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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Mar 13. 2023

사랑을 떠나 살 수 없는 이유

시선과 사랑에 관한 상념

그녀는 그를 바라봤고 그는 그녀를 바라봤다. 그 사실을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둘만이 알고 있었... 아니 느끼고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수많은 군중 속 모든 시선이 한 곳을 향해 있을 때 둘의 시선은 서로를 향해 있었다. 간헐적으로 마주치는 시선에서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 피어난다. 그 기분이 싫지 않다.


서로는 시선이 마주치길 갈망하면서도 막상 시선이 마주치면 그 시선을 피했다. 시선을 통해 들어온 빛이 자신의 마음속을 훤히 밝혀 들여다볼 것만 같았다. 마주치는 시선이 어색하지만 그 마주침이 또 설렘을 가져다준다. 우연을 가장한 시선의 마주침이 늘어날수록 우연은 필연이 아닐까 하는 근거 없는 예감을 가져다준다. 서로는 그렇게 서로를 바라본다.                                        

                                                                                  [자작 소설 중에서 발췌...]

시선




사랑의 시작


남녀의 사랑은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며 시작된다. 호감이 가는 이성이 있다. 그러면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 호감 가는 이성에게로 향하게 된다. 자연스럽던 시선은 점점 빈도와 강도를 더해가며 의도적인 시선으로 변해간다. 시선을 통해 들어온 상대방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상상의 연결고리를 만들고 아직 뚜렷한 정체를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킨다. 이건 마치 과거 추억의 사진 한 장을 보면서 당시 앞뒤 상황과 맥락이 희미하게 연결되고 스토리가 만들어지는 것과 같다. 그럼 없던 감정이 생겨나고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띠게 된다. 이야기는 항상 시선을 사로잡는 한 장면 혹은 한 글귀에서부터 시작된다.


두 가지 시선


우리는 호감 가는 이성의 모습을 끊임없이 스캔하고 싶다. 왜냐 그래야만 내가 기억 속 상대의 여러 이미지를 통해 상상을 만들고 그 상상을 통해 상대가 없을 때도 그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시선이라는 것이 호감일 수도 혹은 비호감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확률은 5:5이다. 시선을 줘봐야 알 수 있다. 호감의 시선은 어색하지만 설레고 비호감의 시선은 긴장되고 불쾌하다. 하지만 이 시선이 호감이건 비호감이건 시선으로 인해 받는 나의 감정 상태를 있는 그대로 상대에게 표현할 수도 없다. 우리에겐 타인의 시선을 제한할 어떠한 권한도 없기 때문이다. 볼 권리도 인권이다.  


시선은 관찰이다


시선은 관심의 가장 기본적인 표현이다. 시선은 관찰이고 관찰은 궁금이다. 보는 것은 관찰의 시작이다. 특히 동양사람들이 이 시선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다. 예로부터 벼농사를 하며 다닥다닥 붙어서 모내기를 하던 조상들은 눈만 봐도 대충 안다. 또한 비교적 인구밀도가 높은 집약적인 생활을 해온 동양인은 근거리에서 마주하는 시간이 많아 눈으로 서로의 의중을 읽는 능력이 발달했다. 반면 드넓은 대륙에서 밀농사를 지으며 생활했던 서양인들은 멀리서도 잘 보이는 입모양에 집중했다. 동양은 눈, 서양은 입을 통해 상대방의 심리를 파악한다. 그래서 동양사람들은 눈을 가리면(감추면) 답답하고 서양사람들은 입을 가리면 답답해하는 이유이다


보기에서 듣기와 만지기로


보는 것에서 다 채워지지 않은 궁금증은 듣기로 이어진다. 들으려면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듣기가 가능하려면 보기에서 호감이 생겨야 가능하다. 호감은 다가옴을 받아들이지만 비호감은 다가옴에 적의를 느끼기게 된다. 때문에 호감이 없이는 듣기의 영역인 개인적 거리(Personal zone :0.45-1.2m)로 진입하는 것이 쉽지 않다. 만약 듣기에서 더 큰 호감을 얻었다면 다음은 만지기(터치)의 영역 친밀거리(Intimate zone : 0.5m)로 넘어간다. 이 단계는 이제 호감의 단계를 넘어섰다. 상대에 대한 신뢰가 생겼음을 의미한다. 비즈니스에서 처음 만난 사람끼리 악수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비즈니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신뢰이기 때문이다. 보기와 듣기 다 생략하고 빨리 돈을 버는 것이 우선이기에 손부터 잡고 본다. 하지만 남녀관계는 비즈니스로 접근하면 낭패를 보게 되는 이유이다.


시선에서 상상으로 그리고 현실로


시선을 통해 기억된 호감 가는 사람의 이미지는 머릿속에서 상상으로 재현된다. 그러면 입가에 미소가 감돌고 기분이 좋아진다. 문제는 아직 사랑이 시작되지 않았기에 자신의 상상 속에서 사랑을 먼저 시작하는 것이다. 상상은 자유지만 현실은 자유롭지 않다. 시공간 속에 갇힌 현실의 사랑은 고려해야 할 너무나도 많은 조건과 제약들로 때론 구속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현실의 사랑은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판타지 사랑이 유행하는 것일까...


문제는 이 상상이 현실이 되지 못하고 길어지면 점점 고통으로 변해간다는 것이다. 볼 때마다 설레던 감정은 시간을 먹으며 애태우는 감정으로 변해간다. 애태움이 길어지면 그 감정은 어느새 고통으로 변해있다.


 ♩♬마지막까지도 하지 못한 말

혼자서 되뇌었었지

사랑한다는 마음으로도

가질 수 없는 사람이 있어

나를 봐 이렇게 곁에 있어도

널 갖지 못하잖아 ♪♫

                                    - 뱅크 [가질 수 없는 너] -


과거 대학생 시절 술에 취하면 이루지 못한 옛 짝사랑을 떠올리며 부르던 노래가 있었다. 이루지 못한 사랑은 간절한 노래가 되어 밀폐된 공간 속에 울려 퍼진다. 나만 듣고 나만 위한 노래이다. 그 노래가 이어지는 동안 머릿속에는 상대와의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간다. 서로 오고 가던 시선 속에서 기억된 상대방의 스틸 컷(Still cut) 장면들이 이어지고 애절한 선율과 함께 어우러지며 감정이 북받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그렇게 상상의 사랑은 현실이 되지 못하고 아픈 추억의 사랑으로 남는다.


사랑의 수고(아픔)


사랑은 시간을 통해 그 모습을 바꿔간다. 시작은 설레임이고 나중은 아픔이 된다. 시작은 상상이고 나중은 현실이다. 사랑에 빠지면 시간이 멈춘 듯한 둘만의 황홀한 세계에 빠지지만 그 순간은 지나갈 수밖에 없다. 사랑 뒤에는 수고(아픔)의 대가가 찾아온다. 신이 인간을 시간에 가둔 이유이다. 사랑을 가지려면 수고(고통)를 함께 가져가야 하는 것을, 시간 속에 사랑이 변해감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우리는 수고를 뺀 사랑을 원한다. 물질문명 속에 편리함, 깨끗함, 포만함에 길들여졌기 때문일까. 사랑도 황홀함만 쏙 빼서 가져가고 싶다.


사랑이 이뤄지면 현실을 바라보고 현실이 충족되면 사랑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과 현실이 절충된 타협된 사랑을 찾게 된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현실의 편안한 사랑이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설레고 뜨거운 사랑은 항상 상상(드라마, 소설, 판타지) 속에서 대리만족 하는 것일까?


가질 수 없는 사랑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 보이지 않는 것을 가지려고 안달이다. 물질문명은 소유함에 근거한다. 세상 만물을 만든 것은 신이지만 그 소유는 모두 인간의 것이다. 주인 없는 물건이 없다. 그렇게 우리는 무언가를 소유하려 애쓰며 살아간다. 눈에 보이는 물질은 그게 어렵지 않다. 가격을 매기고 매매를 하면 되니까. 하지만 이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게 쉽지 않다. 가격을 흥정하고 상대의 몸과 시간을 잠시 소유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렇다고 상대의 마음까지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괴로워한다. 돈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돈으로 가질 수도 없지만 돈 때문에 가질 수도 없는 것이 될 수 있다. 사랑은 현실(생계)과 상상(감정)의 가운데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사랑이 꺼지지 않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서로에게 상상과 현실의 만족을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칠 수가 없다. 우리가 온라인(On-line)에서만 혹은 오프라인(Off-line)에서만 살 수 없는 지금의 현실처럼...

Seesaw

시소(seesaw) 타는 사랑


사랑은 마치 시소 위에 앉아 있는 것과 같다. 현실과 상상의 두 영역을 끊임없이 오고 간다. 나와 네가 시소의 양쪽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며 오르락내리락하며 유희를 즐긴다. 만약 한쪽으로 기울어져 시소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타고 있던 둘은 점점 흥미를 잃어버린 아이의 얼굴처럼 굳어질 것이다. 때론 현실을 걱정해야 하고 때론 감정에 집중해야 한다. 때론 수고를 감수하고 때론 서로의 감정을 이해해야 한다. 단순한 듯 하지만 쉽지 않은 놀이와도 같다.


사랑의 또 다른 이름...


시선에서 시작된 설레임이 점점 그 모습을 바꿔간다. 애태움이 찾아든다. 이때부터는 기존의 일상에 조금씩 균열이 생긴다. 가만히 두면 그 균열이 커지며 애태움이 고통으로 변한다. 그 고통이 삶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 틈(균열)을 채워야 한다. 사랑으로 그 고통은 치유된다.


하지만 사랑이 스며들지 않고 채워지지 않은 자리는 그대로 머물 수 없다. 균열이 생긴 자리가 메워지지 않으면 균열은 커져가고 결국 무너진다. 다른 일상으로 자리를 옮겨야 한다. 그렇게 사랑은 상처를 남기고 떠나간다.


"사랑은 분명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 김혜남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중에서 -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은 치유이고 또 상처이다. 그렇게 사랑은 때론 상처를 남기고 또 치유하며 성숙한다. 사랑하는 자는 성숙한다. 사람이 사랑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이유이다.


지금 사랑하고 있는가. 그럼 당신은 성숙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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