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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Dec 15. 2022

평범과 비범 사이

꺾여버린 가지를 바라보며...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 [요한복음 15:5~6] -

 

'예수님 안에 머물러 계세요 그래야만 합니다' 예배당에 앉아 목사의 설교를 듣다가 문득 글감이 떠올랐다. 다소 엉뚱한 상상이긴 하지만 그 엉뚱한 상상을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생각이 샘솟는다.


나는 화자와 저자가 말하는 내용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한다. 물론 그건 그 화자와 저자가 의도했건 아니했건 그건 중요치 않다. 세상은 의도한 대로 움직이기보다 의도하지 않은 데로 움직이는 경우가 더 많다. 왜냐 세상에는 수많은 진리와 정의의 말들도 가득 차 있지만 불의와 불법이 성행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포도나무

성경에는 예수를 포도나무 그리고 우리를 포도나무의 가지에 비유한다. 포도나무는 많은 열매를 맺는 과실나무 중 하나이다. 그 안에 머물러 있어야 풍성한 과실을 맺을 수 있다고 얘기한다. 만약 그것이 진리라고 믿는 자는 그 안에 머무르려 할 것이다. 그리고 세상 사람 모두가 성경 속 진리를 따르고 살아간다면 세상에 어지러운 일들은 모두 사라질 것이다. 그럼 그건 인간 세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포도나무가 번성하고 많은 가지를 뻗치며 많은 과실을 맺으면 얼마나 보기 좋은가? 우리는 풍성한 포도나무 가지가 되어 열매를 맺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가지를 잘라낸다.


잘려버린 가지


내가 매일 다니는 수영장 앞에는 적어도 몇 백 년 아니 몇 천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나무 한 그루가 있다. 호주에 와서 처음 그 나무를 만났을 때 그 웅장함과 풍성함에 입이 딱 벌어졌던 기억이 난다.  나무줄기가 어찌나 크고 두툼한지 마치 공룡의 피부와 근육을 연상케 한다. 나는 몇 년 동안 그 수영장을 다니며 항상 그 나무를 바라보며 시간의 위대함 앞에 경이로움을 느끼곤 했다. 나무는 이 자리에 서서 그 긴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보아 왔을까? 아마 인간들이 돌도끼를 들고 벌거벗고 뛰어다니며 짐승들을 사냥하는 모습도 보았을 것이다. 그런 야만적인 인간이 먼 훗날 자신을 잘라낼 줄 생각이나 했을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기 시작하면 나무에 대한 경외함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아마 2년 전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몇 명의 인부들이 사다리 차를 가지고 와서 그 무성한 가지들을 전기톱으로 잘라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기찻길 쪽으로 뻗은 울창하고 무성한 나무 가지들을 잘라내고 있었다. 수 천년을 견디고 살아남은 줄기와 가지들은 어찌나 굵고 단단한지 인부들이 전기톱으로 잘라내는데도 쉽게 잘리지 않아 애를 먹는 모습이었다. (나도 목수일을 할 때 느꼈지만 고급 원목은 정말 무겁고 단단하다. 전기 톱날을 잡아버릴 정도이다. 오랜 세월을 견뎌낸 나무의 몸부림일까...)

반쪽이 잘려버린 나무

그 옆에 멀찍이 서서 한 동안 가지가 잘리는 모습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일이 있어 자리를 떠야 했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수영장을 찾았을 때 반쪽이 잘려나간 나무는 이전의 그 웅장함과 경이로움을 상실해 버렸다. 그 나무를 바라보며 왜 그리 가슴 한 구석이 휑하고 쓰라린 기분이 드는 것인지... 아직도 수영장을 갈 때마다 그 나무를 바라보면 왠지 모를 연민 같은 것이 느껴진다. 나무도 감정이 있다면 어땠을까? 겨우 몇십 년도 살지 않은 인간이 수만 년을 이 땅에 뿌리 뻗고 가지를 펼치고 수많은 꽃과 과실을 맺어온 자신을 잘라내는 것을 보면서 무얼 느꼈을까? 인간은 고작 200~300년 사이에 그렇게 수만 아니 수천만 년의 시간을 잘라내었을 것이다.  


"그 안에 머물러야 함을 알지만 잘려버린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포도나무의 가지가 되어 높이 뻗어가며 과실을 맺었지만 어쩔 수 없이 잘려 나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만약 내가 예수가 살던 시기의 요한이었다면 예수에게 물었을 것이다. (물론 그 시대에는 전기톱으로 이렇게 쉽게 잘려나가는 가지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안에 머물고자 한다는 것을 알지만 수만 년을 버텨온 나무의 가지도 어쩔 수 없다. 몇 시간 아니 몇 분 안에 잘려버린다. 내 의지와 생각과는 다르게 나라는 가지와 줄기가 그 뿌리와 분리되어버리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머물고자 한다 해도 머물 수 없는 상황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세속과 신앙 사이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항상 신앙의 중요성을 염두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과연 신앙을 온전히 지키며 살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될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그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내가 포도나무 가지로 머물고자 한다고 해도 누군가가 전기톱을 들고 와서 자르면 어쩔 것인가? 잘릴 수밖에 없다. 버틸 수 없다. 무력과 외압에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물론 지금은 무력과 외압은 자유민주주의의 법과 질서에 의해 제한되지만 산업자본주의 사회 시스템에 속 보이지 않는 외압, 즉 수많은 유혹과 자극들에 무한정 노출되어 있다.  


그럼 이 누군가가 전기톱을 들고 가지를 자르는 것은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뭐 굳이 전기톱이 아니라도 내 집으로 넘어온 가지를 꺾어버리는 것(호주에서는 자신의 집 울타리로 넘어온 가지는 이웃의 허락 없이도 잘라낼 수 있다)도 마찬가지이다. 그럼 우선 그 나무의 가지들이 잘린 이유가 무엇인지부터 들여다봐야 한다.


(다수의) 편의와 (경제적) 효율을 위한


내가 좋아하고 매일 나에게 경외한 기분과 푸르름을 선사하던 그 웅장한 나무는 결국 다수 인간의 편의를 위해 잘렸다. 가지가 철도길을 넘어가려 했기 때문에 잘렸다. 우리는 철도길을 보수하고 개조 공사를 해서 그 나무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성비를 따져서 나무를 베는 것이 자본주의 경제적 관점에서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 나무가 나무가 아니고 고대 유적이었거나 권력을 가진 누군가(사유지)의 나무였다면 어땠을까? 상황은 바뀌었을 것이다. 그 정도까지가 아니라도 만약 이 나무가 한국에만 있었어도 상황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왜냐 너무 오랜 세월을 버텨낸 한국에선 몇 안 되는 나무로 보호대상(희귀성의 논리)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 유적 혹은 사유지는 결국 인간의 역사이고 인간의 이권이다. 자본주의적 효율성의 관점에서 다수 인간의 편의와 비용과 시간의 절감을 위해서는 자연과 그 이외의 생명에 대한 가치는 상대적으로 평가절하 되어버린다.


욕망의 희생양


전기톱은 타인 혹은 다수의 욕망이 반영되어 있다. 타인의 욕망과 편의가 나의 신앙이나 신념이 꺾여버림을 상징하는 것이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이런 경우를 적잖이 겪게 된다. 나의 잘못이 아닌 일방적인 타인의 행동 혹은 공격에 의해서 자신 혹은 자신의 가족이 희생당하는 그런 경우 말이다.


예를 들면, 어느 날 나의 아이가 유괴되어 누군가의 욕망을 채우는 희생양이 될 수도 있고 술 취한 운전자에 의해 나의 가족이 한순간 불의의 사고를 당할 수도 있으며 얼마 전 이태원 참사처럼 다수의 힘에 의해 나의 의지와 힘으로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영화 [밀양] 중에서

"내가 어떻게 용서를 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내가 용서를 해야지.. 어떻게 하나님이 먼저 용서를 해요?"

                                          - 영화 [밀양] 중에서 -

              

아이를 빼앗긴 부모가 온전한 삶을 다시 살 수 있을까? 만약 당신이 이런 상황을 경험하게 된다면 어떻겠는가? 타인에 대한 원망에서 시작해 신에 대한 원망으로 옮겨갈 수 있다. 자신의 포도나무 가지 안에 머물고 열매를 맺고 살아가고 있었지만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해 그런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면 과연 지켜오던 그 신앙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을까? 가지 안에 머물렀지만 잘려버린 이 상황을 어찌할 것인가? 멘털이 어지간히 강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 [창세기 22:2] -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자녀인 이삭을 재물로 바치라고 한다. 지금 현대인의 관점에서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구약성서에는 이런 내용들이 적잖이 나타난다.)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자녀를 재물로 희생하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신이라는 존재가 나의 자녀를 생명을 요구하는 것 차체가 용납하기 힘들다. 어찌 신으로 받들 수 있겠는가? (물론 이 구절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테스트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더 이해하기 힘든 건 그렇게 자식을 재물로 갇다 바친 아브라함이다. 부모 된 자로로 어떻게 자식을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 '그것은 신의 뜻이요'라고 한다면 지금의 사람들은 그 자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만약 네가 나를 죽여야만 너의 가족과 네가 살 수 있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거야?"


얼마 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의 집주인(중국인)이 내게 물었다. 내가 목장 모임을 위해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을 때였다. 그는 나의 이런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종교라는 것을 가져본 적이 없는 오리지널 중국인이다. 그리고 그런 종교를 가진 자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였다. 매주 교회 사람들과 돌아가며 음식을 만들어서 같이 먹으며 서로의 삶을 얘기한다고 하니까 호기심이 발동한 모양이었나 보다. 그래서 그가 아래와 같이 물었다.


"그럼 기독교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향하는 게 뭔데?"

"사랑!"

"무슨 사랑?"

"음... 타인을 향한 그런 사랑"


그러고 나서 그가 나를 테스트하려는 듯 피해 갈 수 없는 그리고 아직은 내가 서슴없이 혹은 고민 없이 답할 수 없는 위의 '나를 죽여야만 너와 가족을 살릴 수 있다'는 질문을 던졌다.


"음... 사실 나도 아직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야"

"하하하 그럼 너도 신앙이 없는 거네"

"하하하 맞아 난 아직 신앙이 있다고 볼 수 없지..."

"그런데 왜 나에게 권하는 거야?"

"그냥 나쁘진 않으니까"

"하하하"

 

그는 곤란한 질문으로 나를 테스트했고 나는 순간 멈칫하며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결국 내가 교회 한 번 나오라는 말에 나를 죽일지도 모르는 너를 내가 어떻게 믿고 따라가니 하며 피식 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관심이 행동으로 이어지기 위한 명분을 꼭 이렇게 타인을 테스트하는 방법으로 접근하는 그가 얄밉기도 했지만 나 또한 아직 신앙이 바로 서지 않은 상태에서 그에게 교회 오라는 권유를 한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의 모습이 과거 나의 모습이기도 한 것을 깨닫고는 살짝 소름이 돋기도 했다. 우리는 완전한 신앙과 믿음을 가지지 못한 채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권유한다. 그냥 좋은 거 같아서... 혹은 나쁘지 않다는 이유로... 스스로가 답을 찾고 깨닫지도 못한 체...


끝이 없는 증명과 증명 없는 믿음


나는 분명 이 모든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 인간은 그것을 증명하는 방법을 모두 알아낼 수도 없다. 또 그러기우리의 인생은 너무 짧기에 증명이 아닌 믿음이라는 것을 선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수많은 과학자들이 증명과 증명을 거듭하며 세상의 시작과 존재의 이유를 설명하려 했지만 아직도 밝혀내지 못했고 또 다른 수많은 과학자들이 지금도 계속 증명하고 있다.


집주인이 한 질문이 머릿속에 오랜 시간 머물렀다. 물론 극단적인 질문이었지만 우리 삶에서 나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과연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면서 이런 상황에 놓였을 때 자신과 가족의 죽음을 온전히 목도할 수 있을까? '그것이 신을 뜻이라면'이라면서... 내가 먼저 죽이지 않으면 상대가 나와 가족을 죽이는 상황...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자식을 희생양으로 내놓을 수 있는 자가 누가 있을까?


"대부분은 세상(트렌드)과 신앙 사이에 걸쳐져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며칠 전 목장 모임을 하며 내가 던질 질문에 식구들이 고민에 빠졌다. 우리의 삶은 자본주의, 물질주의라는 시스템 속에 놓여 있는데 신앙이라는 것은 그것들과는 다른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고민에 빠지게 된다. 성경 속에서 말하는 온전한 신앙 속에 있는 자의 모습은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내가 생각하기엔 가장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사람으로 비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세상의 트렌드를 쫓으며 신앙을 지키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의사는 그 의사를 아는 자들을 고치지 아니한다"

                                              - [도마복음 31장] -


과거 나의 할머니의 모습이 그러했다. 신앙 없던 할머니는 정겨운 친구였지만 신앙이 생긴 할머니의 모습은 낯설었다. 예전 같았으면 명절날 가족들과 어울려 차례를 준비하며 같이 음식을 하고 손자 손녀들과 같이 어울렸을 할머니는 어느 순간 낡은 빨간색 라디오 카세트에 찬송가 테이프를 주야장천 틀어놓고 성경책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넋 나간 사람처럼 주저리주저리 성경 구절을 소리 내어 읽고 가족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명절이면 항상 맛난 걸 챙겨주고 같이 손잡고 외양간에도 데려가고 엉덩이를 토닥이며 놀아주던 할머니의 모습은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싫어 싫어! 놓으란 말이야!"


한 번은 그런 할머니가 나의 손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할머니는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 카세트 앞에 표정 없이 앉아 성경책을 보며 빠져나가려 몸부림치는 나의 손목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그때 내가 본 할머니의 모습은 친근함에서 낯섦 이제는 공포로 변해있었다. 그렇게 할머니는 세상일은 뒷전으로 내팽게치고 신앙 속에만 사는 듯 보였다. 그렇게 점점 가족들과도 멀어져 갔다. 할머니는 신앙 속에서 평화롭고 행복했는지 모르지만 가족들은 그로 인해 고통받았다. 나는 옛날의 할머니만 할머니로 기억한다. 우리는 누군가를 과거의 기억 속에만 가둬놓고 살기 때문에 변화된 친구와 자녀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며칠 전에 쓴 서평[두 가지 외로움, (트렌드 코리아 2023)]에서도 얘기했지만 세상의 흐름(트렌드)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도태된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내용은 트렌드와는 반대로 얘기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이런 얘기를 목장 식구들과 나눴지만 나에게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았다. 내가 왜 이렇게 생각하는지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 [마태복음 5:10] -


과연 온전한 신앙 속에 있으면서 세상(사회) 속 섞여 평화롭고 온전하게 사는 것이 가능할까? 만약 가능하다고 말한다면 그건 신앙과 세속에 발을 걸치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왜냐 성경에서도 의를 행하는 자는 핍박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얘기하고 있다. 불법이 성행하고 시기 질투가 만연하여 사람들의 사랑은 점차 빛을 잃어가는 세상으로 변해간다. 하지만 견디고 버티는 자가 구원받는다고 얘기한다.


 그러니까 당신이 세상 속에서 의롭게 산다면 그 핍박과 고통이 그렇지 않은 자들보다 더 강해진다는 얘기다.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진 이유도 그러하지 않은가? 때로는 세상의 불의에 눈감고 유혹에 손을 건네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왜냐 나는 피 흘리며 십자가를 굳이 짊어지고 싶지 않은 것이다.


꺾여버린 가지


그럼 포도나무 안에 가지로 머물러 있으면 진리를 알고 과실을 맺을 수 있을 수 있다. 나라는 가지가 꽃을 피우고 과실을 맺으며 그 안에서 해를 거듭하며 풍성해진다. 하지만 언젠간 의도치 않은 상황으로 가지가 잘려나가는 상황이 닥칠 것이다. 그것이 아까 나의 집주인이 했던 질문처럼 극단적인 상황이거나 혹은 나의 할머니처럼 신앙 때문에 고립(신앙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되고 다른 이들에게 핍박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그릇된 답정너라는 타인의 욕망에 의해 나의 풍성한 가지는 무참히 잘려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서두의 성경 속 구절[요한복음 15:5~6]의 거룩한 면만 읽고 감명받으며 그 구절을 되새기고 또 되새기지만 그것이 품고 있는 이면의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아름답고 거룩한 모습에만 취해 있으면 그 이면의 상황과 모습에 직면했을 때 그 거룩했고 아름다웠던 순간은 모두 금방 잊히고 더 큰 절망과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만약 이면의 상황까지 받아들이고 신앙을 지킬 수 있다면 그건... 정말 신이 말하는 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인간이 아닐까? 우린 과거 역사 속에서 그런 신앙과 신념을 지키며 스스로를 희생한 사람들을 알고 있다. 우리가 그들을 추앙하고 존경하는 것은 그저 그들은 우리와 달리 상황과 트렌드와 상관없이 신념과 신앙을 지켰기 때문 아닐까? 그들 우리처럼 평범한 인간이었지만 그것 하나로 비범한 인물로 기억되는 것이다.

묘목

새로운 포도나무


당신도 언젠간 가지가 꺾여 땅에 떨어질 것이다. 의롭게 살고자 신앙과 신념을 지키려 했지만 의도치 않게 좌절하고 절망하는 순간들을 맞이할 것이다. 그냥 그대로 썩어 없어질 것인가 아니면 다시 뿌리내릴 것인가? 당신은 새로운 포도나무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당신은 이미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법을 알고 있다.


"신은 세상을 만들면서 곳곳에 반전의 씨앗을 숨겨놓았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보다 더 행복할 수 있고,

아픈 사람이 건강한 사람보다 즐거울 수 있고,

평범한 사람이 누구보다 비범한 삶을 살 수도 있다."


                   - 최인철 [아주 보통의 행복] 중에서 -


우리 모두는 평범하지만 비범한 존재이다.  단지 평범함 속에 비범함을 감추고 살아갈 뿐이다. 그저 드러나는 것이 두렵고 낯설고 세상의 트렌드와는 다르다는 이유로...


평범과 비범을 가르는 것은 꺾인 가지에 분노하고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꺾인 가지를 다시 바로 세우고 살리는 일이 아닐까?






*[메인사진 출처] Main Image by jplenio from Pixabay

https://medium.com/illumination/what-is-the-difference-between-ordinary-and-extraordinary-14a02b7fb42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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