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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Nov 24. 2022

감성과 지성 사이

[서가 명강 05 - 왜 칸트인가] 김상환 - 두 번째 이야기 -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순수이성비판] 초판 51쪽 -


어렵다. 이 문장을 읽고 단번에 이해가 된다면 당신을 존경한다. 책을 읽던 중 이 부분이 오랫동안 뇌리에 자리 잡고 떠나지 않았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만든다.


"감성 없는 지성은 딱딱하고, 지성 없는 감성은 순간적이다."


내가 말을 좀 바꿔 보았다. 어떤가? 여기서 직관은 감성(感性)이고 개념은 지성(知性)이다. 같은 문장이라고 어떤 어휘를 쓰느냐에 따라 이해와 공감도는 달라진다. 칸트는 너무 어렵게 쓴다. 그리고 저자의 글도 쉽진 않다. 하지만 어려울수록 성취감은 커진다.


칸트의 세계에 조금씩 빠져들고 있다. 어렵다. 어려워서 더 파고들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매력 있다. 만약 내가 다른 철학을 접하지 않고 칸트를 봤다면 금방 나가떨어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왜 철학을 칸트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지 알 것 같다. 칸트 이후의 철학을 드려다 보면 칸트의 철학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니체도 쇼펜하우어도 마르크스도 에리히 프롬도 모두 그의 철학 범주에 포함되어 있으며 그들은 그의 철학에서 세분화, 개성화되고 더 전문화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교과서 같은 범생 철학자


만약 서양철학에서 칸트를 가장 먼저 접한다면 그 자는 아마 철학에 흥미를 금방 잃어버릴 가능성이 크다. 칸트의 철학은 뭐랄까. 우선 완벽하다. 그래서 마치 교과서 같으며 모범답안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삶 또한 정말 모범적이고 건전한 삶을 살았다. 그가 회색 코트를 입고 지팡이를 집고 캠퍼스 안 보리수나무 아래를 걸으며(석가모니?!) 사색과 명상을 즐기는 때는 정확히 오후 3시였다고 전해진다. 새벽 5시에 기상해서 홍차를 마시고 7시에 강의를, 9시부터 집필에 들어간다. 1시에는 산책 전까지 친구들과 식사와 대화를 겸한 토론을 즐겼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의 행동으로 시간을 측정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히 정해진 자신만의 일과표를 지켰다.


독신의 삶


그는 평생 독신의 삶을 살았다. 그가 쇼펜하우어나 니체처럼 여자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 결혼을 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는 이전 글[진선미의 철학]에서 언급했지만 신실한 기독교 신앙 아래서 어머니의 사랑과 지지를 받으며 자랐다. 비록 그는 작은 체구와 허약한 체질을 타고나긴 했지만 치우치지 않은 온전한 성품과 사교성을 지닌 청년이었다. 문제는 너무 곧고 바른 그의 성격이 이성과의 사랑을 차단하는 요인이 된 모양이다.


그의 철저한 일과표에 맞춰줄 여자를 찾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여자를 만나려면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내어주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상식이 그에게는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이성 간에 성욕이나 사랑보다 자신이 하고 싶고 해야 하는 소명 의식이 더 강했다.

임마뉴엘 칸트 [사진출처 www.flickr.com]

너무 바른 남자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좋아하는 여성이 두 명 있었다고 전해진다. 한 명은 혼자 질질 끌며 짝사랑만 하다 자신보다 적극적인 남자에게 그 여자를 뺏겼고 또 다른 한 명 또한 한동안 뜸을 들이다가 큰 맘을 먹고 청혼하려 했지만 그땐 이미 그 여성이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나고 없었다고 한다.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말이 여기서 또 회자된다.


칸트는 여자가 봤을 때 참 한심하고 어이없는 남자였을 법도 하다. 이상하지만 여자들은 교과서적이고 모범적인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입으로는 착하고 바른 남자를 외치지만 그녀들의 구미를 당기는 남성은 법적, 도덕적, 윤리적인 한도 안에서 가끔씩 비모범적 혹은 일탈적인 성향을 보이는 남성에게 더 끌리는 것 같다. 내가 여자라도 매일 일과표에 맞춰서 살아가는 로봇 같은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기는 쉽지 않을 듯싶다. 정해진 시간에만 데이트하고 키스하고 섹스한다면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남녀의 사랑은 일종의 일탈과도 같은 거라서 가끔씩은 일상에 벗어난 말과 행동이 사랑의 신선도를 유지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남자도 불안하지만 너무 한결같이 남자도 지겹다. 그래서 남녀의 사랑은 어렵다.

 

그런데 만약 칸트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미고 자녀를 양육하는 삶을 살았다면 철학계에 길이 남을 대업을 달성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도 생긴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 거대한 업적을 남기고 간 자들은 외로운 자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으로서 다른 반쪽과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떠났기에... 어찌 보면 의미 있는 삶은 무언가를 포기한 대가로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많은 이들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자는 항상 고독과 고통의 시간이 함께한다.


제목의 중요성


서론이 길었다. 내가 쓴 글 중에서 가장 조회수가 많은 글은 [이성과 감성 사이]이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하던 초창기 유저 유입과 충성도를 올리려는 플랫폼의 의도적인 노출 시기에 (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치밀한 AI의 알고리즘의 유혹에 이 플랫폼 충성 유저가 되었다는 것은 이제 알만한 브런치 유저들은 알 것이라 생각한다) 단기간 미친 조회수를 올린 몇 개의 글을 제외하고는 평균적으로 매일 가장 높은 조회수를 올리고 있다. 검색어에서 노출이 많이 되는 듯 하다. 그 만큼 사람들이 이런 인간의 이성과 감성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음을 시사는 것 같다. 제목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감성과 지성


이성은 칸트의 철학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간의 능력이다. 그만큼 그의 저서에는 이성이라는 단어가 아주 많이 출몰한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이성을 제외한 3가지에 대해서 얘기해 보려 한다. 이성은 할 말이 너무 많다.


"감성이 자극의 내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이라면, 지성은 감성을 통해 주어진 잡다한 내용을 능동적으로 종합하는 능력이다"

                                                                                  - 책 속 인용문 -


감성(感性)은 우리의 오관(五官 = 눈, 귀, 코, 혀, 피부)을 통해 세상을 인식하는 능력이다. 컴퓨터로 치면 키보드, 카메라, 마이크 같은 인풋(Input) 장치 혹은 센서(Sensor)라고 보면 될 듯하다. 그래서 우리의 오관중 어느 하나라도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세상을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이 생긴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과 듣지 못하는 사람, 냄새나 맛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화상으로 피부조직이 손상된 사람들은 세상을 받아들이는 인식 구조가 일반인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들은 손상된 감각기관 대신 다른 기관들이 더 발달하기에 일반인이 느끼지 못하는 세상을 느끼기도 한다. 예를 들면 눈이 멀면 우리를 자극하는 수많은 시각적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섹시한 이성의 유혹, 각종 자극적인 영상들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감각들로 시각적 정보를 생성해야 한다. 전두엽에 이미지화하기 위해 일반인들이 멍하게 이미지와 영상을 도장 찍듯 옮길 때 그들은 열심히 상상의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이건 마치 글을 읽고 그 장면과 상황을 떠올리는 것처럼 글이 아닌 청각, 후각, 촉각, 미각으로 장면과 상황을 떠올리는 또 다른 메커니즘을 사용해야 한다. 중요한 건 뇌가 분주히 일을 한다는 것이다.

지성 [사진출처 : www.educationalneuroscience.org.uk]


"지성은 감성적으로 주어진 잡다한 내용에 일정한 형태를 부여하는 능력이다."

                                                                                               - 책 속 인용문 -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인풋 장치는 계속 작동하고 있다. 수많은 정보들이 유입된다. 대부분은 아무런 작용이나 영향이 없이 그냥 흘러지나간다. 인풋 정보를 의미 있는 정보로 만들기 위해서는 능동적인 작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 내가 키보드에 손을 올려놓고 시각(책 속 글)과 청각(오디오북)을 통해 들어온 정보들을 뇌가 재해석하는 과정을 거쳐서 손가락을 통해 다시 글로 내보내는 아웃풋(출력) 작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출력하는 정보는 내가 인풋 한 정보의 1/10도 아니 1/100도 되지 않는다. 아웃풋은 인풋의 양보다 적을 수밖에 없다. 왜냐 나의 뇌가 책을 읽는 모든 시간 능동적인 지적 활동을 한 것이 아니고 많은 정보는 흘려보내고 나에게 의미 있는 정보들만 축약되고 연결되어 기존의 나의 지성의 틀 안에서 정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의미 있는 정보들은 지금 글로서 일정한 형태가 갖추어지고 정리되고 종합된다. 이건 마치 수많은 파일들이 바탕화면에 너저분하게 깔려있던 것을 버릴 건 버리고 폴더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이다. 나중에 내가 쉽게 다시 꺼내 상기시키고 이용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글을 남기고 업로드하면서 생각이 정리되고 보관되며 색인(引)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감성과 지성은 원래 물과 기름처럼 상극적이라는 데 있다.... 이 배타적인 능력을 화해시키는 제3의 매개자가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상상력이다."

                                                                                             - 책 속 인용문 -


정말 극 공감하는 부분이다. 나도 글을 쓸 때 이걸 느낀다. 시각과 청각으로 인풋 된 감각 정보들을 뇌가 재해석하고 나의 지성의 틀 속에 정리해 집어넣는 것이 가장 힘들고 어렵다. 내가 노트북을 열고 한참 동안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고 커서만 깜빡거리는 것은 지금 나의 감성과 지성이 열심히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형국과 같다. 감성은 버티고 지성은 빼내려 한다. 그 사이에서 상상이 피어오르면 감성을 지성 쪽으로 밀어준다. 그러면 지성이 이기고 글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한다. 지금처럼...

상상력 [사진출처 : Pinterest]

상상력이란 연결고리


사람마다 아웃풋의 방식이 다르다. 누군가는 감성을 그림, 조각, 몸짓(춤) 혹은 음악으로 표현하고 누군가는 재창조된 의미 있는 영상(영화, 다큐멘터리, 드라마 등)으로 종합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또 누군가는 나처럼 글로 표현하는 것이다. 감성이 지성으로 표현되려면 이 상상력을 다리를 거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인간이 가진 가장 중요한 능력은 바로 이 상상력인 것이다.


"상상력이 감성에서 출발해서 그 직관의 내용을 지성에 전달해 줄 때다. 이 경우 상상력이 하는 일을 '종합(Synthesis)'이라 한다. 반대로 상상력은 지성의 개념에서 출발해서 감성적 직관의 내용을 그것에 부합하도록 가공해주기도 한다. 이 경우 상상력이 하는 일을 '도식화(Schematize)'라 한다."

                                                                                                    - 책 속 인용문 -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은 전자에 해당한다. 종합하는 상상력이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글(칼럼, 서평, 기사, 논설, 논문, 에세이등) 즉, 논픽션이 이에 해당한다.  이건 감성-> 상상력-> 지성으로의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과 주장을 직접적, 논리적 그리고 체계적으로 종합하는 과정이다.


그럼 그 반대 지성-> 상상력-> 감성으로의 움직임은 무엇인가? 예상했겠지만 픽션이다. 소설, 시나리오, 극본 등으로 작가의 생각을 서사와 묘사로서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야기 속에 지성을 녹여 넣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만사를 서사와 묘사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건 그림, 조각, 춤, 음악, 영화 등과 같은 다른 예술들도 마찬가지이다. 지성이 도식화되고 예술로 승화되는 과정이다.

예술가 [사진출처 : www.thejakartapost.com]

전문가와 예술가


예술가는 칸트가 제일 마지막에 쓴 [판단력 비판]의 종결점이라고 볼 수 있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예술가의 경지를 인간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라고 얘기한 데는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요즘 나는 논픽션의 글을 계속 쓰고 있다. 하지만 마음은 계속 픽션을 갈망한다. 논픽션의 뇌구조로 변해가는 내가 너무 안타깝다. 하지만 픽션을 쓰려고 하면 손가락이 잘 움직이질 않는다. 과거 미친 듯이 소설을 쓸 때가 기억난다. 그때는 알기 힘든 희열을 느꼈다. 지금 논픽션을 쓸 때도 그런 기분이 들긴 하지만 픽션을 쓸 때에 비하면 초라하다.


글 쓰는 사람에는 두 종류가 있다. 삶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과 의미에서 삶을 그려내는 사람이다. 전자는 전문가나 글쟁이이지만 후자는 예술가다. 우리는 데일 카네기 혹은 유시민 그리고 이 책의 저자 김상환에게 예술가의 칭호를 주지는 않는다. 그들은 글 쓰는 전문가(지식인)이지 예술가는 될 수 없다. 안타까운 점은 전문가는 부를 얻고 생전에 명예를 얻지만 예술가는 가난하고 죽고 나면 빛을 발한다. 그래서 세상에 전문가는 넘쳐나도 예술가는 적은 것이다.


결국, 상상력이다. 상상력 없이는 우리는 감성과 지성 사이를 오고 갈 수 없다. 인간만이 가진 상상력이란 힘은 우리가 발전하고 아름다워지는 원천인 것이다. 나는 오늘도 이 상상력 속에서 한 편의 글을 남긴다. 다음번엔 이 상상력이 지성에서 감성으로 가는 다리가 되어주길 바란다.


당신은 지금 감성과 지성 사이에서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가?

왜 칸트인가


[표지 사진 출처 : https://www.intelligenttrans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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