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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Dec 07. 2022

욕망은 뒤돌아 보지 않는다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레프 톨스토이 & 칼 마르크스

"하루 단위로 땅을 팔지요. 하루에 걸어서 갔다 온 만큼 땅을 가질 수 있는 겁니다."


                                        - 책 속 인용문 -


만약 당신이 하루 동안 걸어 다닌 지역이 모두 당신 땅이 된다면, 어떨까? 그럼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만큼의 땅을 가질 수 있을까? 어느 날 톨스토이는 창가에 앉아 드넓은 땅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겼을 것이다. 드넓은 자신의 농지에서 그들과 함께 땀 흘리며 밭을 갈고 소작농들의 마음을 드려다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의 영감이 떠올랐을 것이다. 실제로 톨스토이는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농부가 되려고 하였다.

부동산

조물주 위에 건물주


누구나 부동산을 꿈꾼다. 오죽하면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이 있겠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동산을 빼놓고 자본주의를 얘기할 수 없다. 그건 자본주의가 바로 땅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건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시초 축적'이라는 용어로 산업자본주의가 나타나기 이전부터 이 단계로 나가가기 위한 토지 자본주의가 이미 진행되고 있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나중에 이것에 관한 글을 쓰겠지만 땅(생산수단)과 인간(노동력)의 분리(분업)가 결국 지금의 산업 자본주의 사회를 만들었다. 이건 태초에 신과 인간이 분리되는 것과 같은 인간사의 거대한 전환점 되었다. 칼 마르크스가 그것을 가장 잘 간파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근대에 들어 가장 위대한 철학자이자 사상가가 된 것이다. 그로 인해 인류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거대한 갈림길과 마주하게 되고 인간의 욕망은 자본주의의 손을 들어주었다.


자유와 산업자본주의의 동행


중세부터 꿈틀대던 자유를 향한 인간의 갈망이 노예제를 없앰으로써 노동력을 강제할 수단이 필요했다. 그것은 지주 봉건제(소작농) 사회를 거쳐 자본제(프롤레타리아) 사회로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자유 같은 구속으로 노동력을 강제할 수 있게 되었다. 땅에 주인이 생김으로써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성립되었다. 땅이 부를 가져다주고 부는 더 많은 땅을 가질 수 있게 했다. 그건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지배하게 만들고 가진 자는 못 가진 자들의 그 가진 것마저 모두 가져갈 수 있기 때문에 빈부는 절대 좁혀질 수 없는 진리와도 같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 마태복음 13:12 -


톨스토이(1828~1910)가 살았던 시기는 봉건제 사회에서 자본제 사회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서구 유럽은 이미 산업사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으나 톨스토이는 러시아 사람이다. 러시아는 아마 영국에서 시작한 산업혁명의 여파가 조금씩 전해지기 시작한 시점일 것이다. 그는 칼 마르크스(1818~1883)와 동시대를 살았지만 마르크스가 산업혁명의 폐해가 만연하는 사회를 몸소 눈과 귀로 체험하던 때쯤 톨스토이는 이제 조금씩 산업화의 물결이 밀어닥치고 있었을 것이다. 땅을 잃은 자유민들이 도시로 모여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노예제 -> 봉건제 -> 자본제 -> 노예 자본제  


근대 산업 자본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선 중세 노예제와 봉건 농노제의 폐지가 수반되어야 했다. 우리는 인간의 자유를 향한 갈망이 쟁취해낸 자유민주주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산업자본주의 사회로 가기 위해서 자유민주주의라는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산업자본주의는 땅에 묶여있던(노예제와 봉건제에 의해) 인간에게 자유로운 이동을 전제해야만 했다. 땅에 얽매여 있던 사람들을 도시의 공장으로 이주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이 생산수단과 분리되는 시작이었다.


자유로운 노예


결국 사람들은 공장이 있는 곳에 모여들며 도시가 확장되고 조밀해진다. 반대로 사람들이 빠져나간 농촌은 적은 노동력으로도 농사가 가능한 기업농(기계화, 품종개량-유전자 변형)으로 변하게 된다. 퍼져있던 봉건 지주들의 권력을 뺏어오기 위해 부르주아들이 인권과 자유를 명분 삼아 자본제 사회로의 전환을 꾀한 것이다. 전 세계 자본주의의 롤모델인 미국의 상징이 자유의 여신상인 것이 이제 좀 이해가 될 듯하다. 더 아이러니 한 사실은 프랑스혁명(1789~1799)으로 전 세계 시민 혁명의 시발점이 된 프랑스가 이 자유의 여신상을 미국에 선사했다는 점이다.

자유의 여신상

자본주의를 떠받드는 가장 기본은 노동력이다.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삽질과 곡괭이질이었고 산업사회에서는 기계와 공구, IT 정보 사회에서는 컴퓨터 앞에서 키보딩과 마우스 질 하는 노동력으로 그 형태와 모습만 바뀌어 왔을 뿐이다. 그리고 땅과 공장 그리고 플랫폼(가상)이라는 생산수단과 인간을 분리시킴으로써 자본주의가 성장하고 보이지 않는 노예제가 다시 부활한다.


어찌 보면 인간의 역사는 부과 권력을 가지고자 하는 자들과 그것을 뺏으려는 자들의 끊임없는 투쟁의 과정 같아 보인다.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는 그렇게 역전되는 것 같지만 지배하는 자가 한 수 앞을 보고 항상 승리하는 듯 보인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해가 지기 전에는 꼭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면 그 땅은 전부 당신의 것이 됩니다"

                                                         - 책 속 인용문 -


[사람에겐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이 소설의 주인공 바흠은 자신의 땅이 없이 지주의 땅을 농사짓는 소작농이다. 그는 남의 땅을 농사지으며 핍박받는 삶에서 벗어나고자 빚을 내서 자신의 땅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땅이 생기자 없던 근심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자신의 땅에 이웃 가축들이 들어와 풀을 뜯고 때론 밭을 망쳐놓는다. 좋았던 이웃과의 관계가 틀어진다. 참다못한 그는 소송을 걸고 앙심을 품은 이웃은 그에게 더 해코지를 한다. 그의 불안은 더해간다. 그리고 그는 더 크고 좋은 땅을 찾아 떠난다. 그러다 기름지고 좋은 땅이 있는 마을을 만나고 거긴 땅이 하루에 1000 루블이라고 한다. 땅의 가격을 크기가 아닌 시간으로 측정하는 이상한 곳, 자신이 하루 동안 돌아다닌 땅이 모두 자신의 것이 된다. 바흠은 얼마나 많은 땅을 가지게 되었을까?


"하인은 삽을 들고 바흠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길이에 맞춰 무덤을 파고 그를 묻었다. 바흠이 차지

한 땅은 그 3 아르신(약 2미터 정도)이 전부였다."

                                                                                              - 책 속 인용문 -


바흠의 욕심이 화를 불렀다. 그는 좀 더 조금 더 많은 땅을 가지려고 했다. 그리고 해가 지기 바로 직전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피를 토하고 쓰러진다. 그 많은 땅을 눈에만 담고 숨을 거두고 만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고 원하는 만큼의 땅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결국 욕망에 끌려다니다 최후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 넓은 땅에 고작 자신이 누울 자리(2m)만 차지했을 뿐이다. 그는 땅을 가지는 순간부터 불행이 시작되었다. 근심과 걱정 그리고 더 많이 가져야 하는 더 큰 욕망에 시달리는 삶을 살았다. 가진 것이 많다는 것은 결국 신경 써야 할 것이 많다는 말이다. 사실 거지가 제일 근심 걱정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들이 신경 쓰는 건 오로지 다음 끼니뿐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  [시편 119:71] -


이상하게도 가진 게 많아지면 가지지 못했을 때 가졌던 행복을 다시는 느낄 수 없게 된다. 어린 시절 바나나 하나를 손에 쥐고 아이스크림처럼 아껴서 빨아먹던 시절 바나나 하나가 가져다주는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넘쳐나는 먹거리에 바나나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산에서 길을 잃어버렸을 때 해는 지고 배는 고픈데 가방 안에 하나 남은 초코바가 왜 그리 눈물 나게 맛있는지, 아래 있을 때는 줘도 잘 안 먹던 건데, 에어컨 빵빵한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랑 마시는 콜라는 땡볕 아래 지붕 위에서 살이 타는 고통 속에서 마시는 콜라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하찮은 것이 귀하고 흔한 것이 소중해지고 작은 것이 크게 느껴지는 것은 가진 게 없고 고통스럽고 위험했던 순간들에서 찾아오는 것이다. 가난과 고통과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은 결국 작은 것에 대한 감사함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고난은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감사해야 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저렇게 어중간하게 가진 사람들이 제일 불쌍한 인간들이라니까"


언제인가 셰어 하던 집에 같이 살았던 할아버지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집을 여러 채 가지고 셰어와 렌트를 돌리던 집주인 아주머니가 코로나로 방이 비어 힘들다며 방세를 올리겠다고 하니 그 할아버지 나에게 말했다. 집 없이 나라에서 주는 연금으로 방 셰어를 하며 살아가는 할아버지와 코로나로 일이 끊겨 수입이 없는 나보다 그녀가 더 힘들다는 말이 우리에겐 받아들이기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못 가지고 깨우친 자 vs 가지고 깨우친 자


가난한 자나 부유한 자보다 더 위험한 자는 어중간하게 가지고 있으며 끊임없이 더 많이 가지려는 자들이다. 없었던 것이 한이 되어 더 가지고자 하는 욕망에 휩싸인 자들이 가장 위험하다. 그들은 소유함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소유로서만 만족하고 행복해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이 이 범주에 들어간다. 부를 쫓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삶의 대부분을 이것을 이루고자 삶에서 중요한 다른 것들을 포기한 자들이다. 가난한 자는 왜 가난한지를 고민하고 세상을 파헤친 마르크스, 부유했지만 그 모든 것이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고 내면을 들여다 본 톨스토이, 이 둘은 서로 방식은 달랐지만 세상의 흐름에 이리저리 휩쓸리지 않고 저항하며 살았다.

칼 마르크스 (1818~1883), 레프 톨스토이 (1828~1910)

마르크스 vs 톨스토이


마르크스는 가난했다. 톨스토이는 부유했다. 마르크스는 생활비가 없어 엥겔스에게 생계를 의탁하며 글을 써야 했다. 톨스토이는 젊은 시절 술과 도박 그리고 여자에 빠진 방탕한 삶을 보냈다. 그렇기에 마르크스는 가난하고 핍박받는 대중의 입장에 서 있었다. 톨스토이는 대중에게 연민과 긍휼한 마음을 생기지만 자신의 신분 때문에 그들 속에 함께하는 삶을 살 수 없었고 농민(소작농)들에게 반감만 산다. 그래서 그는 글로서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려 했다. 못 가진 자가 못 가진 자 편에서 쓴 글과 가진 자가 못 가진 자 편에서 쓴 글은 다를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를 경멸했지만 톨스토이는 그런 부르주아를 불쌍히 여겼다.


냉철과 냉정 사이


마르크스는 냉철(徹)하게 현상에 집중했고 톨스토이는 냉정(冷靜)하게 현상 이면을 바라봤다.

마르크스는 이성적이고 철학적인 상상력으로 [자본론]을 집필했다. 반면 톨스토이는 감성적이고 문학적인 상상력으로 소설을 썼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욕망을 투쟁과 시스템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톨스토이는 그건 불가능한 것이라고 바라봤다. 마르크스는 현상을 바꾸고자 했고 톨스토이는 현상을 관조했다. 마르크스는 타인을 변화시키고자 했고 톨스토이는 자신이 변하고자 했다. 마르크스는 혁명을 도모했고 톨스토이는 이야기를 구상했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욕망을 꺾으려고 했고 톨스토이는 인간의 욕망을 드려다 보려 했다. 마르크스는 글로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현실에 구현하고자 했고 톨스토이는 글로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비현실(허구)에서 구현하고자 했다. 결국 마르크스는 도망자(무국적자)가 되었고 톨스토이는 대문호(괴로운)가 되었다. 둘 다 민중을 위해 펜을 들었고 본질은 같았지만 형태가 달랐다. 그리고 둘의 삶도 완전히 달랐다.


그들이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없다


마르크스와 톨스토이가 원했던 세상은 아직도 도래하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이 그것을 잘 암시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괴로워했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건 착각일 수 있다. 200년 전 마르크스는 시스템으로 톨스토이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움직이려 했지만 소유에 대한 욕망에 사로 잡힌 사람에 의해 시스템은 무너졌고, 소유를 위해 시간을 반납한 사람들은 마음을 읽을 시간이 없었다.


당신에게도 하루의 시간만큼 땅을 가진다면 분명 원하는 만큼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할 것이다. 세상이 그렇게 유혹하고 있다. 당신이 노력하면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질 수 있다고... 시간을 소유와 맞바꾸며 살아간다. 지금 당신의 이 마음이 10년전 혹은 20년전 아니면 30년전 마음이었는지 되돌아보라.


욕망은 절대 뒤돌아 보는 법이 없다.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표지사진 출처] Robin McCarthy - Artist -

 https://www.thenation.com/article/environment/the-environmental-cost-of-gre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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