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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Oct 13. 2023

이성과 감성 사이

삭제된 글을 다시 올리며...


"당신은 이성적인가? 아님 감성적인가?"

 

우리는 매 순간을 이성(理性)과 감성(感性)의 갈림길에서 살아가고 있다. 매 상황마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고 말하며 행동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감성적인 선택보다는 이성적인 선택이 우선되고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것이 인간이 동물과 가장 다른 차이점이기도 하다.


- 감성 -> 자극이나 자극의 변화를 느끼는 성질로서 외계(外界)의 대상을 오관(五官)으로 감각하고 지각하여 표상을 형성하는 인간의 인식 능력.

 

- 이성 ->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을 감각적 능력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시켜 주는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다

                                                                           - [네이버 국어사전] 참조 -

 

이성과 감성

사전에서 두 단어는 위와 같이 정의한다. 감성은 감각기관을 통해 느낀 것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이다. 반면 이성은 외부의 자극을 느낀 데로 가 아닌 머리로 생각하고 이후 반응이 미칠 영향이나 파급효과를 생각하여 반응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외부의 자극에 대해 솔직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위나 권위를 통한 부당한 요구나 지시를 받을 경우 감각기관을 통해 느끼는 감정은 불쾌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하지만 불쾌함과 분노를 표현하지 않는다. 머릿속은 이미 불쾌함과 분노를 표출했을 경우 미칠 상황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현재의 지위나 금전적인 소득을 잃게 될 수 있다. 아울러 가족의 안위와 나의 미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 예상되기 때문에 자극에 대해 부자연스러운 반응을 하게 된다. 부당함에 미소로 대응하고 억울함을 웃음으로 넘기는 연기를 하게 된다. 스트레스가 되는 것이다.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은 이성적인 인간에 가깝다. 사회생활에서는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 이성이다. 이성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이렇게 눈부신 문명의 발전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성을 바탕으로 발전한 세상은 감성이 설 자리를 빼앗아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이 갈수록 각박해지고 냉혹해지는 것은 아마도 감성이 메말라가고 있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는 사람을 대할 때면 당황스럽다. 이상하게 느껴진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저래서 어디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물론 그런 사람은 회사나 조직생활에서는 살아남기 쉽지 않을 것이다. 살아남는다고 해도 그가 받는 스트레스는 다른 이들보다 더욱 심할 것이다. 하지만 감정표현이 솔직한 사람치고 정말 나쁜 사람은 드물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다만 주변 사람이 좀 많이 피곤할 뿐이다. 속내를 숨기고 위선으로 뒤통수를 치는 빈틈없이 이성적인 인간보다는 훨씬 낫다.

   

과거 근무했던 직장 상사 중에 감성적인 상사와 이성적인 상사가 있었다. 감성적인 상사는 화를 참지 못한다. 얼굴 표정 관리가 되지 않고 욕설과 폭언을 내뿜는다. 한 바탕 폭풍이 지나고 나면 그만이다. 이성적인 상사는 얼굴색도 변함없이 나의 실수와 꼬치꼬치 들춰내며 몰아붙인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느낌이다. 욕설이나 폭언이 아닌 격식 있는 비방조의 말을 구사한다. 논리적이고 치밀하게 상대방을 궁지로 몰아넣고 모멸감을 안겨준다. 둘 다 좋지 않지만 후자는 더욱 좋지 않다. 정신적으로 병이 올 수도 있다. 감성과 이성을 적절히 컨트롤하는 것이 원만한 인간관계와 더불어 개인과 주변의 평화를 위해 중요한 요인으로 보인다.

 

감성 여성 vs 이성 남성  

 

여성은 비교적 남성보다 감성적이다. 그 말은 남성이 더 이성적인 편이라는 얘기이다. 과거 전통적인 가족 사회에서 여성은 가정을 남성은 사회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여성은 남성을 통해 이성을 남성은 여성을 통해 감성을 배워가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여성은 남성을 통해 경제, 정치 등의 세상이 돌아가는 이성적인 세상을 경험하고 남성은 여성을 통해 사랑과 가족의 감성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이성과 감성이 밸런스를 이룬 삶은 이상적이다. 물론 이성적인 남성과 감성적인 여성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충돌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사랑이 밥 먹여 주진 않지만 사랑 없이도 살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보완적인 관계는 이질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모순이다. 남녀 관계는 모순을 품고 있다.

 

여성 감성 vs 남성 이성

현대 사회로 오면서 남녀가 모두 사회생활의 비중이 커지면서 이성적인 뇌 상태를 더욱 오래 지속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급격한 산업화를 겪으면서 인간은 더 많은 시간을 경제활동과 사회활동에 쏟아부었다. 야근과 주말 근무도 마다하지 않고 회사와 사회가 원하는 인간으로 살아왔다. 부를 축적하는 것이 가정의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 믿었다. 물질에 쏟아붓는 시간은 가족과 연인과 부모와 친구와 함께하는 시간을 양보해야 했다. 물질의 풍요는 정신의 빈곤을 만들었다. 자살과 이혼의 증가, 결혼과 출산 감소, 사회 양극화, 고독사 등등

 

이성적인 세상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감성이 배제된 세상의 발전이 가져온 결과가 아닐까? 과거 수많은 이성적인 판단과 행동들이 축적이 결국 인간사회를 냉혹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최근에 사회에서 많은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워라벨, 미니멀 라이프, 주 52시간 근무 등 일과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달아 가고 있다. 이런 인식의 변화가 자본주의 경제 발전의 속도를 늦추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의견도 분분하다.

 

물론 한국의 과거 경제 성장 패턴이 더 빨리, 더 많이 일하는 쪽으로 치중되었기 때문이다. 효율성만 강조했다. 더욱이 이렇다 할 천연자원 없이 강대국 틈에서 인적자원만으로 먹고살아야 하는 상황 속에서는 선택이 여지가 없었던 이유도 한몫했을 것이다. IMF을 겪으면서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노동자보단 사용자(고용주)의 입장이 더욱 중시되는 산업구조의 전환을 가져왔다. 기존의 감성적인 고용시장은 이제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바뀌었다.

  

4차 산업혁명으로 가는 시점에 산업 패러다임이 변하지 않은 결과이다. 이제는 양적인 성장에서 질적인 성장이 필요한 시기이다. 제조업 강국의 위상은 이제 중국에게 넘어간 지 오래다, 중국 또한 일반 제조업에는 관심도 없다. 고부가가치 IT사업, 첨단 제조업, 콘텐츠 산업으로 산업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한국은 그 단계로의 준비가 미흡했기 때문에 현재 몰락하고 떠나간 제조업의 공백을 메꿀 수 있는 새로운 산업을 육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조업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효율성(속도, 품질, 가격등)으로만 말하는 산업이다. 무언가 하나의 새로운 상품이 탄생하면 그 이후는 비용 경쟁으로 효율의 극대화를 추진한다. 그 과정이 발맞춰 인간도 효율적으로 변해간다. 효율에는 인성도 감성도 전혀 필요 없다.

 

시선을 피해서

 

해외에는 수많은 청년들이 제 살 길을 찾아 헤매고 있다. 한국에서 찾을 수 없던 삶의 터전을 타향 만 리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해외 이주 노동자로서 받는 설움 속에서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 자들이 많다. 국내에 비좁은 대기업 공채와 국가고시 공부에 목매는 청년들과 경쟁이 두려워서일까? 왜 한국은 청년이 떠나가는 나라가 되었을까?

  

가장 많이 듣는 이유 중 하나는 주변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가장 큰 이유이다. 오랜 세월 고착되어 온 유교 사상 속의 선비정신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여기 호주라는 나라에선 한국에서 3D(Difficult,  Dangerous, Dirty) 업종에서 성공해 부를 축적하고 남 부럽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힘든 노동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노동에 대한 임금 수준도 한국보다 훨씬 높다. 사람들의 시선 또한 확연히 다르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어릴 때부터 힘들고 더러운 일은 가난하고 못 배운 자들이 하는 일이라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교과서가 아닌 어른들로부터 말이다. 조선시대 선비 정신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악순환의 고리

 

한국은 중년이 무너지고 청년이 떠나가는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노년의 취업률이 사상 최고라는 뉴스는 이제 한국이 미래가 없는 늙은 사회라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다행히 통계에 잡히는 노년은 그나만 안정된 일이다. 매연 가득한 거리에서 박스를 줍는 노인들을 쉽게 발견한다. 그들은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노동자이다. 좋게 얘기하면 늙어서도 일할 수 있는 나라라고 얘기할 수 있지만 한국은 늙어서도 일해야 하는 나라에 가깝다. 물론 자발적인 취업도 있겠지만, 대부분이 생계를 위해 하는 것이다.

한국의 노년

노인 빈곤율 또한 OECD 1위이다. 그들이 젊은 날 열심히 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자녀의 독립이 늦어지고 자녀의 부양으로 노후 준비를 할 수 없는 한국의 현실이 그들을 빈곤으로 몰아넣지 않았을까? 그들은 노년이 되어서야 다시 자신들의 노후를 준비하고 있다. 청년실업이 노인 빈곤과 결혼, 출산 감소 그리고 인구 감소로 지속적인 악순환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혹시 생계와 가족을 위해 감성은 숨기고 부당함에 참고, 불의에 굴복하고, 억울함에 미소 지었던 그 철저하게 이성적인 시간들이 이런 결과를 만든 것은 아닐까? 과거 직장에서 지독하게 일만 하던 직장 상사의 말(회사에서 인정을 받는 능력자)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순 없다. 주어진 시간은 하루 24시간 모두 똑같다. 사회에서 성공하든 가정에서 성공하든 어디든 집중해야 한다. 선택과 집중이 없으면 어떠한 성공도 이룰 수 없다. 어디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것이냐? 난 회사를 선택했다. 적어도 사회에서의 성공은 내 처자식을 굶기지는 않는다."

 

퇴사를 앞둔 나에게 술자리에서 그가 했던 그 말은 나의 뇌리에 깊이 새겨졌다. 사회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결국 가정도 지킬 수 없다는... 그 부인할 수 없는 불편한 진실을 그가 알려줬다. 그럼 세상과 사회는 나의 가정을 볼모로 잡고 우리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인가? 그러고 보니 세상에 이름을 남긴 자들은 워라밸이나 주 52시간을 지키면서 이름을 남기진 않았다. 옆도 뒤도 보지 않고 앞만 보며 목표만을 향해 달려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일전에 본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경규가 아이들에게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야지라고 말하는데 이효리가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이효리 말말말

"뭘 훌륭한 사람이 돼? 그냥 아무나 돼!"


우리 모두는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냥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세상에 이름을 남기고 싶은 생각도 없다. 죽을 때 소중한 몇 명만이라도 곁에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닐까? 위인들이 세상에 이름을 남기고 갔을지언정 과연 그들이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누가 감히 얘기할 수 있겠는가?  

 

최근 서점에 수많은 감성 에세이나 인문 서적들이 베스트셀러에 올라오곤 한다. 현재 인간 세상이 많이 메말랐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을 감성적으로만 살아갈 수도 없지만 이성적으로만 살아도 살 맛 나지 않은 것이다. 인간도 동물이라는 기본 전제를 잊어서는 안 된다. 과거의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루던 숨 가쁜 시절로 다시 되돌아갈 수 없다. 다시 오지도 않을 것이다. 바야흐로 저성장의 시대에서 우리는 다시금 과거를 되돌아보고 재정비를 해야 하는 시기가 아닐까?

 

삶에서 이성적인 판단은 중요하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이성적인 판단 기준은 바뀔 수 있다. 감성의 기준은 자연적인 본능이기 때문에 바뀔 수가 없는 절대적인 것이다. 지금은 이성적인 판단 기준이 바뀌어야 하는 시대에 접어든 것이 아닐까? 가슴속에 깊이 숨겨놓았던 감성을 하나씩 끄집어내어 주변 사람들과 공유하는 세상을 기대해 본다.


냉정함(이성)과 온화함(감성)이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 차가움은 따뜻해지고 뜨거움은 식혀야 한다.

이건 우주의 섭리이다. 인간은 그것을 계속 거스르려 한다.




위에 글은 [2019년 7월 27일 게재글] 한 글을 수정보완 하였습니다.


얼마 전 삭제 글(9/8)을 다시 올려보았습니다

왜 삭제되었지는 알 수 없지만 저에겐 소중한 글이기에 다시 게재하였습니다.

독자분들이 읽어보시면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이 글이 왜 삭제되었는지...

우리는 왜 나와 다른 사람과 생각을 삭제하고 싶을까요?

너가 없어져야만 내가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만연한 세상은 전쟁이 끊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 시간에도 많은 이들이 영문도 이유도 없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나와 다름이 그들이 없어져야할 이유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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