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고 가는 자가 되어라

[토마스 복음서]를 읽다가... - 세 번째 이야기 -

by 글짓는 목수

"오고 가는 자가 되어라"

- [토마스 복음서 42장] -


1 Jesus said, "Be passersby."

- Thomas 42 -



누구나 죽는다. 너도 나도 언젠간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현대 의학은 죽음을 늦추기 위해 끊임없이 발전해 왔지만 죽음을 막을 방법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과거 진시황은 수은까지 복용하며 불로장생을 꿈꿨지만 죽음을 재촉했을 뿐이다. 현대인들도 진시황 못지않게 죽음을 두려워한다. 각종 영양제와 건강보조식품들을 섭취하고 매일 같이 땀 흘리고 운동하며 조금이나마 육체의 노화를 줄여보려 한다. 하지만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는 알 수가 없고 결코 피할 수 없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는 말처럼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죽음은 사후세계에 대한 염원을 만들었고 그 염원을 이루기 위해 현세를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다. 인명은 재천이라는 말처럼 태어나는 데는 순서가 있는지 모르지만 가는 데는 순서가 없는 법이다.


우리는 항상 삶과 죽음의 시간 사이에서 무언가를 이루고 남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당신은 무엇을 남기며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가 살아있는 시간은 잘 생각해 보면 무언가를 계속 쌓아가는 시간들이다. 삶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무엇이 쌓여 왔는지를 잘 되돌아 보면 자신이 왜 변화되지 못하는지를 알 수 있다.


버려야 오래간다


나는 등산을 좋아한다. 과거 한국에 있을 때 수많은 산을 휘젓고 다녔다. 직장생활의 고단함을 주말 등산으로 해소하곤 했다. 회색 도시를 떠나 녹색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정화되는 기분이다. 높은 산을 오르려면 가벼워야 한다. 무거우면 금방 퍼지기 마련이다. 오랜 시간 산을 오르다 보면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그러면 어깨에 맨 가방이 조금씩 돌덩이에서 바위덩이로 다시 쇠덩이로 변해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버려야 한다. 산이라는 것이 한 번 들어가면 어떻게든 벗어나야만 여정이 끝이 난다. 도중에 멈출 수 없다. 어떻게든 스스로 벗어나야 한다. 물론 동반자가 있다면 짐을 덜어줄 수 있겠지만 혼자라면 어떻게든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나야만 한다. (물론 119 헬기 혹은 대원들의 구조를 받고 벗어날 수도 있겠지만...)

KakaoTalk_20220725_061721915.jpg Blue Mountain 에서

이곳 호주에 온 이후에도 나의 산사랑은 변치 않았다. 시드니 근방에 블루마운틴 (Blue Mounain)은 나에게 또 하나의 삶의 활력소가 되는 곳이었다. 블루마운틴은 그 규모만큼이나 많은 등산로가 있다. 처음 시드니에 왔을 때 블루마운틴 트레킹 가이드 책자를 들고 틈만 나면 등산을 가곤 했다. 하산부터 시작하는 이곳의 산은 나에게 등산의 신개념을 심어주었다. 푸르름은 같지만 갈색의 나무가 아닌 하얀 나무(유칼립투스)로 새로운 색 조합의 풍경은 또 다른 생각의 전환점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있다는 진리는 변함없다.


한 번은 혼자 깊은 산중에서 발목을 삐끗한 적이 있다. 하필 평일이고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등산로를 찾아간 탓에 등산로에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협곡을 따라 걷는 산행코스가 대부분인 이곳에는 어둠이 더 빨리 찾아온다. 해가 조금만 기울어도 그늘이 지기 때문이다. 해가 기울고 삔 발목 때문에 걸음걸이는 점차 느려졌다. 더욱이 핸드폰의 신호 또한 잡히지가 않았다. 공포가 엄습했다. 결국 잔뜩 싸 짊어지고 온 가방을 버려야 했다. 물 통만 챙기고 아픈 다리를 부여잡고 고통을 참으며 계속 걸었다. 발목이 삐기 전까지 신비하고 아름답기만 하던 풍경은 두렵고 공포스러운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다행히 밤이 되기 전에 협곡을 벗어날 수 있었다. 만약 가방을 들고 끝까지 가려했다면 아마 해가지기 전에 산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 산 속에서 조난을 당했을 것이다.


우리는 시간이 갈수록 많은 것들을 짊어지게 된다. 시간이 갈수록 삶의 무게가 무거워지는 건 내가 내려놓지 못하는 것들에 비례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오랜 시간 한 곳에 머물기 시작하면 불필요한 것들이 쌓여가고 그것들이 발목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살아간다. 쉽게 떠날 수 없게 된다. 익숙한 관계와 환경은 지루함을 안겨주지만 그 편안함을 버릴 순 없다. 지루함은 여행으로 해소하고 이내 편안함으로 돌아온다.


과거 예수는 한순간도 머물지 않고 떠돌아다녔다.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모든 것은 가진 자였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은 하나 둘씩 늘어갔고 많은 군중을 이끄는 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항상 오고 가는 행인이었고 그의 제자들도 오고 가는 행인이 되었다. 부처도 공자도 모두 그러했다. 끊임없이 떠돌며 진리를 이야기했다. 그들의 행색은 비록 가볍고 초라했지만 그들의 정신은 맑고 단단해졌다.


소유(所有) 보다 사유(思惟)하는 삶


가진 것이 많다는 것은 지켜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이기도 하다. 지켜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은 근심거리가 많아진다는 것이다. 가진 것이 없으면 지킬 것이 없기에 근심도 적어진다. 어찌 보면 거지나 바보가 세상 근심이 제일 없는 사람일 것이다. 거지는 없어서 없고 바보는 몰라서 없다.


한국에서 살 때는 항상 새 차를 타고 다녔다. 첫 차부터 새 차로 시작에 그 이후에도 차를 바꿀 때는 새 차만 구매했다. 새 차를 사면 새 차 증후군이 찾아온다. 반짝거리는 새 차 때문에 어디 흠집이라도 날까 항상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새 차를 사고 얼마간은 밤에 잠도 잘 오지 않는다. 혹시 누가 밤새 주차해놓은 내 차에 문콕 혹은 스크래치라도 내고 가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에 시달린다. 그러다 작은 흠집이라도 발견할라 치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그 찝찝한 기분이 며칠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하필 새 차는 작음 흠집도 왜 그렇게 눈에 잘 띄는지 모르겠다. 새 것은 헌 것을, 깨끗함은 더러움을, 완벽은 결함을 근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바뀌어 감은 자연의 이치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KakaoTalk_20220725_062043207.jpg Camry 2001

지금 나는 20년이 넘은 올드카를 몰고 다닌다. 30만 km를 달렸다. 엔진의 진동 소리가 실내로 전달된다. 노면의 충격이 뼛속까지 전달되는 전신 마사지 기능을 탑재한 붕붕이다. 처음에 느낀 불편함은 이제 친숙함이 되어버렸다. 자동차 본연의 기능에 전혀 손색이 없는 녀석의 건재함에 오히려 감사하게 된다. 어디 긁히고 찍혀도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다. 이미 수많은 상처를 안고 있기에 작은 상처는 이제 상처도 아닌 게 되어버린 녀석이다. 상처는 녀석이 달리는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이건 비단 자동차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집이 생기면 집이 또 다른 걱정거리 안겨주고 건물이 생기면 건물이 근심을 가져다줄 것이다. 신경 쓸 소유물이 많아진다는 것은 자신을 신경을 쓸 시간을 앗아가게 마련이다. 소유가 늘어갈수록 근심과 고민의 시간은 늘어나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사유의 시간은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고린도후서] 6:10 -



며칠 전 썼던 글(아름다움이 가져온 것)에서도 언급했지만 쌓여가는 옷들이 남기는 건 지구의 쓰레기뿐이었고 가져온 것 자연재앙이었다. 우리가 이 땅에 알몸으로 태어난 것처럼 같이 가볍게 살다가 떠나는 행인이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예수가 남기고 행했던 것처럼 머물지 않고 떠나는 자는 미련 없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건 우리가 여행을 할 때 느끼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우리는 타지 혹은 이국의 여행지에서 현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그들의 삶의 고통을 느끼진 않는다. 그저 그들의 모습을 관조할 뿐이다.


내가 호주에 처음 왔을 때도 그러했다. 바라보는 모든 것들이 신기하고 새로웠다. 지평선이 보이는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 공원과 가지 각색의 피부색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다양한 인종들이 뒤섞인 거리 그리고 그들의 음식과 문화는 신선한 경험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이곳에 정착하게되면서 그것들은 일상이 되어가고 신선했던 모든 것들은 따분함으로 변질된다. 처음에 감사했던 모든 것은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여행자는 관조하는 자세로 모든 것을 보지만 거주자가 되면 관조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기에 삶이 괴로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자주 여행을 다녀야 하는 건지도...)


예수는 알고 있었다. 인생 또한 물 흐르듯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야 함을... 물이 고이면 썩는 것처럼 인간 또한 한 곳에 정체되고 머무는 순간 변질된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어찌 보면 이 땅에 잠시 머물다 가는 이방인이다. 하지만 대부분 자신이 이 땅의 주인인 것처럼 살아간다. 내 집, 내 땅, 내 소유를 주장하고 그것이 당연하다 여기며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한다. 그 과정 속에서 서로 끊임없이 투쟁한다. 어차피 모두 내려놓고 가야 함을 알면서도...


만약 모두가 인생을 오고 가는 여행자처럼 관조하는 자세로 산다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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