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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Aug 04. 2023

욕망과 양심 사이

마틴 루터 킹의 연설을 보다가...

"안전하지도 않고, 정략적이지도 않고, 인기가 있지도 않는 입장을 취해야 할 때가 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입장을 취해야 하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양심이 말하기 때문입니다."


 "There comes a time when one must take a position that is neither safe, nor politic, nor popular, but he must take it because conscience tells him it is right."

   

          - 마틴 루터 킹, Martin Luther King Jr -


안전하지 않고 정략적이지 않으며 인기도 없이 살아간다는 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누구나 안전하고 정략적이며 인기있는 삶을 누리고 싶을 것이다. 왜냐 나의 욕망이 그러길 바라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위험하고 비정략적이며 인기 없는 삶을 살고 있다면 당신은 욕망보다 양심이 더 강한 사람일 수 있다.




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

" I have a Dream..." (나에게는 꿈이 하나 있습니다...)


모두가 한 번쯤은 들어본 이 구절은 아직도 수많은 곳에서 인용되고 있다. 1963년 8월 28일, 링컨기념관 앞에서 자신의 네 자녀가 피부색이 아닌 인격으로 평가받는 날이 오길 바라는 꿈을 얘기하며 수백만명의 미국 흑인들의 가슴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우연히 읽은 마틴 루터 킹(MKL)의 구절이 상념의 바다에 돌을 던졌다. 그는 개신교 목사이며 1964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으며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권운동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미국 성공회에서는 그를 예수나 붓다처럼 성인(축일 4월 4일)으로 추대할 정도이다.


그는 과거 예수가 말하던 선한 양심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다. 안타깝지만 그의 선한 양심은 누군가의 악한 욕망에 의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39세에 총격으로 암살) 하지만 그가 남긴 수많은 스피치는 여전히 우리의 가슴 속에 남아 선한 양심을 건드리고 있다.  그는 마치 과거 예수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너무 선한 양심은 이 땅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안전하지 않은 삶이란...


안전은 인간 뿐 아니가 생명을 가진 모든 동식물의 기본 욕구이다. 매슬로의 욕구 단계론에서 가장 하위 5단계는 생리적 욕구이다. 그리고 그 다음이 안전 욕구이다. 하지만 우리가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 생리적 욕구와 안전 욕구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리욕구 중 가장 기본은 식욕이다. 먹어야 살 수 있다. 먹지 못하는 인간에게서 인간적인 모습을 기대할 순 없다. 과거 원시 수렵생활을 하던 인간에게 식욕을 해결하는 것은 또한 위험을 감수하는 것과 같았다. 돌도끼를 들고 밀림의 야생 동물들과 목숨을 걸고 싸워야만 먹을 것을 획득하고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이 힘들고 위험한 나날이다. 운 좋게도 오늘은 맛난 고기를 먹었지만 내일은 무언가의 맛난 고기가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더 많은 날 식욕을 채우는 행운을 누리려면 오늘만 살 것처럼 뛰고 싸워야만 했다.

[매슬로의 욕구 5단계]

그래서 인간의 유전자는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몸을 움직이지 않고 식욕만 해결하면 병이 오는 유전자를 가지게 되었다. 이제는 자연 속에서 사냥과 채집의 위험은 사라졌지만 그 안전함은 각종 암과 질병들을 가져왔다.


자연생태계에서 필수(필요)적인 것만 섭취하며 살아가는 동식물에겐 암이라는 질병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 인간에 의해 길들여진 가축과 반려동물은 다르다) 필요한 것이 아닌 원하는 것을 섭취하고 편안함에 익숙해진 몸은 질병의 숙주가 된다.


인간은 깔끔하게 바로 죽지 않고 서서히 조여오는 듯한 고통을 받으며 죽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개구리가 서서히 데워지는 물 안에서 익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격언은 안락하고 편안한 환경 속에만 머물며 주변 변화에 둔감해짐을 비유하는 말이지만 우리는 우리가 우리를 서서히 데워가는 틀을 만들고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근데 저 목수 분들은 나이도 적지 않은데 어떻게 저렇게 정정하신 거에요?"


얼마 전 하우스 공사를 하는 곳에서 배가 불룩 나온 중국 작업자가 나에게 물었다. 물론 그와 나만 아는 중국어로 물어왔다. 그 현장에는 3명의 연로하신 한국 어르신 목수가 세 명 있었는데 그들은 정말 한시도 가만있질 않으시고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 아침부터 오후 일과가 끝날 때까지 계속 몸을 움직이셨다. 그들에 비하면 아들뻘인 나도 그들과 함께 호흡을 맞추며 일을 하는데 여간 힘든게 아니였다.


그 배불뚝이 중국 작업자는 빠대(퍼티:putty) 전문가 였는데 그 작업은 힘들거나 움직임이 많은 동작 보다는 손끝의 정교한 감각으로 하는 일이라 사실 강한 근력이나 체력을 요하는 작업은 아니었다. 그는 나이가 연노한데도 불구하고 저런 근력과 체력을 유지하는 모습이 신기한 듯 보였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자신이 모르는 한국인들 만의 보약이나 다른 특별한 음식들을 먹는게 아닌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에게 한국 노인들은 뭘 챙겨드시는지 물어봐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적게 먹고 많이 움직였다. 점심도 김밥 한줄 아니면 떡 한 두 조각에 삶은 고구마같은 것들로 요기하는 정도였다.


"저 분들은 정말 한시도 쉬지 않고 몸을 움직여요"


그래서 난 그 중국 작업자에게 말해줬다. 내가 목수 일을 하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면 몸을 계속 움직는 일이 몸에 활력을 준다는 사실이다. 물론 과도하고 무리한 움직임이 초래하는 근골격계 부상은 있을 수는 있지만 세포가 변형(암)되거나 심혈관계(지방) 질환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어쩌면 이런 땀흘리는 노동이 인간의 원래 유전자에 가장 적합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목수 일이 몸에 땀이 마를 일이 없고 근육 세포가 심심할 틈이 없다. 과거 10여년을 화이트컬러로 밤낮없이 책상 앞에서만 일하던 나의 몸은 고지혈증과 복부팽만(소화불량) 그리고 역류성 식도염을 달고 살았다. 20세기말 탄생한 영화[E.T. 1982]의 체형은 어쩌면 21세기 화이트 컬러의 몸을 예견한 것이 아닐까...


스티븐 스필버그 [E.T.]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 [창세기 3:19] -


태초에 신은 여자에게 잉태의 고통을 남자에겐 땀흘려야만 먹을 수 있는 노동의 고통을 내리셨다. 우리는 지금 얼굴에 땀 한방울 흘리지 않아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는 세상을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운동이라는 것을 한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운동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건 얼마되지 않았다. 과거 사냥와 채집 활동이 바로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목적 없이 땀흘리며 제자리 뛰기와 무거운 아령을 들었다 놨다 하는 구간 반복 동작을 몇 만년 전 인류가 목격했다면 미친 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땀의 의미


땀을 흘린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많은 의미를 포함한다. 땀이 나는 것은 몸 안에 열이 난다는 뜻이다. 몸에서 열이 나면 몸 속의 각종 세균과 바이러스들이 살기 힘든 환경이 만들어 진다. 이것이 세균을 싸워 죽이는 과정이다. (상처 부위에 열이 나는 것과 감기가 걸리면 몸에서 열이 나는 이유와 같다.) 면역력이 올라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리고 땀을 통해 몸 속 노폐물이 빠져나가며 몸속 체액이 순환한다. 물도 많이 마시게 된다.


나는 수영을 좋아한다. 그런데 요즘같은 겨울아침 야외 수영장에서 수영하는 것만큼 괴로운 것도 없다. 괴로움의 시간이 사실 몸에게는 이로운 시간이다. 몸이 괴롭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뇌가 괴롭다고 느끼는 것이다.

Swimming

'풍덩' 수영장에 뛰어드는 순간부터 열역학 제 0법칙에 의해 물과 몸은 열평형을 이루기 위해 열을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다. 몸은 체온(36.5도)을 유지하기 위해 미친듯이 열을 발산한다.


이건 두가지 현상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내가 그 차가움에 미친듯이 팔다리를 휘저으며 몸에 열을 내려는 현상이고 또 하나는 몸과 물의 온도 차이가 커서 열을 빼앗기는 속도(열전도가 빠르면)가 너무 빠르면 몸은 생명지키기 위한 생존 시스템을 작동시킨다. 체온 유지를 위해 몸에 축적된 지방을 태우며 칼로리를 열량으로 전환한다. 더 많은 칼로리가 태워진다. 이 과정에서 몸 속의 나쁜 균과 바이러스들이 화형을 당해 죽어나간다. 수영장 물이 시간이 가면 탁해지는 이유는 몸 밖으로 배출되는 땀과 그 속에 각종 균들의 시체들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지상에서 운동하는 것보다 더 많은 칼로리(지방)을 태우는 효과와 면역증강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살을 에는 듯한 괴로움은 몸에게 이로움을 가져오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 한겨울 찬물에 뛰어드는 것은 무모하고 위험한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위험함이 계속되고 일상이 되면 건강이 찾아든다.


거칠고 힘들고 위험한 직업


목수일은 거칠고 힘들고 위험한 직업이다. 사람들은 부드럽고 편하고 안전한 직업을 선호한다. 그런데 과연 부드럽고 편하고 안전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부드럽고 편하고 안전한 사람이 될까?


나는 과거 가늘고 하얀 부드러운 손으로 편안한 의자에 앉아 쾌적한 환경 속에서 일하며 가장 거친 말투와 불평불만을 쏟아내며 위험한 생각들로 가득차 있었다. 지금은 굵어지고 마디마다 굳은살이 생기고 거칠어지는 손이 되어가고 있다. 먼지가 가득하고 뾰족한 못들이 삐져나온 목재들이 쌓여있는 공사현장에서 일을 하지만 말과 생각은 이전처럼 거칠고 뾰족하지 않게 되었다.


매일이 치고 박고 들고 나르고 오르는 등 여러가지 몸 동작을 통해 온몸의 근육들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한다. 근손실이 일어나지 않는다. 근육은 사용량에 맞춰 진화하며 최적화되어 간다. 쓰지 않는 근육은 퇴화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운동을 하는 이유이다. 하루종일 앉아서 손가락만 움직이는 직업을 가진 자들에겐 이두와 삼두, 복근을 사용할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들은 건강과 관상을 위해 운동을 해야만 한다. 근육이 사라지고 지방이 쌓이면 뼈에 부담을 주고 혈관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지금의 공구들은 과거에 비하면 상당히 편리하고 안전하지만 그래도 목수 일이 톱, 칼, 총(네일건), 망치등 위험한 공구들을 많이 다루기에 위험을 감수하며 일을 해야한다. 과거 수렵 시절 인간의 삶과 그 모습과 형태는 변했지만 그 본질은 상당히 닮아있다. 힘들고 위험하기에 하루하루에 더 감사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신은 인간에게 힘들고 위험한 삶을 감수하는 사람들에게만 삶의 진정한 의미에 다가갈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위험없는 삶이 가장 위험한 삶이다.


정략적이지 않은 삶이란...


정략적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정치상의 책략을 목적으로 하는 것 [네이버 국어사전]


우리는 모두가 정치인은 아니지만 모두가 정치를 하며 살아간다. 인간관계에서 정치가 없을 수가 없다. 정치의 목적이 무엇인가? 권력자가 되어 나라와 사람들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건 권력자가 먼저 되어야함을 전제로 한다. 정략적인 말과 행동들을 통해 점점 권력을 얻어가는 과정도 포함한다. 문제는 내가 정략적이 되면 상대는 나보다 더 정략적이되려고 한다는 것이다. 정략적임은 갈수록 교묘하고 치밀해지는 경향이 짙다. 끝이 없는 정략적 경쟁이 이어진다.


요즘 매스컴을 통해 국가 기간 업이 정쟁으로 비화되는 모습들을 보면서 결국 정략적인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기 합리화의 굴레 속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잘잘못을 따져 좀 더 공정하고 정의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시도는 중요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잘못을 인정하려하지 않고 그 잘못에 관용을 베풀려는 마음도 전혀 없으며 이런 모든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는 정략적인 태도가 문제이다.


누가 나의 합리성과 정당성을 짓밟고 부숴뜨릴려고 하면 나는 또 다시 그 상대의 약점과 헛점들을 파고들며 상대를 무너뜨리려 다음 기회를 엿보게 된다. 결국 이 싸움은 점점 더 교묘해지고 비열해지며 잔혹하게 변해간다.


겉은 합리(법)적이고 논리적이고 상식적인 것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 뒤에 숨겨진 의도는 그와 다른 경우가 적지 않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끊임없이 타인에게 이성적으로 보이려는 이유 (서평참조)이다. 이성(理性)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성적임의 근원이 문제이다. 이런 이성적인 태도는 양심이 아닌 욕망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상에 이성적인 사람들이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이성적이지 않은 이유이다.


내가 가장 빨리 선이 되는 방법은 무엇인가. 너를 악으로 만들면 된다. 그럼 나는 자연스럽게 선의 가면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내가 선이 되고 너가 악이 되어야만 끝이 날거라 생각하는 선악의 경쟁은 결국 둘다 선악의 오고가는 이원론적 굴레(관념)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정죄(定罪)의 굴레


당신이 선이 지향한다면 악을 논하지 말아야 한다. 그냥 당신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만 바라보고 그것을 묵묵히 실천해 나가기만 하면 된다. 신이 존재한다면 신은 당신의 모든 것을 보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 선인지 악인지는 인간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신은 인간에게 정죄의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 우리의 정죄는 삶이 끝나는 순간 이뤄지는 것이지 삶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될 수 없다. 왜냐 정죄(定罪 : 죄가 있다고 단정)가 정죄(淨罪 : 죄를 깨끗히 씻음)될 수 있는 기회는 삶 속에서 언제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삶이 끝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둠으로 어둠을 몰아낼 수는 없습니다. 오직 빛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증오로 증오를 몰아낼 수는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Darkness cannot drive out darkness, only light can do that. Hate cannot drive out hate, only love can do that"

                             

           - 마틴 루터 킹, Martin Luther King Jr -


너가 나를 정죄하면 나는 너를 정죄하려 할 것이다. 인간의 정죄는 계속되는 죄를 만들어갈 뿐이다. 예수가 왜 순순히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였는가? 그건 예수가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왔기 때문이다. 인간으로 인간을 정죄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군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 물리적인 힘을 행사하려 했다면 그는 성인이 아닌 역사 속에 수 많은 위인들 중 한명이 되었을 것이다. 그럼 우리는 지금 서기(AD) 2023년이 아닌 다른 해를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는 죄의 고리를 끊으려 했기에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보며 그들이 스스로 자신의 죄를 바라보도록 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의 죽음으로 인해 2000년이라는 삶을 영속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예수는 멍청했지만 영원한 존재가 되었고 우리는 정략적이지만 시간에 갇혀버렸다.


인기없는 삶이란...


인기가 돈이 되는 시대이다.


요즘 아이들의 장래희망 중에 유튜버라는 전에 없던 직종이 생겼다. 인기를 얻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어찌보면 유튜버가 가장 공정하게 인기를 얻는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 이건 순전히 불특정 다수의 공감과 흥미를 얼마나 많이 이끌어내고 신선하고 독특한 컨텐츠를 얼마나 많이 만들어 내는가에 의해 판가름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방법이 아니고서 인기를 얻는 방법은 자신의 노력 말고도 다른 많은 요인들이 작동한다. 세상에서 인기를 얻으려면 학문과 지식 혹은 기술과 예술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문제는 나의 학문과 지식 그리고 기술과 예술성을 판단한는 기준이 현재의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을 만드는 자들은 소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그들의 만든 시험과 테스트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틀에 담겨진 지식과 기술 그리고 예술만이 인정받고 자격을 부여하며 그 자격을 부여받은 자들만이 사회에서 공인되며 공인된 자는 대중에게 근거없는 신뢰를 준다. 사회가 부여한 신뢰가 개인간의 신뢰로 탈바꿈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회가 유지되고 시스템이 작동하는 원리이다. 문제는 이 사회의 시스템을 만드는 자들이 소수이며 이 소수가 어떤 가치관과 판단기준을 가지느냐가 이 신뢰가 지속될 수 있느냐를 판가름한다. 이 신뢰가 깨어지면 사회는 전복된다. 


인기 = 돈 = 힘


우리가 왜 유튜브와 인스타그램같은 SNS에 열광하는지는 이 인기가 가져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10만 100만 1000만으로 늘어나는 팔로워를 가진 유튜버들과 인플루언서들은 1억 10억 100억으로 돈(광고)이 늘어나고 그 수입에 비례해서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힘) 또한 늘어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기를 얻고자 함이 아니라 인기가 가져올 돈과 힘을 가지고 싶은 것이다.


문제는 인기를 얻으면 이 돈과 힘을 가지고 싶지 않아도 이 유혹이 끊임없이 찾아든다. 돈은 인기를 먹고 커지며 돈은 인기있는 곳에 몰린다. 돈 냄새가 많이 나는 곳엔 언제나 사람이 더 모이게 되는게 이 세상의 이치가 아니던가.


인기를 얻는 방법


인기(人氣 : 사람의 기운)를 얻는 방법에는 크게 두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우리의 욕망을 해결해 주는 방법이다. 이건 산업자본주의가 돌아가는 방식에 가장 근접한 방식이다.


타인의 욕망을 채워주고 불편함을 해결해주는 방법으로 타인의 인기를 얻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스티브잡스가 아이폰을 만들어 대중에게 보급함으로서 전화기와 컴퓨터를 하나로 통합시켜 우리의 생각치도 못하던 욕망을 해결해주었다. 전화기와 컴퓨터를 번갈아가며 사용해야하는 불편함을 해결해 줌으로서 삶의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킴으로서 전 세계인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고 그는 위인이 되었다. 그 인기의 결과는 애플이 지구에서 가장 큰 부와 힘을 지닌 기업으로 만들었고 그 대표이사(CEO)는 그 부와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물질을 통한 것 뿐만 아니라 지식이나 기술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타인에게 널리 많이 알려줌으로서 타인이 그것을 이용해 자신을 욕망을 채울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타인(다수)의 욕망을 해결해 줌으로서 나의 욕망을 채우는 방식이다.

스티브 잡스

두번째는 우리의 양심을 자극하는 방법이다. 이건 우리 인간의 마음 속에 내재된 의식을 건드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예수, 석가모니, 소크라테스, 공자의 말씀을 되새기며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욕망을 채우는 것과는 동떨어져 있음에도 왜 우리는 그런 말씀과 그들의 말과 행위가 고귀하다고 생각하고 숭배까지 하는 것일까? 이건 참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지만 아마도 인간이 이런 속성을 가진 것은 분명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모두에게 이런 선한 양심을 심어놓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들을 위인이 아닌 성인으로 기억하지 않았을 것이다. 욕망으로는 도저히 채워도 끝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자들만이 이 양심에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예수의 산상수훈 (山上垂訓,  Sermon on the Mount)

그렇기에 과거 이런 성인(聖人)들 곁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즉 인기를 끌었다. 그들을 추종하는 자들은 갈수록 늘어났으며 그들의 말과 행동은 그들을 따르던 제자와 추종자들에 의해 기억되고 기록되며 지금까지 전해 오는 것이다. 그 때 그 추종자들이 느꼈던 감정과 생각은 그들의 기록(경전, 고전)을 통해 현재 우리도 비슷하게 느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때의 그 생생한 육성은 아니지만 그 기록만으로도 상상과 명상을 통해 잔잔히 밀려오는 감동은 우리의 양심을 수시로 자극한다. 그들이 있었기에 인간 세상은 파멸와 공멸의 시간을 지금까지 지연시킬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선한 양심이 악한 욕망과 계속 맞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을 견뎌내야 한다. 삶을 견뎌내기 위해선 현실에서 취해야할 많은 것들을 무시할 수 없다. 우리가 인기를 얻고자 함은 이런 현실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돈과 힘이 없이는 삶을 견뎌내기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인기없는 삶을 싫어한다. 나의 말과 행동이 타인의 지지를 받아 호감과 신뢰를 얻어야만 내가 원하는 것을 취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인기에 취해가면 우리는 결국 양심에서 멀어지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준비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더 멀어지는 정도만큼 진리에 더 가까이 가게 된다.'"


                     - [톨스토이 고백록] 중에서 -


아이러니 하지만 우리가 삶에 집중하며 살아가다보면 어느 순간 양심에서 멀어지고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삶은 현실에 묶여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도 살아야 하고 삶의 의미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가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항상 욕망과 양심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처럼...


당신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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