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카페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나는 눈이 마주쳤고 잠시 동안 눈에 들어온 상대의 안녕을 확인하고는 자리에 앉기 무섭게 다시 일어나더니 어서 나가자고 나를 보챈다. 진정한 경상도 사나이다. 그와 나는 찻잔을 앞에 두고는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사이다.
나는 아직 자리에서 노트북도 끄지 않았는데 그는 이미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항상 서두르는 모습과 무심하고 심드렁한 표정 모두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에게는 그 어떠한 변화도 없었던 것일까? 겉으로 봤을 때 달라진 것이라면 예전보다 서두름과 심드렁함의 강도가 한 층 더 해진 것 과 아랫배가 좀 더 나온 것 말고는 달라진 건 없어보였다. 우리는 그렇게 카페를 나와 한참 동안 부산의 수영 시장골목을 돌아다니며 회포를 풀 장소를 물색했다. 그러다 자리한 어느 돼지 갈비집이었다.
"행님~ 담배 한 대 푸고 오께요"
니코틴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테이블이 세팅되는 동안 그는 밖으로 나가 에피타이저로 구름과자를 마시러 나갔다. 투명한 고깃집 유리창 밖으로 담배를 꼬나물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모양이있다. 어지간히 바쁜 모양이다. 테이블에 갖은 밑반찬이 깔리고 숯불이 들어올 때까지도 그는 밖에서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담배는 벌써 두 대째다. 그러다 식당 안의 나를 한 번 쳐다보고서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그제서야 피우던 담뱃불을 바닥에 떨구고 발로 지그시 밟아 비빈다.
"미안합미데이, 전화가 와가꼬, 그래, 행님 그 동안 어째 지냈습니꺼?"
"말하자면 길다 하하"
"아따~ 길게 말고 짧게 해보이소"
녀석의 급한 성격은 여전했다. 그는 집게로 고기를 불판에 얹기 무섭게 나의 5년간의 행적을 간략하게 요약해 주길 바란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알고 싶은지... 그리고 그는 자신이 알고자 하는 것이 빨리 캐취되지 않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단도직입(單刀直入)을 좋아한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 표정에서 드러난다.
나는 그가 원하는 방식대로 5분여의 시간 동안 5년간의 시간을 압축해서 요약했다. 그는 내가 말을 하는 동안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좀 전까지 이리저리 주변으로 움직이던 산만한 눈빛은 어느새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나의 스토리가 흡입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5분간은 나의 얼굴에 고정되어 다른 곳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적잖은 시간 글을 쓰면서 생긴 능력이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스토리텔링이다. 이게 먹힐지 몰랐는데 한국 와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면서 나의 대화에 집중하는 상대의 모습에서 나의 이야기가 예전처럼 식상하고 재미없진 않은 모양이었다. 글을 쓰는게 말을 하는 것과도 어느 정도 상관관계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에이고, 행님, 망해서 돌아왔구만'
그는 나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추측으론 그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젠 20대 청춘 때처럼 상대의 삶을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그런 나이가 아니었다. 이야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녀석은 다시 현실 감각을 장착했는지 불판 위의 고기로 시선을 옮기고는 빠르게 집게를 움직이여 고기를 뒤집는다. 그는 한쪽 면이 너무 익어 약간 타버린 고기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니는 어째 지냈노?"
나의 질문에 시작된 그의 5년간의 행적은 내가 상상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상상 그 이상이었다고 해야 할까. 예전부터 느꼈지만 그는 남 밑에서 일하는 것이 체질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꽤나 오랜 시간 직장생활을 한 게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그는 자신과 어울릴 만한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일은 좋게 얘기하면 에이전시, 약간 부정적으로 보면 브로커였다. 놀라운 사실은 그는 자신의 비즈니스를 하면서 또 남의 회사에서 직장생활도 병행하고 있었다. 그는 돈에 대한 집념이 남다른 녀석이었다. 돈 되는 일이라면 두 팔 걷어붙이고 모험적으로 달려들지만 돈 안되는 일에는 냉혹한 면이 있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안정적인 수입에 대한 갈망 또한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항상 빚과 함께 살아온 삶이 만들어낸 불안은 어른이 되어서도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고 난 후부터 그 불안은 더욱 심해진 듯했다.
"행님, 보험도 하나 있어야죠, 요즘은 다들 이래 살아요. 하나만 바라보고 우찌 삽니까? 뭐 또 사장이 그라라고 하니까"
능력자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기업에게 사람은 그저 노동력일 뿐이다. 사람의 가치와 노동의 가치는 분리되어야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섞어서 생각한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그는 사람의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었다. 사실 그 매력이 인간적인 부분이라기보다는 이해타산적인 부분에서 아주 크다. 누구라도 그와 좀 대화를 하고 알고 지내다 보면 그가 남과 다른 추진력과 아이디어 그리고 빠른 두뇌 회전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와 몇 번 대화를 나누다 보면 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그 또한 상대가 돈되는 사람이라 판단되면 호의적이고 적극적으로 다가간다. 그 능력 덕에 지인인 회사 사장이 개인 비즈니스를 하면서 자신의 회사일을 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는 프리랜서 사업가이면서 직장인이다. 월급을 받으며 사업을 한다. 사업 수익은 별도. 사업자는 아내의 명의로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사람의 호감을 사는 방법은 알아도, 사람을 사랑하는 능력은 결여되어 있는 듯했습니다]
-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중에서 -
며칠 전 읽었던 소설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왜 갑자기 이 소설의 한 구절이 떠올랐을까? 녀석은 그랬다. 어떻게 하면 사람에게 빠른 호감을 얻어내는지 너무 잘 아는 친구였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 그 호감은 끊어내기 힘든 이해관계로 엮여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 호감이 사라지고 반감이 생겨도 헤어질 수 없는 그런 관계가 되어버린다. 이건 마치 사랑은 식어버렸지만 수많은 복잡하고 현실적인 문제들로 엮여 헤어질 수 없는 남녀의 관계와도 같아 보였다. 사랑이 증오를 품게 된다. 애증관계이다.
그러고 보면 비즈니스와 남녀관계도 닮아있는 듯 하다. 사랑과 미움을 둘 다 품고 가야 한다. 호감으로 시작해 신뢰가 형성되고 그 신뢰가 사랑으로 이어지고 그 사랑이 영원히 지속되는 이상적인 관계는 현실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한국이라는 나라는 더욱 그러했다.
녀석은 내 주변 인물들 중에서 그런 한국인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친구였다. 브로커는 입심이 좋고 사람의 호감을 잘 사는 그에게 딱 맞는 일이었다. 누구 윗사람 눈치 볼 것도 없이 필요한 사람끼리 연결시키고 그 가운데서 깔끔하게 취할 것만 취하면 되는 일, 이건 좋게 말하면 비용 투자 없는 이상적인 비즈니스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만약 호감과 신뢰가 아닌 의심과 불신의 관계로 변질되면 비즈니스는 어느새 '사기'라는 단어로 바뀌어 버리는 특징이 있다.
욕심이란 게 끝이 없는 법이다. 그는 일회성 중개 수수료가 아닌 지속적인 게런티를 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여러 곳에 캐쉬 파이프를 꼽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또 거래 당사자들 마음도 시간이 지나면 변하기 마련이다. 그러면 삼자 간 신뢰 관계가 무너지게 마련이다. 비즈니스 맨과 사기꾼은 결국 종이 한 장 차이다. 잘되면 비즈니스 잘못되면 사기인 것이다. 녀석은 꽤나 많은 거래를 성사시켜서 적잖은 수입을 올리는 듯 보였다.
"행님, 내 오늘 저녁에 미팅 두 개나 잡혀있는 거 다 제끼고 행님보러 왔다 아이가"
시간이 금인 그에게 나는 어찌 보면 금쪽같은 자신의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지 확인하러 온 투자간담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1시간이 채 되지 않아 나온 갈비 2인분을 해치우고 된장에 밥까지 다 먹어치웠다. 사실 정확히 얘기하자면 고기와 밥 그리고 술은 그가 거의 다 먹었다. 내가 이야기를 늘어놓는 동안 그는 나의 얘기를 들으면서도 동시에 섭취하는 시간까지 아끼려는 듯 허겁지겁 먹어댔다. 우리는 5년 만에 만났지만 2시간 만에 헤어졌다. 5년전에는 퇴근 후 술집에 앉아 5시간이 모자라도록 술잔을 주고 받으며 돈되는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이였다. 그는 내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두 개 중 하나의 미팅이라도 성사시켜 보려는 듯 보였다.
"행님, 요거 잘 먹을게요, 그럼 잘 돌아가시고 또 보면 보입시더"
그는 내가 호주에서 선물로 가져온 영양제 통을 흔들어 보이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서둘러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메시지를 남겼다.
[니가 바라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못해 미안하다]
잠시 뒤, 그의 메시가가 들어왔다.
[형님, 사람마다 다 각자의 모습대로 사는 거 아니겠습니까, 오랜만에 보니 좋네요, 한국서 좋은 시간 보내고 가이소 하하]
그의 답장은 모범 답안처럼 날아왔지만 내가 그와 함께한 시간은 그가 보낸 메시지 뒤의 생각을 유추하게 만들었다. 오랜 시간이 만든 상대방의 이미지는 당장 눈에 보이는 모습과 말로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관계의 시간이 흐르면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표현하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 그 짐작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어쨌든 그 짐작이 나에겐 사실이 되어버리니까. 그 사실은 그 상대가 그동안 내게 보여준 세월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오늘 다시 만난 이 자리에서 그것이 변함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그의 이런 모습은 그가 살아온 환경과 그 속의 수많은 관계가 만들어낸 모습임을 모르지 않다. 아버지의 잇따른 사업 실패로 떠안은 커다란 빚, 그리고 불어난 식구 그가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아진 만큼 그는 이해(利害) 관계가 없는 관계 속에서 시간을 보낼 만한 그런 여유, 아니 그런 남들이 누리는 호사 따위엔 관심이 일도 없었다. 그에게 관계는 돈이었다. 그런 노력의 결과였을까. 그는 이제 빚도 다 청산하고 이제 조금씩 부가 쌓여가는 것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5년 전 보증금 4000에 월세 9만 원의 20평짜리 LH 임대 아파트에서 지금은 33평의 신축 아파트로 이사했단다. 이제 곧 학교에 들어가는 딸 하나가 마음에 걸리는지 더 열심히 번다.
여태껏 몰랐지만 그날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는 결혼 후 여러 번의 시험관 수정으로 아이를 가지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결국 그와 아내는 아이 가지는 것을 포기했고 시험관을 하는 동안 망가진 심신을 회복하려 요양 여행을 떠났다. 둘은 친할머니가 살고 있는 전라도의 어느 인적 없는 섬으로 들어 갔다. 인가라곤 12 가구밖에 없는 작은 섬에서 며칠을 보냈다. 그리고 섬을 떠나기 전 날 이른 새벽이었다. 그가 그날따라 이른 새벽 잠에서 깨었다. 집 앞마당에 나와 담배를 한 대 피우며 바다를 내려다보다가 어둠 속에서 빛나는 십자가를 발견했다.
그가 그때 왜 그랬는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눈에 들어온 십자가를 따라 외딴섬의 작은 교회 예배당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예배당 한 구석에 앉아 앞에 걸려있는 십자가를 멍하니 올려다봤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두 손은 다리 사이에서 서로를 맞잡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기도했다. 그리고 예배당을 나오는 길에 호주머니에 있던 오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옆에 헌금봉투에 넣고 아내의 이름을 적어 함에 넣고 나왔다. 그리고 둘은 다시 부산으로 다시 돌아왔다.
"자기야! 나 임신했어!"
"뭐~ 진짜 그게 말이 돼? 정말이야?"
그리고 다음 날, 울려온 전화, 할머니의 전화였다. 그날 교회에 두고 간 헌금봉투를 발견한 목사가 할머니를 통해 그의 내외의 소식을 전해 듣고 매주일날 12 가구가 모인 작은 예배당에서 그와 그의 아내를 위해 중보기도를 해주었다고 한다. 그의 아내도 항상 교회를 다니며 기도했고 그의 어머니도 그리고 그의 할머니도 항상 그와 그의 아기를 위해 기도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밤 모두의 기도에 더해 그가 처음으로 했던 기도가 마침내 신을 감동시킨 모양이었다. 그렇게 누구도 믿기 힘든 자연 임신으로 건강하게 아이까지 출산했다.
"니가 아무리 엇나가려 해도 잡아주는 이들이 있어서 그런 거다"
"하아~ 뭐, 내도 그 딴 거 안 믿었는데 이제는 믿지 못해도 교회는 안나갈 수 없게 됐네요 하하"
삶이란게 뜻대로 되지 않지만 또한 뜻하지 않던 일도 생기게 삶이다. 그래서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삶은 논리적 과학적 그리고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누가 감히 삶을 논리와 과학 그리고 이성으로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때로는 그 보이지 않는 힘이 존재함을 믿을 수밖에 없게 된다.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한다. 어떤 인간은 저렇게 하는 짓이 개차반인데 어찌 저리도 남 부럽게 보란 듯이 잘 살까? 물론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내가 모두 다 들여다볼 순 없지만 대체적으로 하는 일마다 잘되고 법적으로 문제 되진 않지만 누가 봐도 뭔가 얄미운 구석이 있는데 그게 또 사람을 부럽게 만드는 인간들을 보게 된다. 예전에는 그런 사람을 보면 '저 사람도 언젠간 나락으로 떨어질 날이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아마도 저 사람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 주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자들는 자신이 잘난 줄 알고 살지만 그건 다 보이지 않는 타인의 기도와 간절함 때문이지 않나 생각하게 된다. 본인이 덕을 쌓지 않아도 다른 누가 덕을 쌓고 선을 행함이 그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걸 믿게 된다. 누군가(가족이는 지인이든 혹은 잘 모르지만 그를 위해 기도하는 불특정 다수이든) 그 덕이 없는 자를 위해 기도하면 아마도 그것이 그에게 전이되어 채워지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세상에 나쁜 놈들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기도빨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악덕이 쌓여 덕을 넘어서는 순간이 오면 그 기도빨은 이제 더 이상 먹히지 않으리라.
[형님~ 잘 가이소 인자 또 언제 봅니까?]
[나도 몰라, 會者定離 去者必返(회자정리 거자필반)]
[어렵네... 이 형님 진짜...ㅋㅋ 우쨌든 잘 사이소]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카톡의 메시지가 언제 또다시 이어질지 알 순 없다. 기약은 없지만 인연이라면 다시 만날 것이고 아니면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하지만 이어질 인연은 언젠간 다시 만난다는 말을 믿게 된다. 인연에는 시절이 있지만 시절은 언제나 되돌아오듯이... 기도해 본다. 그와의 인연이 다시 이어지길.
떠나보니 알게 되더라. 한국을 떠나온 5년간의 관계의 공백은 그 동안의 관계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아주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해(利害) 관계를 떠나 지내다 보면 이해(利害) 관계가 이해(理解) 관계를 형성했는지 알기 힘들 때가 있다. 그땐 관계를 멈추고 오랜 시간 흐르고 다시 연락하면 알게 된다.
우리는 항상 이해(利害)와 이해(理解) 사이에서 살아가지만 정작 그것이 어떤 이해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며 살아가는 것인지도...
*會者定離 去者必返 (회자정리 거자필반) :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떠남이 있으면 돌아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