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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Nov 17. 2022

애정과 독립 사이

결혼에 관한 상념

"애정과 독립성을 동시에 원하는 나에게 결혼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 헤디 라마르 [출처: 베르나르 베르베르 죽음 중에서] -


  헤디 라마르를 아는가? 배우이면서 동시에 과학자라는 남다른 이력을 가진 그녀가 남긴 말이 요즘 청년 세대들 가지고 있는 결혼에 대한 생각을 잘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 그녀는 영화배우로도 유명하지만 근거리 무선통신 기술의(Wifi, Bluetooth, CDMA) 최초 발명가로 후대에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녀는 세계 2차 대전 중 독일의 U보트 잠수함이 어뢰 공격으로 어린이와 피난민들이 탄 여객선을 침몰시킨 사건을 접하고 무선으로 어뢰를 유도하는 전파 기술을 개발했다. "NO HEDY LAMARR, NO GOOGLE"(헤디 라마르가 없으면 구글도 없다) 2015년 구글은 그녀의 101주년 기념으로 헌정 형상을 남길 정도로 그녀의 업적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헤디 라마르와 구글

이도록 화려하고 명망 있던 그녀에게도 개인적인 삶은 그렇게 평탄하진 않았다. 그녀는 남자의 애정 없이는 살아갈 수 없었고 남자가 있을 때는 자신의 존재감이 줄어듬을 용납하지 못했던 여자였다. 6번의 결혼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남긴 많은 작품과 업적들(영화계, 과학계)은 그녀가 언제나 애정과 독립 사이를 오고 가면서 벌어진 일들이었다. 그녀가 무선통신 기술을 고안해낸 것 또한 첫 남편이 무기 거래상이었고 그를 통해 공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덕이었다. 그녀는 애정(이성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애정을 얻고 나면 끼(예술성과 천재성)가 샘솟았고 애정은 끼가 발산되는데 장애물이 되어버리는 악순환이 이어지는 듯 보였다.

헤디 라마르가 제출한 특허 신청 도안

"결혼하고 얼마 가지 않아 나는 그의 아내로 있는 동안에는 절대 배우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결혼생활에 있어 절대 군주였다... 나는 마치 아무 생각도 없고 자신만의 삶도 없는, 그가 보호해야 할, 그리고 가둬두어야 하는 인형이나 예술품과도 같았다."

 [출처 Hedy's folly : the life and breakthrough inventions of Hedy Lamarr, the most beautiful woman in the world by Rhodes, Richard ]


신이 내린 암수의 끌림은 죽는 순간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이 강력한 끌림은 세상을 어지럽고 때론 아름답게 만든다. 될 일도 망치게 만들며 때론 불가능한 일도 가능케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이 남녀의 사랑은 인간의 삶과 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는 주제 중에 하나이다. 어찌 보면 신이 이런 본능을 내리신 게 말 그대로 신의 한 수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이다. 


두 가지 동기, 성취(成就)욕와 성취(取)욕


정신 분석학의 대가 프로이트는 인간에게 동기부여를 하는 두 가지가 욕구가 있다고 한다. 그건 바로 성취욕이다. 성공을 취하고 이성을 취하는 욕구 즉, 위대해지고 싶은 욕구 그리고 이성을 유혹하려는 욕구이다. 두 욕망 뒤에 숨어 있는 의미를 풀어서 얘기하자면 위대해지고 싶다는 것은 자신의 정신적 존재감(중요성)을 확인하며 살고 싶은 것이고 이성에 대한 욕망은 자신의 유전자를 남겨 육체적인 존재감을 유지하고 싶은 욕망이다. 이건 어찌 보면 정신과 육체가 길이 남아 후세에 이어지길 바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새끼와 가죽을 남기지만 사람은 죽어서 후손과 이름'을 남기는 것과 같다.  


두 마리 토끼


인간에게 시간은 유한하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이라는 여정 속에서 이름과 2세를 모두 남기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역사 속에는 많은 인물들이 이름과 후손을 남겼지만 그런 인물들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이성을 유혹하고 이성과 삶을 공유한다는 것은 많은 시공간을 같이 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좋게는 독립적 나쁘게는 독단적임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과도 같은 의미이다. 과거 위대한 성인들이 평탄치 않은 결혼생활 혹은 독신의 길을 걸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들은 유전자를 남기는 동물적 본능보다 자신의 깨달음과 지혜를 남기는 것이 더 우선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성인(聖人)은 무능한 가장(家長) 


세계 4대 성인 중에서 예수만 빼고 모두 기혼자였다. 소크라테스와 석가모니(부처) 그리고 공자는 결혼을 했지만 가정사는 평탄치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평생을 악처에게 시달리며 살아야 했고 석가모니는 처와 자식을 버리고(출가) 집을 나갔다. 공자의 아내는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으나 그가 아내를 버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아내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4대 성인 (좌측 상단 부터 예수, 공자, 석가모니, 소크라테스)

"여인과 소인은 다루기 어렵다. 가까이하면 불손해지고 멀리하면 원한을 품는다" 

                                                                                                 - 공자 [논어] 중에서-


이상하리만치 성인들은 아내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다. 성인이 되는 기준에 여자와의 관계는 포함되지 않는 모양이다. 여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봤을 때 그들을 성인으로 생각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어찌 보면 여자들에게 필요한 남자는 성인(聖人)이 아니라 그냥 성인(成人)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예수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세상에 진리와 깨달음을 전하는데만 전념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그에게도 이성의 유혹이 없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그를 따르는 여성 추종자들도 상당히 많았다. 당대 가장 유명한 예언자에게 몸과 마음을 내어줄 여성이 없지 않았으리라. 그는 아마 애정이 가져올 구속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大)를 위해 소(小)를 포기한 것이라 생각된다.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  [고린도전서 7:8] -


예수의 사도 중 한 명인 바울 또한 예수와 같이 평생 독신의 삶을 살았다. 그만큼 자신의 소신과 열정을 지키고 실현하는 과정 속에서 이성(異性)의 동반자와 함께 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려준다. 어찌 보면 그에게 소명(召命)은 애정을 포기한 대가로 이룰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가톨릭의 제자(신부와 수녀)에겐 독신의 삶을 강요하는 것일까?


악처가 비범(非凡)함의 원천?!


소크라테스의 아내(크산티페)는 악처로 유명하다. 그는 아내와의 잦은 불화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깨달음과 지혜를 알리는데 집중했다. 그의 나이 쉰(50)에 맞이한 아내는 꽃다운 20세였다고 한다. 30년이라는 나이 차이 그리고 가정을 돌보지 않는 남편과의 불화는 어찌 보면 당연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아내의 핍박 속에서 그는 철학자에서 성인으로 거듭났다. 웃기지만 인간은 핍박과 시련 속에서 성장한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평탄한 삶은 인간을 나태하게 만들 뿐이다.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

"젊은이여, 결혼하라. 좋은 처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악처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것이다"

                                                                                       - 소크라테스 -


어쩌면 소크라테스에게 아내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의 기억 속에 성인으로 남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지독한 악처였던 그녀도 그가 독배를 마시는 순간에는 그의 아이를 품에 안고 슬픔에 울부짖었다고 전해진다. 미운 정이 더 깊고 오래가는 모양이다.


3대 악처

 

악처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 그리고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이다.(혹은 공자의 아내 올관씨를 포함하기도 한다) 이 셋은 세계 3대 악처로 손꼽힌다.  

톨스토이는 아내 때문에 자살을 할 정도로 아내와의 불화가 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죽는 순간에도 '나에게 아내가 다가오지 못하게 하라'는 유언을 남긴 것을 보면 둘의 관계가 얼마나 심각했을지 짐작이 된다.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와 음악가 그리고 작가 곁에는 모두 악처가 있었다. 이걸 거꾸로 생각해 보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악처는 철학자와 음악가 작가 그리고 성인을 탄생시켰다고 볼 수도 있다. 아내라는 시련과 고통이 그들을 더욱 성장시킨 원동력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톨스토이 & 소피아, 모차르트 & 콘스탄체

 내가 다니는 교회에는 모두가 존경하는 목사가 한 분 있다. 그분은 종종 설교시간에 웃음과 공감을 자아내기 위해서 성도들 앞에서 과거 자신과 아내가 불화로 힘들었던 시기(갱년기)를 얘기하곤 한다. 지금이야 식칼이 날아다니는 살벌한 상황을 대중 앞에서 웃으며 얘기할 수 있지만 당시 상황은 죽이네 사네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일까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그의 언행과 얼굴에는 무던함과 인자함이 묻어나는 것 같기도 하다. 시련을 함께 극복한 부부는 더욱 끈끈해지기 마련이다. 극복하지 못할 시련과 고난은 없다. 다만 그것을 극복하느냐 마느냐 따라 돌아오는 결과물이 다르다는 것은 확실하다.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악처는 비범한 자를 남편으로 모신 대가로 받은 후대의 혹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그녀들은 모두 가정에 충실한 여성들이었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남편과의 끊임없는 불화를 일으킨 것뿐이었다. 그녀들의 소명은 가정을 지키는 것이었고 그들의 소명은 세상을 좀 더 이롭게 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서로 다른 소명이 부딪친 것뿐이다. 가정도 중요하고 세상도 중요하다. 안타깝지만 세상은 세상을 이롭게 한 자를 기억할 뿐이다.


"집안 단속도 못하는 자가 무슨 바깥일을 잘할 수 있겠어?"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 말에 많은 예외가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집안 단속을 잘하는 자 치고 바깥일을 잘하는 자가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모든 것을 잘할 수 없다. 잘할 수 있는 것과 더 가치 있는 일에 집중함으로써 포기하는 대가(기회비용)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 지금의 나의 생각이다. 포기한 대가가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가정의 불화는 세상의 존경을 위한 대가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냥 행복하게 살 거라면 둘 사이의 밸런스를 맞추며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녀는...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남녀는 고민한다. 이제 여자는 더 이상 가정을 돌보는 존재로 국한되지 않는다. 과거의 악처들은 가정을 위해 남자와 싸웠다면 이제는 그럴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여자도 세상에서 자신의 꿈과 소명을 위해 남자가 희생해 주길 원하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여자도 위대해지고(자아실현) 싶은 욕구가 유전자를 남기고 지키는 욕구보다 더 강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서두에 소개한 헤디 라마르 같이 여자들도 이제는 독립(사회성)과 애정(여성성) 사이에서 고민한다.


이 두 가지 욕구를 모두 실현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는 것 같다. 이제 남녀는 같이 해야 할 이유만큼이나 같이 할 수 없는 이유도 많아졌다. 


애정과 독립 사이에서 당신은 무엇이 더 소중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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