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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May 29. 2023

이상과 현실 사이

[소울메이트]를 보고 난 후...

"그때 처음 알았어 마음도 그릴 수 있다는 거..."


- 극 중 '하은' 대사 중에서 -


만약 마음을 그릴 수 있다면 우리는 마음을 눈으로 볼 수 있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다. 간혹 그 보이지 않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보이는 것들에 가려 혹은 보이는 것들에 묶여 보이지 않는 것들을 무시하고 혹은 애써 외면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이 보이지 않는 것들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왜냐? 당신은 언젠간 보이지 않게 되고 보이지 않는 세계로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오래간만에 너무도 화창한 주말 오후, 묵은 빨래를 하고 방안 곳곳에 먼지를 걷어냈다. 개운하다. 캐러멜 팝콘과 콜라를 준비하고 커튼을 치고 어둠 속 방 안에서 영화감상에 빠져든다. 요즘 소설을 퇴고하면서 머릿속이 복잡하다. 처음 썼던 초고들이 점점 변형되고 재해석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여유 있는 시간들을 가지면서 책을 읽고 영화도 보면서 내가 쓰고 있는 소설에 큰 방향이 바뀌고 있는 느낌이다. 삶이 변해가고 세상이 변해가듯 이야기도 시간을 먹고 변해가는 듯하다. 복잡한 머리도 식힐 겸 영화 속으로 나의 의식을 옮겨본다. 그런데 더 복잡해져 버렸다.

《七月與安生》중에서

[소울메이트] 리메이크 영화다. 원작은《七月與安生》(칠월과 안생)으로 중국에서 흥행성과 작품성에서 모두 뛰어난 평가를 받은 영화이다. 한국에선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로 개봉했던 걸로 기억한다. 2016년 어느 날이었다. 그때 중국에 장기 출장으로 체류 중이었다. 주말 하루 시간을 내서 허름한 영화관에서 홀로 이 영화를 봤던 기억이 있다. 그때 봤던 영화는 나에게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줬던 것 같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감독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종 잡을 수 없었다. 그때는 이 영화가 말하는 것이 '동성애'인가? 아니면 '사랑과 우정사이'인가 하는 단순한 생각에 머물러 있었다.

[소울메이트] 중에서

어쨌든 당시 이 영화는 나에게 먹먹한 울림을 가져왔고 그 울림을 말로 혹은 글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다시 본 [소울메이트]는 나에게 먹먹하던 울림에서 선명한 떨림과 함께 많은 상념들을 던져준다. 그 상념들을 얘기해 볼까 한다. 만약 이 영화를 안 보신 분이라면 영화를 보고 나의 글을 읽으면 좋을 듯하다. 물론 읽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영화를 나의 의식에 흐름에 따라 볼 수 있기 때문에 본인의 생각을 알고 싶다면 보고 읽길 권한다. (스포일러 주의)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글의 첫 문장은 영화 속 전소니(고하은역)가 김다미(안미소역)의 어린 시절 둘이 그림을 그리면서 나누는 대화 속에서 하은이 깨달은 것을 독백으로 들려주는 부분이다. 이 말 한마디가 앞으로 펼쳐질 둘의 인생을 암시한다. 감독은 사실주의와 인상주의라는 미술의 두 영역을 통해 이 사람이 전혀 다른 세계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준다. 둘은 서로 다른 세계를 동경하며 서로에게 빠져든다.


하은은 사물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반면 미소는 사물과 현상을 자기가 생각하는 데로 머릿속에 있는 것을 그린다. 하은의 그림은 누가 봐도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는 그림이다. 하지만 미소의 그림은 도통 무슨 그림인지 이해하기 힘들다. 당사자의 설명이 없이는 접근하기 쉽지 않은 그림이다. 왜냐 미소는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인상주의와 사실주의

이건 일반인들이 미술관에 가면 한 번쯤은 느껴봄직한 일일 것이다. 과거 나는 미술관에 가면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이나 조각들 그리고 예술 작품들을 볼 때면 도대체 이게 뭐지 하며 머리를 긁적이며 보았던 기억이 있다. 반면 정말 사진이나 실물과 똑같이 그려진 그림 혹은 조각상들은 '우와~' 하며 입을 벌리고 구경했던 기억이 있다.

 

이건 우리가 보이는 것, 즉 익숙한 영역에만 오랜 시간 머물렀던 결과이다. 보고 배운 것 이외의 것은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현실적인 것들에 더 오랜 시간 머물고 생각하고 고민했다는 증거이다. 아름다움과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의 기준이 눈에 선명하게 잘 보이는 것이어만 한다는 것이다.


"마음, 똑같이 그리다 보면 그 사람이 아니라 내 마음이 보여 내가 이 사람을 어떻게 느끼고 있나. 그런 거... 그래서 최대한 똑같이 그려야 해!"


                     - 극 중 '하은'의 대사 중에서 -


극 중 하은의 이 말이 무슨 의미일까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나 또한 누군가 혹은 사물을 유심히 관찰하는 버릇이 있다. 그것도 오랜 시간... 처음엔 내가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가 상대와 그 사물에 대해 잘 알고 싶기 때문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표면적으로 상대과 사물을 관찰해서 아는 것과 그것들의 본질은 충분히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상대와 사물을 제대로 알기 위해선 직접 대화하고 경험해 보고 만져봐야 알 수 있다. 극 중 하은은 남자 친구인 변우석(함진우역)을 세세하게 그리면서도 정작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제대로 모른다. 그 과정은 그를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소울메이트] 중에서

이 관찰(관조)하는 것은 이상하게도 상대와 사물을 알아가는 시간이 아니라 나를 알아가는 시간이다.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음... 그렇다면 좀 더 읽어보시라.


타인은 나를 보는 거울 (반사 행동)


우리는 자신 스스로를 드려다 볼 수 없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타인과 사물(대상)을 통해서 세상을 배우며 학습해 나간다. 이건 세상을 배워가는 방법인 동시에 자신을 드려다 보기 위한 방법이다. 이게 바로 인간은 홀로 완전할 수 없는 이유이다.


이 과정은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고 부모를 따라 하는 유아기 혹은 아동기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아기는 아무것도 모른다. 아기는 부모의 모든 말과 행동을 반복적으로 학습하게 된다. 이 말이 바로 사실주의, 즉 똑같이 따라 하는(그리는) 것이다. 보이는 것을 따라 하는 것이다. 인생에서 절대로 피해 갈 수 없는 과정이다.


하은은 사실적으로 타인과 사물을 따라 그리면서 자신을 알아간다. 하은은 친구 같은 아빠와 엄마 사이에서 사랑을 받으며 자라난 아이이다. 그녀는 그렇게 부모를 통해 세상을 보는 법을 배웠다. 현실에 만족하며 그 안에서 행복을 찾아가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미소는 그 반대이다. 불안정한 가정에서 항상 불안과 함께 자라왔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암울한 현실은 도망쳐야 할 곳이며 다른 새로운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게 된다.


과거 미술을 하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면 대부분 처음엔 데생(소묘)이나 정물화나 석고상의 인물화등을 그리면서 사물과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부터 배운다. 아마도 이건 우리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는 동안 똑같은 교재로 비슷한 교과과정을 따라서 배우는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다들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또 그렇게 가르친다. 그런 환경 속에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하은은 그렇게 미술을 배운 아이였다. 하지만 미소는 누구에게 제대로 미술을 배워본 적이 없는 아이였다. 하은에게 미술은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었고 미소에게 미술은 생각을 그리는 것이었다.  

                                                             

이상과 현실사이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항상 이상과 현실사이에서 고민하며 살아간다. 이상을 좇으면 현실에서 멀어지고 현실에 집중하면 이상에서 멀어진다. 여기서 무엇이 옳다 그르다를 말하기 힘들다. 둘 중 어느 하나라도 무시하면 삶은 피폐해지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온다. 만약 그걸 너무 늦게 깨닫는다면 후회로 가득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수도 있다.


극 중에서 미소는 이상을 좇고 하은은 현실에 안주하는 인물이다. 미소는 이상을 좇으며 현실에 부딪치고 깎이며 상처받는다. 그러면서 이상을 좇는 것에 조금씩 지쳐간다. 현실을 무시하고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하은은 반대로 그런 미소의 모습을 바라보며 점점 이상을 꿈꾸게 된다.


"똑같이 그리는 건 재주지 재능은 아니잖아..."

 

                     - 극 중 함진우의 대사 중에서 -


그리고 결혼을 앞두고 미술을 다시 하고 싶다는 하은의 말에 진우(남자친구)가 말한다. 그녀는 그때 깨닫는다. 자신이 그동안 세상에 틀에 맞춰서 재주만 부리며 살아왔다는 것을... 자신은 항상 미소를 동경하면서도 그 세계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음을... 여태껏 쌓아온 것과 지켜온 것들이 자신을 묶어 놓고 있었다는 것을...  그녀는 파혼과 함께 미소가 살고 싶어 했던 이상적인 삶을 찾아 떠난다.

[소울메이트] 중에서

"Freedom's just another word for nothing left to lose."

(자유는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의 다른 말일뿐이다)


이후 둘의 삶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하은은 자유와 이상을 찾아 떠나고 미소는 시스템과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이상은 현실로 현실은 이상으로 향한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미소가 생각했던 이상과 현실 모두를 보여준다. 훨훨 날아가길 바랐던 하은을 꿈꿨지만 현실은 달랐다. 결국 싸늘하게 식어버린 하은을 목도하게 된다. 하은은 자신이 현실에서 만들었던 결실로 인해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우리는 이상을 꿈꾸지만 현실에 묶여있다"


                                        - 글짓는 목수 -


감독은 이 두 여자를 통해 이상과 현실을 말하고자 했다. 이상과 현실에서 고민하는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누군가는 현실에 더 집중하고 누군가는 이상을 좇는다. 현실에 집중하는 자는 내 맘같이 않은 현실에 괴로워하고 이상을 좇는 자는 현실이 발목을 잡는다. 둘 사이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리려고 한 것은 아닐까? 영화의 결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왜 하은은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끝났을까? 이게 감독이 말하고자 한 것일까?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우리는 유토피아 같은 이상적인 세상을 꿈꾼다. 이 땅에 이상주의자들이 많아지고 있다면 세상은 분명 유토피아로 향해 갈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디스토피아 쪽으로 기울어 가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비록 지금은 배 부르고 몸은 편안하고 편리한 삶을 누릴지 모르지만 과거와 같은 사람 간 온정과 온기를 느끼긴 어렵다.  


어린 시절 꿈과 희망을 쫓던 이상주의자들은 세월이 가면서 현실주의자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왜냐 현실에 많은 것들이 자꾸 들러붙어 자신을 끌어당기고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놓을 수도 없다. 보이는 가치(정량적)만을 쫓아가는 자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디스토피아가 될 수밖에 없다. 숫자, 수량, 크기, 비율, 시간, 성과 같은 것으로만 모든 것을 측정하고 판단하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냉혹한 현실은 이상을 좇던 자들도 결국 그것들에 순응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먹고사는 문제와 사회에서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선 내가 가진 숫자와 수량과 크기와 비율 그리고 시간을 늘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소울메이트] 중에서

영화의 마지막, 미소는 하은이 그리다가 멈춘 그림을 이어서 완성한다. 미소는 자신이 아닌 하은의 이름으로 미술 작품을 남긴다. 미소는 하은의 극사실주의 미술을 통해 현실 속 머물며 하은의 이름으로 이상을 꿈꾸는 삶을 대신 산다. 하은은 죽어서도 미소의 마음속에 남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있게 되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좇으며 살아가지만 결국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다. 우리가 살아서 남긴 모든 정량적인 것들의 주인은 이제 내가 아니다. 그럼 나는 무엇을 남겼는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누군가의 마음속에 무언가를 남겨야 한다. 그것만이 영원히 기억속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이상을 버리지 않고 살아갈 이유이다.


당신은 이상과 현실 사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


[소울메이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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