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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Jan 12. 2022

고통과 권태 사이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 박찬국  - 두 번째 이야기 -

  지금 당신은 고통 속에 있는가 아니면 *권태 속에 있는가?


  물론 이 물음에 누군가는 전 지금 기쁨과 환희 속에 있다고 대답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틀리지 않다. 문제는 지금 이 글을 읽기 시작한 사람은 고통 혹은 권태의 상태에 있을 가능성이 좀 더 높다고 생각한다. 바라옵건대 내 글을 다 읽고 잠시나마 기쁨과 환희를 느낄 수 있기를...


  기쁨과 환희는 순간의 감정이다. 짧으면 몇 초 길어봐야 하루 이틀 정도일 뿐이다. 그 이후엔 또 다시 고통 아니면 권태의 상태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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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알고부터 피어오르는 상념은 그 어떤 때보다도 크고 강력한 것 같다.

그래서 다시 펜 아니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를 읽고 또 다른 감상에 대해 서술해 보고자 한다.


욕망의 동물


 인간은 좋게 말하면 의지(Will : 자유의지)를 가진 동물이고 나쁘게 말하면 욕망으로 가득 찬 동물이다. 이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책을 읽고 어떻게 하면 나의 생각과 쇼펜하우어의 생각을 잘 버무려 또 다른 생각을 글로 잘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욕망에 사로 잡혀 있다.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순간 나의 고통은 시작된다. 이 고통은 글이 시작되고 몰입이 되기 전까지 계속 이어진다.  만약 글을 잘 써 내려가지 않으면 이 고통은 점점 더 가중된다. 하지만 생각이 물 흐르듯 글로 써내려 가지기 시작하면 나의 정신은 조금씩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찬 또 다른 시공간으로 옮겨간다. 몰입이 가져다주는 환희가 지속되다 글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 그 정도는 극에 달하며 최고의 순간을 맞이한다.


  욕망이 성취로 이어지는 순간 환희는 조금씩 사그라들고 몰입에서 빠져나와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러면 다시 고통 아니면 권태가 찾아든다. 오늘 만약 내가 이 글을 끝까지 쓰고 퇴고를 마무리한다면 며칠 만에 맛보는 환희의 순간이 될 것이다.


  환희는 얼마 가지 못해 다시 또 어떤 글을 써야 할지에 대한 고민과 책을 읽고 서평을 쓰면서 보낸 시간으로 하지 못한 일에 대한 미련 혹은 만남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정신적 기쁨을 얻었지만 그 대신 감수해야 할 육체적 불편 혹은 생활의 아쉬움이 다시 고통을 가져다준다. 나는 또 다른 욕망이 샘솟는다.


  경제적인 여유를 얻고 싶은 또는 사람 간의 관계에서도 승리하고픈 욕망이 샘솟는다. 그 욕망은 나를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다. 만약 괜찮은 잡(Job)이 생겨 돈을 많이 번다고 해도 그 기쁨은 잠시 또 읽지 못해 아님 쓰지 못한 시간과 돈을 벌기 위해 희생된 관계의 시간에 대한 후회로 또 다시 고통에 빠져든다.


  어떤 욕망이든 그것이 성취되는 순간 다시 고통(or 권태)이 찾아오는 것이다.


고통 아니면 권태


  얼마 전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떠오른다. 드라마가 나에게 남긴 인상이 어찌나 강했던지 두 편의 감상평([죽음 앞에 진실하다] & [네모 세모 그리고 동그라미] 참조)을 적었던 기억이 난다. 드라마의 후반부 주인공 이정재(극 중 기훈)가 게임에서 만난 할아버지가 병상에 누워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그가 그 게임을 계획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는 장면이 있다.

[오징어 게임] 중에서

"자네, 돈이 하나도 없는 사람과 돈이 너무 많은 사람의 공통점이 뭔 줄 아나?, 사는 게 재미없다는 거야"

 

   노인의 대사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부와 명예를 가진 자들은 그들에게 고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외적 가능성 혹은 요소들이 가지지 못한 자들보다 적다. 물질 문명에 살고 있는 우리 대부분은 상대적 빈곤과 결핍이 가져오는 고통에 시달린다. 반면 다 쓰지도 못할 부를 가진 자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고통이라기보다 권태에 가깝다. 비록 노인은 죽음이 임박한 가운데 육체적 고통을 느끼고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권태에 시달리고 있다. 그 권태가 돈지랄을 한 잔혹한 추억의 게임을 만들어 냈다. 이건 비단 드라마 상황만은 아니다.


사랑도 고통과 권태사이

 

  사랑이 다가오면 설렘이라는 기분 좋은 감정이 찾아든다. 동시에 사랑하는 이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정신적 고통에 빠진다. 어떻게 하면 그 이성에 눈에 띄고 마음을 사로잡을까 하는 고민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고 기존에 누리던 일상이 조금씩 무너진다.


  오감을 통해 끊임없이 전달되는 그 이성의 에너지로 인해 호감은 사랑으로 발전하지만 자신의 속도에 상대방이 발맞춰 오지 않음에 고통받는다. 자신의 호감이 이성에게 비호감을 선사하는 엇갈린 비극은 크나큰 시련의 고통을 안겨준다. 이성에 대한 강렬한 욕망은 강렬한 고통을 안겨주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둘의 사랑이 결실을 맺을 수도 있다. 그 보다 더 기쁜 경우가 어디 있겠냐마는 사실 결실의 기쁨도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활활 타오르던 사랑이 계속 타오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 강력하던 사랑의 기운도 결국 다른 곳으로 전이되어 사라진다. 그러면 권태라는 놈이 찾아온다.


사랑은 이뤄도 못 이뤄도 매한가지?


  못다 이룬 사랑은 고통을 안겨주지만 성취한 사랑도 권태를 안겨주기 마찬가지인 것이다. 권태는 또 다른 사랑에 대한 욕망을 불러오고 그 욕망은 지금 이 시대 남녀들의 즐겨찾는 메뉴인 스릴 가득한 막장 드라마의 전율을 선사한다. 죄책감 속에 더 큰 사랑이 불타오르는 건 왤까. 순간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벌거숭이로 노닐던 아담과 하와가 떠오른다. 그들이 저지른 원죄 때문에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숨어서 하는 사랑의 쾌락을 즐기게 된 걸 보면 이것도 이해가 될 법하다.


  뭐 이룬 사랑은 잠시나마 기쁨과 환희를 안겨 주었으니 그래도 못다 이룬 사랑보다는 좀 낫지 않을까하고 생각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못다 이룬 미완성의 애절한 사랑은 추억을 남긴다. 그 추억은 평생을 잊지 못하는 나만의 드라마로 가슴속에 남는다. 매번 스토리와 등장인물만 바뀌어 반짝하고 잊히는 자극적인 막장 드라마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룬 사랑은 환희를 주지만 권태를 안겨주고 못 이룬 사랑은 고통을 줬지만 추억을 남긴다. 어쩌면 사람들은 사랑이 가져올 고통과 권태가 두려워 사랑과 멀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쇼펜하우어는 설령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져도 인생은 고통이라고 본다.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면 우리는 평온한 행복감을 느끼기보다는 권태를 느끼게 된다."

                                                                 -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 중에서 -


  인생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일이다. 세상은 인간이 노동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도록 설계해 놓았다. 돈 많으면 놀고먹겠다고 생각하겠지만 놀고먹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노동 없이는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이것 또한 태초에 하나님이 내린 벌 때문인지 인간은 일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도록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


"노동하지 않으면 삶은 부패한다. 그러나 영혼 없는 노동은 삶을 질식시킨다"

                                                                                       - 알베르 카뮈 -


  일의 시작도 사랑과 마찬가지로 설레임과 함께 한다. 사랑과 다른 점이라면 두려움도 같이 온다는 것이다. 새로운 일의 시작은 새로운 생활과 관계의 시작이다. 삶의 형태와 방향을 판가름 짓는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우리는 처음 일을 시작하면 새로운 것들에 배우는 즐거움과 호기심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일에 능숙도가 어느 정도 오르면 주변의 기대와 요구 그리고 성과에 대한 부담으로 고통이 찾아든다. 그때부터 일은 고통이 된다.


 "No pain No gain"  (고통 없이는 얻을 수 없다)


  이 말을 들어 봤을 것이다. 고통이 수반되어야 일의 성취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고통 속의 나날을 견디다 보면 어느 순간 성취와 성과가 생기는 날이 찾아온다. 예를 들면 진급이나 성과에 대한 금전적 보상이 그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환희의 순간을 맞이한다. 허나 그것도 새로운 직급의 명함을 받고 혹은 계좌에 찍힌 숫자를 확인하는 그 순간일 뿐이다.


  순간이 지나면... 예상되지 않는가? 맞다. 권태가 찾아든다.  권태의 시간이 길어지면 권태는 고통으로 모습을 바꾸고 다시 긴 고통의 시간을 거쳐 또 다른 성취(성과)를 이루어야만 한다. 그것이 산업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인간이 발전해온 역사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도태되고 어느 순간 자신의 자리가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견디기 힘든 더 큰 고통이 찾아온다. 이 고통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까지 포함한 강력한 고통이 될 수도 있다. 타인의 요구와 기대에 부응해 살아온 삶이 그러하다. 자신이 만든 기대와 요구에 부응해 살아온 사람과 가장 큰 차이점이다.

 

  세상은 타인을 꿰뚫어 보는 지혜로운 인간을 선호하지만 사실 자신을 꿰뚫어 보는 명철한 자라야만 무너지지 않는 법이다.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시계추와 같다"는 말은, 인생의 전부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시하기 어려운 인생의 본질적인 핵심을 한마디로 찌르고 있다.


                                                -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 중에서 -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어두운 부분을 깊이 꿰뚫어 보는 통찰을 가졌다. 우리는 되레 긍정적임을 강조하며 어두움 부분에 대한 관심을 줄이려 노력한다. 요즘 유행하는 '꽃길만 걷자'라는 말처럼 아름답고 밝은 세상만 보고자 한다. 꽃길만 주구장창 365일 걸어보라. 하루이틀만 지나도 그 길은 권태의 길로 그 다음은 고통의 길이 될 것이다. 어두운 곳을 보지 않는데 어찌 그것이 아름답고 밝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더러움과 어둠을 봐야 아름다움과 밝음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는 것이다.


  염세주의(義)로 대표되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기존의 철학 기조와는 달리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 것은 인간의 깊은 어둠 속을 냉철하게 파헤쳤기 때문이다. 그는 그 과정을 거쳐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답을 찾아간다. 고통의 원인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통해 어떻게 더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까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것이다.


  당신은 고통과 권태 사이에서 어떤 삶의 자세를 취할 것인가?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

   *권태 : 어떤 일이나 상태에 시들해져서 생기는 게으름이나 싫증 (네이버 국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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