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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Aug 13. 2023

이성과 신앙 사이

[고백록] 레프 톨스토이

"내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이성이 절실하게 요구되는데도, 신앙은 내게 삶의 의미를 깨닫고자 한다면 이성을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 책 속 인용문 - 


우리는 이성(理性)적이다. 아니 이성적인 사람이 되려 노력하며 살아간다. 지식과 학문을 닦고 교양을 쌓으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이 되고자 한다. 그런데 이성적인 시간들이 쌓여갈수록 우리의 마음속에는 풀리지 않는 허전함과 공허함 그리고 고통들이 쌓여만 간다.


왜 그럴까? 풀어도 풀어도 또다시 생겨나는 문제 해결의 과정은 마치 영원회귀의 과정처럼 무한 반복된다. 신은 인간에게 이성적인 문제해결 과정의 감옥(굴레)에 가둬둔 것이 아닐까? 인간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복잡하고 완전한 존재로의 발전 과정은 오히려 진리에서 멀어지고 있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주 단순하지만 인간에겐 이것을 깨닫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과정을 피해 갈 순 없다. 인간은 이성적으로 완전해지고자 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결코 완전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완전한 이성적임이란 끝이 없고 이건 마치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욕망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다. 이 과정이 아니라면 애초에 이성적인 완전함을 쫓지 않고 그냥 감성적이고 순종적인 양심에 따라 살아가면 된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말년에 그걸 깨달았을까,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농민의 삶을 살려고 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과거 예수가 보여줬던 포용의 사랑(아가페: agapē)을 알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구하는 자는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치지 말지어다. 찾았을 때 그는 괴로워할 것이다. 괴로워할 때 그는 경이로워할 것이니. 그리하면 그는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되리라.


"Jesus said, "He who seeks should not stop seeking until he finds. When he finds, he will be trobled. When he is troubled, he will marvel, and he will rule over all"


                              - [도마복음] 2장 -




레프 톨스토이, 러시아 대문호이자 사상가인 그는 불후의 고전 [전쟁과 평화], [안나카레니나]를 남긴 소설가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외의 수많은 위대한 문학 작품들을 남겼다. 하지만 나는 그의 [고백록]을 읽고 그가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이 이 땅에 온 이유에 대해서 고민하며 만유와 자신과의 관계를 규명하고자 고민했다. 그는 각종 실험학문(과학, 논리학) 들을 파고들며 이것을 찾고자 평생을 고민했다. 그 과정의 끝자락에서 그는 무언가를 깨닫고 자신의 과거 위대한 작품을 모두 쓰레기로 치부하며 일생일대의 회심을 하게 된다. 그는 무엇을 깨달은 것일까?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1828~1910)

"어떤 사람의 삶과 행실을 보고서 그가 신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그때도 불가능했고 지금도 불가능합니다"

                                            - 책 속 인용문 -


톨스토이는 모태신앙으로 어린 시절 교회와 함께 자랐다. 그는 교회 사제들의 부조리와 분열을 바라보며 이른 나이(18세)에 신의 존재를 부인하게 된다. 그리고 방탕한 젊은 시절을 보낸다. 하지만 그는 신이 내린 특유의 통찰력과 상상력으로 자신의 청년시절에 보고 듣고 읽고 겪었던 파란만장한 과거에 기초해 장편소설(사실문학)을 써 내려간다. 그렇게 [전쟁과 평화], [안나카레니나]가 탄생했다. 그리고 그는 러시아를 넘어 전 세계의 대문호로서의 명성과 그에 따른 엄청난 부를 거머쥐게 된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부자가 된 사람이 다스리게 놔두어라. 그리고는 그렇게 힘을 가진 자가 그것을 포기하게 놔두어라"

 

Jesus said, "Let one who has become wealthy reign, and let one who has power renounce it."


                                        - [도마복음] 81장 -


하지만 그에게 어느 순간부터 삶의 허무감이 밀려들었고 그는 자살까지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이 [고백록, 1879]을 계기로 회심을 하게 된다. 그의 문학은 전기와 후기문학으로 나뉠 정도로 회심 전후의 소설은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바뀐다. 회심 후 쓴 그의 후기 소설들은 대부분 기독교적 색채가 강한 소설이다. 아이러니 한 건 톨스토이의 걸작(전쟁과 평화, 안나카레니나 등)은 대부분 전기 문학이었다는 것이다.  


이건 마치 사도 바울의 회심과도 비슷하다. 치열하게 예수를 부인했던 그가 회심을 통해 예수의 추종자가 된 것처럼 톨스토이 또한 그동안 자신이 만든 작품들과 업적들을 부인하기 시작했다. 그가 이룬 명성과 부를 모두 사회에 돌려주고 자신은 평범한 농민의 삶을 살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부인 소피야와 엄청난 갈등이 빚어진다. 그녀는 그의 땅(영지)과 저작권(인세)을 포기할 수 없었다.


"아내가 절대로 나의 장례식에 오지 못하게 하라"


그는 추운 겨울 아내와의 불화로 집을 떠나 조그만 시골역에서 이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실제로 소피야는 톨스토이 장례식에 가지 못하고 죽어서도 그와 같이 묻힐 수 없었다고 한다. 무엇이 그의 삶을 이도록 변하게 만들었을까?


성인(聖人)은 글을 쓰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 4대 성인(예수, 부처, 소크라테스, 공자)에게는 특이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들은 글을 남기지 않았다. 그중에 공자는 논어(論語)라는 유명한 책을 남겼지만, 사실 그 책은 그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사도)들이 쓴 성경(신약)과 같이 그의 제자(증자)가 그의 말을 기록한 책으로 실제 저자는 공자가 아니다. 설마 그들이 문맹이었을 거라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알다시피 그들의 가르침은 항상 문답방식의 대화로 하는 토론 형식을 띠고 있었다. 그들은 직접 마주 보고 묻고 답하는 과정을 통해서 깨우침을 전했다. 그들은 글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대 성인


문자의 구속(한계)과 자유(상상)


당사자가 서로 눈을 바라보고 하는 대화에는 오해의 소지가 적다. 또한 헷갈리거나 이해가 안 되면 다시 물어 자신이 이해한 것과 같은지 확인할 수도 있다. 그리고 대면방식의 대화는 표정과 말투 그리고 제스처에 비언어적 의미가 섞여 있기 때문에 단어 그대로의 직역이 아닌 의역이 가능하다. 입과 눈과 몸의 조합으로 화자의 의미를 파악한다. 이것들이 따로 놀면 어색하다. 입은 슬픈 이야기를 하는데 눈은 웃고 있고 몸이 삐딱하게 앉아 있다고 생각해 보라.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다.


우리는 종종 직역된 외국 영화나 책을 보는 경험해 봤을 것이다. 요즘은 통번역이 잘되어 있어 그런 경우가 드물지만 과거엔 수많은 명작이 졸작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 이 번역(통역)의 과정에서 벌어졌다. 나는 과거 직장생활을 할 때 중국어 번역과 통역의 기회를 가졌던 적이 많아 이점을 잘 이해한다. 작가와 화자의 글과 말을 완전하게 똑같이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 우리는 작가의 표정과 눈빛과 어감까진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두 가지 언어에 모두 능통한 자만이 가장 유사한 정도로 전달할 뿐이다.


문자는 구속과 자유를 오고 가는 과정이다. 말(음성) 이 글(문자)이 되는 순간, 생각과 의견이 그 글과 함께 고정되어 버린다. 또한 이건 시대와 문화, 환경 그리고 언어의 차이에 따라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생긴다. 물론 이 점이 글이 사람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 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글을 통해 상상을 하게 되었지만 글을 통해 구속당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글을 읽고 글을 쓰며 구속과 자유를 계속 오고 가며 성장하고 변화한다.


아마 성인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말이 글이 되는 순간 그들이 당시 가졌던 뜻과 마음가짐이 한 곳에 못 박혀 버리고 또한 수십 수백 가지로 변형되어 퍼져나갈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는 그 원형을 알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 수많은 종파와 사이비들이 생겨나는 이유이다.


지성인(知性人)과 성인(聖人)


현대 사회 지성인들은 모두 글을 많이 읽고 또한 많이 쓴다. 이것이 지성인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지성인치고 책을 쓰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지성인이 되고 싶어 한다. 나 또한 나의 글에서 여러 번 강조했지만 읽고 쓰지 않는다면 성장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풋과 아웃풋의 과정이 성장에서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성장의 시간


5년 전 시작한 나의 글쓰기는 지금은 많이 달라져 있다. 이건 비단 나의 글쓰기의 형태와 방식뿐만이 아니다. 그 안에 담긴 내용과 생각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앎이 늘어갈수록 생각의 변화가 생긴다.


하지만 과거의 글은 과거에 못 박혀 있다(내가 모두 삭제하지 않는 이상). 만약 누군가가 5년 전 나의 글을 보고 지금을 나를 생각한다면 그자는 나를 오해하거나 잘못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 나는 그때와는 다른 글을 쓰고 있고 그 말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 변했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글의 맹점이다. 성장하는 인간이 쓰는 글 또한 성장하는 과정이 있다. 그래서 과거에 출판했던 유명한 책들을 시간이 지나 개정판을 재출간하는 경우가 많다. 이건 그 당시 생각이 지금과 약간의 변화가 생겼을 수도 혹은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오해의 소지를 방지하기 위해 글을 첨삭하거나 혹은 시대에 맞는 표현 방식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

Jesus said, "A prophet is not acceptable in the prophet's own town.


                                   - [도마복음] 31장 1절 -


성인들은 이점을 우려했을 것이다. 성장하는 자는 생각이 바뀌고 바뀐 생각은 글은 변화시킨다. 하지만 과거 나를 알았던 사람들은 과거의 모습으로만 기억할 뿐 현재의 모습을 알 수 없다. 나는 그들의 5년 전 기억 속에 여전히 못 박혀 있다. 만약 나의 글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모두(455편) 읽은 분이라면 내가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를 조금은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하지만 앞으로 또 어떻게 변할지는 나 또한 알 수 없다. 다만 쓰면서 변화하는 것이 절대 나쁘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하기에 계속 쓰는 것뿐이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이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글과 책들이 있다. 우리는 이런 책을 고전 혹은 경전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을 쓴 작가들도 형편없던 글을 쓰던 어린 시절(정신적으로)을 보냈을 것이다. 위대한 작가들이 쓴 책과 글이 모두 다 위대하지 않은 이유다. 많이 쓰면서 위대한 것이 탄생한 것이다. 성장의 시간을 거치며 탄생한다.


톨스토이의 회심(回心)


톨스토이는 지독한 글쟁이다. 엄청나게 많이 썼던 사람이다. 그도 분명 이런 성장의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글을 쓰며 수 없이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을 거쳤다. 그런데 그가 과거에 썼던 그 명작들을 부인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가 글을 통해 나아가고자 했던 지성인의 길이 결국은 자신이 궁극적으로 알고자 했던 진리(삶의 의미)에서 멀어지는 실패의 과정들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도덕적인 완전함이었지만, 그것은 이내 모든 것에서 완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뀌었고, 그것은 내 자신이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고자 하는 욕망이었습니다."

                                                                                        - 책 속 인용문 -


  그의 과거의 글들은 모두 자신의 과거의 그림자(욕망)들이었다. 그는 [전쟁과 평화], [안나카레니나]등의 소설을 통해 그 안에서 선과 악을 계속 오고 가는 삶을 살았다. 과거 현실(청년시절)에서 오고 가던 선악의 삶을 상상 속으로 옮겨와서 살아갔던 것이다.


그는 사실문학의 거장이다. 그의 소설은 그 시대의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소설이다. 그는 실제 전쟁에도 참전했고 사실성을 살리기 위해 군인들을 인터뷰하고 현지를 답사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리얼리티가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과 감동을 담고 있기에 아직도 고전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진정한 문학은 시대상과 그 시대의 사람들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소설가는 그 시대의 선악을 진정성 있게 그려내어야만 하는 사명을 띠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선과 악의 경계에서 양쪽을 모두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Happily ever after(평생 행복하게) 삶을 살고 싶지만 갈등과 시련 그리고 선악이 없는 밋밋한 스토리를 읽고 싶은 마음은 없다.


톨스토이가 회심을 한 것은 아마도 그런 과거 악을 상상하던 자신의 모습까지도 후회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리얼하게 상상하는 것과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우리 인간의 뇌는 구분하지 못한다. 톨스토이의 뇌는 분명 90% 이상 직관(Intuition)의 영역에 머물던 뇌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전 글[시간에 갇히다]에서 얘기한 바 있지만 뇌는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한다. 다만 우리가 지속적으로 현실을 인지하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는 것뿐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이성적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발전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문화를 통해 발전하고, 문화는 책과 신문(글)이 보급된 정도로 측정된다."

                                                                                                 - 책 속 인용문 -

      

톨스토이는 회심 이전에 자신이 하고 있는 글 쓰는 일에 대해 자기 합리화에 빠져있었다. 그는 문화를 발전시키고 인류에 유익을 가져다주는 존재로 스스로를 추앙했다. 그건 자신이 지극히 이성적인 삶을 추구한 결과라고 믿었다. 그 이성적임은 자신이 글을 쓴다는 것이었고 또한 그 글이 대중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한 것은 선을 향한 추구들이었지만, 나의 글 속에는 그런 것들을 일부러 외면하거나 가벼운 조롱거리로 다루는 방식으로 은폐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나의 시도는 성공했고 사람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 책 속 인용문 -


톨스토이는 어려서는 추상학문(철학, 논리학, 언어학, 미학등)에 관심을 가졌지만 그것들로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던 것 때문인지 말년에는 수많은 실험학문(수학, 자연과학등)들을 탐구하며 삶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이성적인 학문은 그의 갈증을 풀어주지 못했던 모양이다.


"학문이 보여주는 밝은 면에 이끌려서 그쪽으로 가면 갈수록, 내가 제기한 삶의 의문에 대한 대답으로부터는 점점 더 멀어질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책 속 인용문 -


여러 학문을 통해 쌓인 교양은 우리에게 이성적인 삶을 살도록 해준다. 또한 삶의 지혜를 안겨주고 세상의 많은 궁금증을 해소해 준다. 하지만 그것이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앎은 또 다른 앎을 갈구하게 만들고 이성은 더 철저한 이성적임을 요구받는다. 욕망과 같다. 끝이 없다.


톨스토이가 말년에 신앙으로 귀의하고 또한 농민의 삶으로 돌아가고 자 한 것은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길 밖에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나는 글을 알지도 배움도 없는 농부처럼 처음부터 아예 이 무한함(욕망, 이성, 지식등)을 알지 못하는 믿음 속에 살거나 아니면 이 무한함과 유한함(삶)을 연결시켜 줄 고리를 찾아야 만 하는 것이었다. 힘들게 돌아가는 과정이다.


"이성에 기초하지 않은 지식은 내가 거부할 수 없었던 그것, 즉 신앙이었습니다."

                                       

                                           - 책 속 인용문 -


톨스토이는 마치 철학자나 과학자처럼 하나님(신)의 존재 유무를 증명하려 이성적인 사고와 추론으로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오히려 그것과 멀어지는 과정이었으며 이건 오히려 자신의 마음과 정서로부터 생겨나 그냥 느끼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는 평생을 이성과 신앙사이를 오고 가며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고 결국 이성으로는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나는 사실 이 책을 읽고도 톨스토이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그가 했던 고뇌의 모든 과정을 내가 아직 거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 또한 지금 이성적으로 삶의 의미를 찾아가고 있는 과정인 것임을 분명해 보인다. 이성의 욕망에 눈을 뜬 이상 멈출 수가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이성만으로는 뭔가 부족함이 있다는 것이고 그 부분 근거 없는 믿음(신앙)이 메꿔주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 그 빈 구멍을 채울 무언가를 아직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이성적일 수만 없는 이유이다.


그렇기에 오늘도 그 풀리지 않는 무언가를 생각하며 예배당에 앉아 이성과 신앙사이를 오고 간다.


당신에 삶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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