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짓는 목수 Mar 09. 2023

정죄하는 인간

삶을 공부하며... - 두 번째 -

"우리(당신)는 죄인입니다."

"뭔 소리야? 내가 왜 죄인이야?"


누가 말했다. 우리(내)가 죄인이라고? 죄는 부정의 상징이다. 죄인이라는데 기분 좋을 사람이 있겠는가? 죄 없이 즐겁게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자에게 갑자기 없던 죄가 생겨났다.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자(무죄)에게 죄를 씌우려는 자(정죄)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시작부터 뭔가 불화의 조짐이 느껴진다.




원죄 (성악설)


기독교에서는 원죄를 얘기한다. 우리 모두는 태어나면서 죄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성악설에 가깝다. 때 묻지 않은 티 없이 순수한 아기의 얼굴에서 죄인의 모습을 떠올려야 한다. 쉽지 않다. 어찌 보면 죄는 순수함과 아름다움에 가려져서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원죄를 받아들이면 우리가 가정을 일구고 아이를 가지는 것 또한 죄를 영속시키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되어버린다. 죄를 가진 인간을 계속 만들어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죄를 저지르는 과정이기에 숨어서 섹스를 하는 것인가.


창세기에서는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가 눈이 밝아져 자신의 벗은 모습에 수치심을 느껴 몸을 가렸다고 한다. 자의식이 생겨난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자의식을 죄의식과 동일시한다. 인간이 자유의지(욕망에 이끌려)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부정한다. 세상은 그렇게도 자유의지를 강조하고 부추기지만 신앙은 그 반대이다. 아이러니하다. 그래서 신앙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내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이다. 내가 의도하고 계획한 데로 삶이 살아지지 않음을 하나님의 의도라고 보는 것이다. (이게 틀리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세상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많이 경험했기 때문이다.)


의지 박약자


하나님과 성경을 이해하고 공감하지 못한 자들에게 이런 논리는 자칫 의지 박약자로 비칠 수 있다. 모든 게 하나님의 계획대로 된다는 말은 내가 계획하고 성취하는 하는 모든 노력이 헛되다고(무의미하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방학이 다가오면 동그란 일과 계획표를 만들어 알찬 방학을 보내려 했던 기억이 있다. 계획표대로 방학을 보내는 학생이 몇이나 될까. 작심삼일이다. 하지만 세상은 왜 우리에게 그렇게도 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을 강요하고 교육했던 것일까?


정죄(定罪)하는 인간


그것이 인간이 인간을 정죄(定罪 : 죄가 있다고 단정)하고 평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계획하고 의도한 것을 실현시키지 못한 즉 성과와 목표를 이루지 못한 인간을 의지와 노력이 부족한 자로 정의한다. 그리고 자신 또한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된다. 자신의 열등함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서열을 만들어 열등한 인간과 우등한 인간으로 구분되고 지배와 피지배의 역할을 가지게 된다. 계획과 의지를 잘 관철시키는 자에게는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이 주어진다. 그리고 점점 그것에 중독된다. 그리고 그렇게 교육받은 우리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모두의 계획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다들 판사, 검사, 의사, 교사, 박사등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고 부와 명예가 따르는 지성인이 되고자 한다. 그래서 죽어라 공부만 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판사, 검사, 의사, 교사, 박사가 될 수 없다. 청소부도 있어야 하고 레스토랑 점원도 있어야 하고 택시기사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가 타고난 소명은 무시하고 세상의 기준에 부합하는 목표와 계획에 따라 노력과 달성여부로 우열을 정한다. 열등과 우등은 인간이 스스로를 정죄하면서 만들어 낸 것이다.  


교육은 세뇌의 다른 말


우리는 어려서부터 국가와 사회가 만들어놓은 교육시스템에 길들여져서 자라왔다. 그것이 신앙의 길과 다르다고 해서 피해 갈 수 없다. 의무 교육은 법적인 강제성을 띄고 있다. 그래서 시스템이 무서운 것이다. 내가 어떤 나라 어디에 태어나느냐에 따라 나의 정신세계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밖에서 보면 중국과 북한의 공산당을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안에 있는 자들은 우리를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교육은 너무도 중요하다. 상대적인 것이다.


몇 십 년간 세상의 교육시스템에 길들여져 법과 질서 그리고 사회와 국가가 요구하는 것에 맞춰 열심히 살아온 자에게 갑자기 죄를 뒤집어 씌웠다. 화가 날 법하다. 나를 언제 봤다고 나를 얼마나 안다고 그런 말을 내뱉는단 말인가? 내가 살아온 삶을 부정하는 자에게 누가 호의적일 수 있겠는가? 이게 기독교가 그동안 사람들에게 다가갔던 방식이지 않았을까?

예수천국 불신지옥

"예수천국불신지옥"


이런 말을 외치며 이거 아니면 저거라는 논리로 내가 지옥으로 떨어질 삶을 살았다고 얘기하는 자와 무슨 대화를 하고 싶겠는가?


이제는 타인에게 다가가는 법이 달리 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알고 있고 깨달은 것을 빨리 그리고 많이 알려주려는 의도는 이해하지만 계획은 의도대로 되지 않는 법(그들이 말하는 것처럼)이다. 나의 계획함은 언제나 깨지기 마련이다. 계획은 내가(말하는 자, 話者)가 했지만 그 계획의 실현 여부는 너(듣는 자, 聽者)에게 달려있다. 문제는 나의 계획이 치밀할수록 당신은 오히려 빠져나가려 발버둥 친다. 그럼 대화는 듣는 자에게 맞춰야 한다.


말은 화자를 위한 것인가? 청자를 위한 것인가?


대화의 목적이 무엇인가? 뭐 대화의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함이다. 문제는 대부분 화자는 과거 자신의 상황과 환경에서 이해한 데로 상대방에게 접근한다는 것이다. 그럼 나와 같은 상황이었던 사람만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나와 같지 않다면 절대 이해할 수 없다. 그럼 감성으로 접근해 공감부터 이끌어내야 한다.  


느닷없이 나에게 죄인이라고 하는 자에게는 방어기제가 발동할 수밖에 없다. 나의 존재를 부정으로 시작했다. 팔짱을 끼고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어디 들어보자는 자세로 앉아 이성과 지성의 뇌가 풀가동하며 상대의 말에 허점이 없는지 세심히 살피게 된다.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은 없다.  

 

"저는 죄인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떤가? 우리는 궁금증과 호기심이 발동한다. 그리고 화자를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는 방금과는 180도 바뀌게 된다. 상체를 기울이고 숙연한 표정과 자세로 화자의 말에 집중하게 된다. 이때는 이성이 아닌 감성의 귀로 말을 듣게 된다.


신앙은 이해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터치)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에서 너무도 오랜 시간 이성과 지성의 뇌로 보내왔다. 마음이 위로받고 쉬어야 할 곳까지 이성의 뇌로 이해하고 분석하고 싶지 않다. 감성을 자극하고 궁금증과 호기심 그리고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타인의 입을 통해 내 얘기를 듣고 싶지 않다.


"넌 그 말버릇 좀 고쳐!"

"나는 여기 마음이 너무 아파 네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어떤 게 나은가? 너를 얘기하기보다 나를 얘기해야 한다. 너의 행동과 말에 포커싱 하기보다 그로 인한 나의 마음 상태를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 그리고 그 상태를 상대에게 알려줘야 한다. 나를 먼저 들여다봐야 하는 것이다.


앞서 썼던 글[관계가 힘든 이유]에서 설명했다. 우리는 신앙과 관계를 이야기하기 전에 내가 먼저 바로 서야 한다. 내가 먼저 바로 서기 위해서는 내 안을 유심히 그리고 깊이 들여다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이 과정이 없이 관계 속으로 섣불리 나아가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 주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상대방의 마음이 뜨거워지기만을 바라며 말하고 행동한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은 차갑고 냉철한 자세로 행동하고 말한다. 그럼 상대방은 차가워질 수밖에 없다. 이건 자연의 법칙(열역학 2법칙)이다. 에너지는 뜨거움에서 차가움으로 이동한다. 차갑고 냉철함에서 뜨겁고 온화함으로 이동하지 않는다.


내가 말하고 행동할 때 뜨거워지면 상대방도 자연스럽게 뜨거워지는 것이다.


이전 글에서 얘기했듯이 냉철함과 이성적임은 때와 상황이 있다. 지식과 논리와 효율과 법칙을 따질 때 사용하는 것이다. 신앙과 관계는 그런 것이 아니다.  나 또한 과거 아니 지금도 사람들 앞에서 얘기할 때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얘기하려고 한다. 왜냐? 세상이 그렇게 가르쳤고 우리는 어눌한 사람을 무시하고 깔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말을 할 때 보통 이런 성향이 드러난다. 하지만 내가 글을 (특히 에세이나 소설) 쓸 때는 좀 달라지는 것 같다. 마음이 뜨거워진다. 이 뜨거움이 독자들에게도 전달되는지는 모르지만 나의 뜨거움은 어딘가로 전달될 수밖에 없다. 왜냐 이건 변하지 않는 불변의 법칙(열역학 제2법칙)이라고 설명했다. 에너지는 보존되고 전달되고 전환될 뿐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고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뜨거움은 언제나 차가움에게 따뜻함을 내어준다. 지식인과 지성인들은 항상 냉철하고 차분한 자세와 어조로 상대방을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려 한다. 그래서 세상은 계속 차가워지는 것이다.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차갑게 식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보며 뜨거워진 이유가 아닐까?


누군가에게 내가 아는 무언가를 간절하게 전하고 싶은가? 그럼 뜨겁고 따뜻하게(열정적으로) 나에 대해 얘기해라. 그럼 그 자는 당신에게 귀 기울일 것이다.


우리와 네가 아닌 내가 먼저 죄인이 되어야 한다. 예수가 그러했듯이...

 죄인이 된 예수
매거진의 이전글 AI에게 나에 대해 물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