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하게 삽시다] 이시형
시드니에는 도서관이 많아 책을 구해 읽기는 어렵지 않다. 많진 않지만 한국 도서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신간은 찾아보기 힘든 것이 아쉽다. 곳곳에 공원이 많다. 한적한 공원의 나무 그늘 아래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책을 읽는 것은 나의 작은 즐거움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미세먼지와 공해로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저자(이시형)는 정신과 전문의이자 뇌과학자이다. 80여 권의 책을 집필한 작가이기도 하다. 이 책의 집필 의뢰를 받고 순식간에 탈고를 했다고 한다. 한국 사회에서 이 주제에 대해 할 말이 많았던 것 같다.
이제 둔해지고 싶다!
둔하다는 말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을까? 하지만 요즘은 둔한 사람이 부러워진다. 내가 있는 이곳은 확실히 한국사회보다 둔감한 사회이다. 둔해지려고 여기 온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둔해지는 게 싶지 않기 때문이다. 각박한 세상과 주변 환경은 사람이 둔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너무 빠르게 달려온 것 같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왔지만 와서 보니 제대로 왔는지 모르겠다. 가속 페달에 발을 떼지 않고 손에 땀을 쥐며 긴장 속에서 쉬지 않고 달렸건만 도착한 곳은 내가 원하던 곳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타지(지방)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주말마다 집(도시)으로 내려갔던 적이 있다. 직장생활 초기에는 토요일 근무가 없는 금요일 저녁만 되면 퇴근하기가 무섭게 차에 가방을 던져 넣고 고속도로에 올라 쏜살같이 내려갔다. 친구들과의 술 한잔이라도 더 마시고 싶은 마음에 가속 페달에 힘을 주었다. 나중엔 그 습관이 바뀌었다. 퇴근하면 천천히 회사를 나와 차를 끌고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를 따라 창밖의 하늘과 경치를 구경하며 좋아하는 음악이나 방송을 들으면서 최대한 천천히 정속 주행으로 운전을 했다. (당시 내차는 하이브리드 차량이었는데... 한 번은 집까지 국도로 배터리로만 가보는 시도도 해봤다) 차 안에 있는 시간이 즐거웠다. 차 안은 사색, 음악 감상 때론 노래방이 되는 즐거운 공간이 되었다. 퇴근하는 시간을 즐기는 것이다. 기름도 아끼고 건강도 지키고 시간도 잘 가니 일석삼조이다. 그 시간을 이용해서 긴장된 심신을 이완시키고 생각을 정리하며 한주를 마무리하는 것이다.
바른 방향으로 빠르게 가는 것이 최선(最善)이겠지만 차선(次善)은 천천히 바른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빠르게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보단 훨씬 낫다. 남들보다 빨리 가려는 자들은 항상 불만과 화가 많다. 느리거나 둔한 사람을 보면 답답해한다. 혹여 그 사람이 자신의 동료나 부하 혹은 피고용인이라면 더욱 화가 난다. 자신이 빨리 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존재로 생각하기 때문일까? 항상 차갑고 신경질적인 태도로 그들을 질책한다.
"화(Anger)는 상황을 개선하지 못한다."
"Anger is Danger only"
- 글 짓는 목수 -
화를 내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둘 다 피곤하다. 화를 내는 사람과 그것을 받아주는 사람 둘 다 좋을 것이 없지만 화를 내는 사람이 더 위험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화를 내어서 상황이 개선된다면 아마 이 세상은 성난 사람들만 있지 않을까?
Anger(화)와 Danger(위험)가 닮은 건 그 때문일까?
화난 사람은 상대를 않는 것이 상책이다. 그냥 둔해지고 내버려 두어라. 그 화에 내가 화가 나면 상황은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휩쓸려만 갈 뿐이다. 그 사람의 화를 정당화시킬 명분만 될 뿐이다. 저자는 신경물질인 세로토닌이 풍부한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한국사람은 확실히 비(非) 세로토닌 삶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외형성장, 외모지상주의, 명분 등 없어도 있어 보이기에 열을 올린다. 인간이 상품이 되어가는 세상이다. 남자는 돈으로, 여자는 외모로 평가되는 세상이다. 사람의 내면은 중요치 않다. 기업도 창의와 아이디어로 활기가 넘치는 중소기업보다는 매출이 크고 외형이 큰 대기업만이 대우받는 것이 현실이다. 급격한 성장 속에 익숙해져 느림과 정체를 견디지 못한다. 외형 경제의 고속성장은 이제 한계에 직면했다. 이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기 위해선 내적 성장이 필요한 시기이다. 몸이 건강하려면 마음이 편안해야 한다. 뛰어난 하드웨어가 있으면 뭘 하겠는가? 그 안에 담길 뛰어난 소프트웨어가 없는데... 적어도 내가 있는 이곳 호주는 외면에만 치중하지는 않는다. 일터에서 땀에 절고 누더기가 된 옷을 입고 기차를 타고 음식점을 들어가도 누구 하나 그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 한국사회에서는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느끼고(touched) 움직이다(moved). 감동은 행동의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다.'
- 글 짓는 목수 -
영어에 감동(感動)을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나의 중추 신경에 강력한 자극(감동)을 주어 장기 기억 속에 저장되면 그 자극은 수시로 나의 행동을 제어하게 된다. 우리는 자주 감동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 감동 없는 세상은 정말 재미없을 것 같지만 실제로 그런 세상이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로봇이 상용화가 되고 일상 속으로 파고들수록 인간의 감동은 설자리를 잃어갈 것이다. 감동적인 영화의 주인공이 인조인간 혹은 아바타가 될 날이 머지않았다.
이제는 화를 내기 전에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 그것이 내 인생에서 화를 낼 만큼 중요한 일인가? 중요하다면 더욱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인생의 변화는 한순간의 화(Anger)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인생의 변화는 오랜 끈기와 인내가 수반되어야만 가능하다.
'LG = Life's Good'
어느 대기업의 광고이다. 인생이 항상 GOOD 하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LGB= Life is Good and Bad'
- 글짓는 목수 -
인생은 희로애락의 연속이다. 그래서 인생은 계속 살아볼 만한 것이다. 언제 good이 오고 bad가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믿는다. 힘든 시기를 거치면 좋은 시기가 오고 힘든 시기는 나에게 무언가를 알려주려는 과정이라는 것을... 새로운 일과 사람 그리고 환경 속에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많은 것을 깨닫고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히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 속에 작은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여유만 있다면 어려움은 지나갈 수 있는 것이다.
둔해지자!
유행에, 시선에, 외모에, 돈에, 감정에, 관계에서 둔해지자. 주변에서 오는 의존적인 행복을 찾아다니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나 자신을 드려다 보는데 집중하는 것이 진정한 자아와 행복을 찾는 것이 아닐까?
책은 각박한 한국 사회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피곤한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리고 한국은 자살자와 중독자가 넘쳐난다. 슈퍼맨과 원더우먼이 되어야만 하는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극단적인 선택이 아녔을까? 누군가는 놓아주고 스스로도 자신을 놓아주었다면 다른 선택도 가능했으리라. 둔감해진 만큼 건강해진 사회가 되지 않을까? 이제는 조금 둔해져도 된다고 말해보라! 자식들에게, 친구에게, 부하직원에게, 동료들에게
"넌 지금 잘하고 있어, 넌 최선을 다했어, 난 내가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