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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Jun 05. 2022

믿음이 없이는...

[사는 게 힘드냐고 니체가 물었다] 박찬국  - 두 번째 이야기 -

"진리라는 것은 가장 끔찍하고 추할 수 있다. 따라서 네가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원한다면 믿음을 가져라"

                                                                                                - 프리드리히 니체 -


  니체는 여동생 엘리자베스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동생이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고통받고 있는 상황 속에서 오빠에게 조언을 구했고 그는 그녀에게 위와 같이 답변했다. 이 말은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의심해야 하고 행복을 얻기 위해선 믿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의 말을 반대로 생각해 보면 믿음이 없이는 평화와 행복은 멀어질 수 있다.  진리와 행복은 동시에 추구될 수 없다.


니체의 이 말에 동의하는가?


  니체의 철학은 매력적인 것 같다. 판을 뒤엎는 반전이 있는 그의 생각은 허를 찌르는 공감을 가져오기 때문일까? 다시 읽은 책에서 떠오른 감상을 공유해 볼까 한다.


믿음의 역사


  어찌 보면 인간의 역사는 수많은 믿음을 만들어내고 그 믿음을 공고히 해나가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된다. 지금 내가 조용한 도서관에 앉아 글을 쓸 수 있는 것 또한 서로가 도서관이라는 공간에서는 정숙을 유지해야 한다는 믿음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믿음을 저버리는 행위는 반사회적인 것이며 물리적인 제재가 가해질 수도 있다. 이런 서로 간의 믿음은 법과 질서 혹은 도덕윤리로 자리 잡고 인간사회가 유지, 발전되기 위해 지속적으로 생성되고 발전되어 왔다.


  이제는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자들도 다 알지 못하는 법과 제도가 존재하고 이 순간에도 또 새로운 법안과 제도를 만들어 내고 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더 많은 믿음이 필요하고 그 믿음을 강화하고 강제화 시킬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건 비단 사회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인간의 심리적인 부분 또한 마찬가지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 예를 들면 연인, 친구, 동료, 상하, 부모 자식 간에도 이러한 믿음이 필요하다. 이 믿음은 시간을 통해 생성되고 자라나며 복잡 미묘해진다.  


믿음과 4차원의 상관관계


  인간 세상은 믿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움직이고 돌아가는 곳이다. 그 믿음이라는 것은 시간이라는 4차원의 세계를 통해서 만들어진다. 세상은 3차원의 세계에 구현되지만 시간이 더해져야 세상은 생동감을 얻고 이어질 수 있다.


"이거 완전 4차원이구만!"


  우리는 가끔 엉뚱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가리켜 4차원이라고 말한다. 그런 말을 하는 자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단순한 사람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모르고 말하는 자이다. 우리는 항상 4차원의 세계에 머물고 있다. 만약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이제 5차원이라고 얘기해야 할 것이다. 5차원은 아직 인간이 의식할 수도 아니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점이라는 0차원에서 점이 이어져 선이라는 1차원으로, 선은 다시 선을 만나서 면이라는 2차원을 만든다. 그리고 면과 면이 만나 3차원의 입체 공간이 만들어진다. 우리는 그 3차원의 공간 속에서 존재하며 사물을 지각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단편적으로는 3차원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시간이라는 4차원이 더해져야만 생동감이 생기고 이어질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은 시간이라는 유한함에 갇혀서 유한한 인생을 살다가 떠나야 하는 존재이다. 3차원의 공간과 4차원의 시간이 합쳐진 시공간의 제약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인 것이다.

 

공간의 제약


  인간의 발전 역사는 어찌 보면 이 시공간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원시시대의 인간은 계속 공간을 이동하며 먹을 것을 찾고 안식처를 찾으며 떠돌아다녔다. 인간이 밀과 쌀 같은 농작물을 재배하면서 농경생활이 시작되었고 한 곳에 머물기 시작했다. 정착 생활은 이동 본능을 가진 인간에게 따분함을 안겨주었고 이건 주거 공간의 끊임없는 변화와 확장을 통해 해소해 왔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건축기술이 고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을 점령한 몽골제국이 그들의 문명과 문화를 남기고 영속시키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정복하고 파괴하며 몽고반점을 남겼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의 여행 본능이 더 유지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문명의 도시화이다. 그렇게 정착을 통해 문화와 문명이 뿌리내린다.


  하지만 수만 년간 수렵 생활 속에서 형성된 인간의 이동 본능은 유전자 속에 남아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은 끊임없이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며 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려 했다. 역사적으로 인간은 대항해 시대와 침략 전쟁 등을 통해 자신의 공간을 확장하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을 실현시키며 살아왔다. 전쟁 뒤에 평화가 찾아오지만 평화가 길어지면 권태가 찾아오고 권태를 견디지 못하는 인간은 다시 전쟁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인간은 정체되어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풍요가 지속되면 풍요 속 빈곤인 권태를 느낀다.


  인간은 건축기술을 통해 공간을 다변화시키고 이동수단을 통해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살생무기를 통해 다른 이의 공간과 재물을 빼앗았다. 건축과 여행 그리고 전쟁을 통해 자신이 머무는 공간의 변화와 확장을 꾀하며 살아왔다. 어느 누가 더 좁고 작은 집으로 옮기길 바라며 살겠는가? 이동과 확장의 본능은 원시 수렵시대 때부터 호모 사피엔스가 가진 본능이었다.


시간의 제약


 공간의 제약은 해결되었다. 하지만 시간은 어떻게 할 수 없다.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다. 누구나 늙고 병들고 죽게 마련이다. 인간은 이 유한한 시간 속에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누리고 싶다. 공간의 이동과 확장도 시간이 필요하게 마련이다. 짧은 시간에 더 많은 것을 이루고 더 빨리 이동하며 더 많은 것을 보고 싶다. 혼자서 그 모든 것을 다 이루기란 무리다.


믿음을 만들고 이용하다


  유일하게 인간만이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존재이다. 모든 관계는 시간이 없이는 이뤄질 수 없다. 부모와 친구와 연인 이 모든 것은 함께한 시간이 만들어낸 관계이다. 1초 만에 너와 내가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고 부부가 되고 누군가의 부모가 될 수 없다. 하지만 믿음은 그것을 가능케 한다.


  우리는 신을 믿고 국가를 믿고 법을 믿고 돈을 믿는다. 같은 것을 믿고 바라보면 관계의 진전 속도는 실로 놀라울 정도로 빨라진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종이조각과 계좌잔고에 표시된 아라비아 숫자의 시각적 변화만으로도 상대방을 믿고 의지할 수 있다. 그건 우리가 상대방을 믿는 것이 아니라 돈이라는 존재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이너스 통장과 빚에 허덕일지언정 명품 옷을 입고 럭셔리 자동차를 끌고 다니는 것은 실제 돈이 있고 없고 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돈이 있어 보이고 없어 보이느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실제 돈은 추상적이며 보이는 건 단지 아라비아 숫자일 뿐이다.) 왜냐 그것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믿음을 이끌어내는 방식이기 때문이며 그 믿음을 통해 상대방의 시공간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돈에 대한 믿음이 우리의 관계를 이방인에서 파트너로 만들어주고 상하 혹은 주종관계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게 바로 믿음이 세상을 움직이는 시스템이다. 하나의 신 아래서 우리는 형제자매가 될 수 있고 하나의 국가 안에서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감을 가질 수 있고, 같은 화폐 안에서 우리는 나의 소유와 노동을 내어줄 수 있다. 인간 문명이 이토록 눈부신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믿음이 시간의 유한성을 극복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흩어져 있던 개개인의 시간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게 만드는 힘 그것이 바로 믿음이기 때문이다.


인간(人間), 사람과 사람 사이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이다. 그 말은 공동체를 이뤄야만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개인주의화되어 간다고 할 지라도 그 원초적 본성은 사라질 수 없다. 팬데믹 시대에 방구석에 처박혀 하루 종일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인간들이 수두룩 하지만 그들도 다른 이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오프라인이 아닌 온라인이라는 차이점만 있을 뿐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야 한다. 존재감을 인정받아야만 한다. 살아도 살아있음을 인정받지 못하는 무인도에서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인체일 수는 있을지언정 인간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들여다볼 수 없다. 타인을 통해서만 자신을 볼 수 존재이다. 인간은 상대적인 동물인 것이다. 그래서 신이라는 절대자를 만들어 평생 그것을 우러러보고 부러워하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스스로를 드려다 볼 수 있는 능력을 터득했다면 그자는 아마도 우리가 말하는 신의 영역에 도달한 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믿음이 없이는


  우리는 믿음이라는 체계 속에 익숙해져 있다. 믿음은 신뢰, 약속, 법, 도덕, 윤리, 시스템, 질서, 제도 등 여러 가지 단어로 변형되어 이용되고 있지만 어감에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그 근본에는 서로 간의 믿음이 존재한다.  


  인간은 짧은 역사를 통해 믿음 속에서 안전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믿음이 또 하나의 믿음을 만든 것이다. 이제는 이 믿음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이 세상은 우리가 만든 수많은 믿음들로 얽히고설켜 벗어날 수 없도록 되어 버렸다. 이 겹겹이 쌓아 올린 믿음이 지금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 냈다. 더 이상 믿음이 없이는 행복도 평화도 있을 수 없다. 믿음이 깨어지면 불신dl 생겨나고 전쟁이 시작되는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그 시스템 또한 믿음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어쩌면 인간 세상은 믿음을 만들고 지키려는 자들과 믿음을 깨뜨리려는 자들과의 전쟁으로 스스로 공멸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어떤 이념을 독단적으로 신봉하는 것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자신에게 삶의 위안을 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독단적인 이념을 철저하게 신봉하는 사람은 진리 대신 삶의 위안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 [사는 게 힘드냐고 니체가 물었다] 중에서 -


  니체가 짧은 생을 홀로 고통 속에서 살다가 말년에 광인이 되어버린 것은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그 수많은 믿음을 걷어내는 과정이라고 믿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에게 고대부터 근대까지 이어진 모든 서양 철학 기조를 무너뜨린 '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칭호를 부여한 건 그런 과거로 부터 쌓여온 대중의 믿음을 무너뜨리려는 그의 파격적인 생각과 행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니체의 말이 맞다면 인간 세상은 시간을 먹으며 계속 진리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며 우리는 진리와 멀어지며 믿음을 갈구하며 행복을 찾아가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서두에 니체가 여동생에게 남긴 말처럼 평생을 탐구해도 깨달을 수 없는 진리를 추구하는 것보다 믿음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다 가는 것이 옳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주를 찾는 자 반드시 만나리

믿음이 없어서 무너진 삶의 모든 자리에

다시 주님을 기다립니다 ♫ ♬


  내가 즐겨 듣는 찬양이 있다. 요즘 들어 이 찬양이 자꾸 가슴에 와닿는 건 니체가 남긴 그 말이 틀리지 않음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행복하고 싶은 인간의 마음을 어찌할 순 없다. 불행한 삶을 감수하며 진리를 탐구하는 자들이 있었기에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도 알게 된 것이 아닌가. 우리는 그저 우리가 믿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래야만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세 가지 부류의 인간이 있다.

믿음을 만드는 자, 믿음을 지키는 자 그리고 믿음을 깨뜨리는 자 혹은 진리를 추구하는 자.


당신은 어떤 부류인가?

사는 게 힘드냐고 니체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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