 스스로 위로함을 뜻한다. 우리가 이 단어 떠올리면 달갑지 않은 건 성(性)적인 것과 연관시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가 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의미한다. 자위는 중요하다. 우리는 삶의 곳곳에서 상처받으며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이다. 몸에 난 상처는 치유가 필요하지만 마음의 상처는 위로가 필요하다. 위로받을 사람이 없다면 스스로 위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위가 나쁜 것이 아니라 자위를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운 것이다.


서로를 위로하는 행위 


 낮에는 붙어 있으면 티격태격 대던 부부도 밤이 지나고 다음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행복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경우를 보게 된다. 나 또한 어린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렇게 다투시면서도 아침이 되면 아버지의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는 모습을 보곤 했다.(요즘 같은 세상엔 상상하기 힘든... ;;) 당시 어린 마음에 그런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전날 일을 잊어버리는 걸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둠 속 침대 위에서의 은밀한 시간이 남녀에게는 태초의 원초적 본능을 발현하는 시간으로 돌아가 서로를 위로하는 시간인 것이다.


  위로의 밤은 고통의 낮을 영위해 나가기 위함이다. 남녀는 육체적인 사랑을 통해 쌓여온 서로 간의 정신적 갈등을 해소 혹은 완화해 나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낮에는 생활 전선에서 티격태격하다가도 밤이 찾아오면 이불속에서 얻는 쾌락을 통해 서로의 몸과 정신을 위로하며 다시 내일을 함께할 이유를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녀와 야수

낮에는 신사처럼, 밤에는 짐승 같은


  [미녀와 야수]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미녀가 야수를 사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야수 안에 숨겨진 순수하고 젠틀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던가? 그 순서가 바뀌었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는 전형적이고 완벽한 남녀의 사랑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뭐 그럼 명작이 되지도 않았겠지만... 지난번 글(느낌을 사랑하는 자들)에서도 언급했듯이 인간은 근본적으로 시각적 동물이다. 야수의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수컷 공작새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라면 모를까.

 

  이 동화 같은 얘기 속에는 여성의 욕망이 숨겨져 있다. 길들여진 야수, 젠틀하고 스위트 한 야수가 바로 여성들이 원하는 전형적인 남성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일상에서 한 없이 부드럽고 온순하지만 잠자리 혹은 외부의 위험에서는 야수의 본성을 드러내는 그런 남자, 즉 자신과 가족을 지키고 자신의 성적 욕구와 애정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그런 남성이 바로 여성이 바라는 이상적인 남성상일 것이다.

  

애정(愛情), 사랑(愛)에서 정(情)으로 변해가는 것


  우리는 간혹 비록 형편이 좋지 않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금실 좋은 부부들을 보곤 한다.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물질적 혹은 사회적으로 채워지지 않는 것들을 대신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분명 서로 간의 애정일 것이다. 물론 모든 조건이 다 충족되면 좋겠지만 완벽한 삶이란 없다. 남녀 간에 애정관계(성관계를 포함)가 충족되면 다른 것들은 서로가 극복할 수 있는 부차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특히 부부간의 이 애정관계만 잘 유지되어도 가정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 이건 나이가 젊고 늙음에 상관이 없다.


  얼마 전에 봤던 영화 [죽어도 좋아] 속의 노년의 성과 사랑에 대한 영화는 충격과 함께 또 다른 공감을 불러왔다. 우리는 항상 젊고 섹시한 성에만 길들여져 있다. 누구나 늙는다. 몸은 늙어도 정신까지 늙어감은 자신을 탓해야 한다. 사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애정관계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물론 노화에 따른 육체적 한계는 어쩔 수 없지만 서로가 이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사랑으로 끝날 수도 있고 정으로 발전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부와 명예를 가졌어도 애정이 빠진다면 결국 쇼윈도 부부로 법적 동거인일 뿐이다.

죽어도 좋아


志學 (지학, 15세 )의 정은 번갯불 정이요

而立 (이립, 30세 )의 정은 장작불 정이며

不惑 (불혹, 40세 )의 정은 화롯불 정이요  

知命 (지명, 50세 )의 정은 담뱃불 정이며

耳順 (이순, 60세 )의 정은 잿불 정이요

從心 (종심, 70세 )의 정은 반딧불 정이라.

                                                                

                                             - 남도 속요 [정타령] 중에서 -


  우리에겐 사랑(愛, Love) 말고 서양에는 없는 또 다른 것, 정(情)이라는 게 있다.

이전엔 정이란 단어가 왜 사랑과 함께 붙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우리는 영원할 것 같던 사랑이 식어감에 아쉬워하지만 사랑 뒤에 찾아오는 정을 알지 못했기에 쉽게 헤어짐을 얘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는 번갯불과 장작불 같은 활활 타오르는 로맨스에 익숙해져 잔잔한 온기와 여운이 지속되는 숯불 같은 혹은 꺼졌다 살아났다를 반복하는 반딧불 같은 공백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사랑이 식음을 참지 못하고 또 다른 뜨거움을 찾아 헤맨다. 뜨거우면 식을 수밖에 없다는 자연의 이치를 알지 못한다.


부족함을 견디지 못하는 남녀의 결함


  과거의 남녀는 섹스를 위안 삼아 부족함을 견디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지금의 남녀는 어느 한쪽의 부족함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으로 모두 만족한 삶을 기대한다. 그 만족을 타인에게서 찾는다. 어딘가에 다른 누군가는 이 모든 걸 채워줄 것이라 믿고 떠나지만 다시 찾아오는 상대 또한 또 다른 것을 채워주지 못함에 또다시 괴로워한다. 결국 상대방의 부족함만 보는 자신의 부족함 때문임을 모른다. 상대의 부족함은 다른 상대를 통해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채워주고 자신의 부족함을 상대가 채워주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그렇게 쉽게 이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라는 모래성은 시멘트(정)가 굳을 시간이 필요하다.


"휴대전화나 태블릿 PC 등의 발달로 언제 어디서든 포르노에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게 된 탓에, 우리의 머릿속에는 '권태'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어졌고 권태에 대한 인내심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 [인생학교 섹스 편] 중에서 -


 성인이 된 지금 결혼에서 섹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지금은 성적 욕구를 충족해 주고 2세를 만들기 위한 결혼보다는 서로에게 정신적인 힘이 돼줄 수 있는 동반자를 원한다. 섹스 말고 생각해야 할 많은 수많은 조건들이 있다. 지금의 남녀는 섹스 말고도 성욕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앞으로 발전할 인공지능, 로봇, 메타버스(가상현실)등의 기술들은 우리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 줄 뿐 아니라 또한 남녀 간의 복잡 미묘한 애정관계를 생략하고 신속하게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정으로 인해 많은 사건 사고가 발생하는 건 아직까진 섹스가 남녀가 같은 삶을 영위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임에는 틀림없다.


"섹스는 고통스러운 이분법, 즉 우리 모두가 유년기 이후에 익숙해지는 '불결함'과 순수함'의 이분법에서 잠시 벗어나게 해 준다"

                                                                             - [인생학교 섹스 편] 중에서 -


 남녀는 비록 음지에서 섹스를 나누지만 섹스를 통해 서로를 정화시켜감을 느낀다. 서로의 가장 은밀하고 불결한 부분을 공유하고 애무하는 비이성적인 모습을 통해 서로는 위로받고 정화되며 다시 일상의 이성적인 모습을 돌아가는 순환의 과정이 바로 섹스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순환의 과정이 무너지면 그 안에서 갈등과 분열이 생겨난다.


"우리가 섹스 때문에 괴로워했던 이유는, 섹스가 본질적으로 마음을 어지럽히고, 저항하기 힘들고, 이성을 잃게 하는 '충동'이기 때문이다"


                                                                  - [인생학교 섹스 편] 중에서 -


  세상에 남녀 간의 치정만큼 어지럽고 복잡한 것은 없다. 이건 논리적 혹은 이성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다. 어찌 보면 신이 만들어 놓은 이 복잡한 우주의 질서만큼이나 복잡 미묘한 것이다. 그래서 남녀문제는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말이 나온 건지도 모르겠다. 남녀는 서로를 소유하려는 욕망에 애간장을 녹이지만 결국 서로를 소유할 수 없음에 괴로워한다. 그리고 섹스를 통해 상대를 더 깊이 받아들이고 소유할 줄 알았지만 섹스로 인해 상대와 갈등하고 이별을 맞이하는 막장 반전 상황을 맞이하기도 한다.


   책은 섹스의 본질적인 의미에 대해 깊이 있는 얘기를 전해준다. 단순히 쾌락과 종족 번식의 행위가 아닌 그 행위 안에 숨겨진 인간의 본성에 대해 얘기한다. 가식과 위선으로 가득 찬 세상에 벌거벗은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순간 우리는 이성이 마비되고 모호함이 사라진 무방비의 상대방을 바로 볼 수 있게 된다. 진심을 느끼게 된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만약 그 진심의 순간이 상처받는 시간이 된다면 이는 돌이킬 수 없는 분열로 이어질 것이다.

   

  태초의 신화 속 아담과 릴리트의 갈라섬이 그러했듯이...

인생학교 섹스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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