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술에 대한 관심이 책으로 이어졌다. 요즘 뭉크를 읽고 있다. 흥미로운 그의 그림만큼 흥미로운 역사를 가진 인물이다. 나는 그림에는 젬병이지만 예전부터 생각과 감정을 추상적인 그림으로 표현하는 화가들의 세계는 어떨까에 대해 관심이 많다. 생각과 감정을 글로 표현하는 작가와 그림으로 표현하는 화가는 무엇이 다를까. 나의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크게 다르지 않다. 사물과 대상의 본질을 알면 그 표현(형식)의 방식에 차이만 있을 뿐이다.
[절규] 뭉크의 대표작
책[유성혜, 클래식 클라우드 - 뭉크]을 완독하면 다음 번엔 그의 이야기를 이어가보려 한다. 지금 써내려 가는 글은 독후감은 아니다. 책을 읽다 서두의 구절이 깊은 상념들을 불러 일으켰다. 그것들을 쓰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서 잠시 책을 덮고 글을 써내려 간다.
나는 그림은 잘 못 그리지만 사진 찍는 것은 좋아한다. 그리고 나는 주로 아웃포커싱으로 사진을 찍는다. 사진을 찍을 때면 항상 내가 관찰하는 피사체에 초점을 맞추고 나머지 배경은 흐릿하게 사진을 찍는다. 요즘은 핸드폰 사진기 기능이 좋아서 이런 아웃포커싱 효과를 잘 구현해 낸다. 길을 걷다가 눈에 들어오는 수많은 풍경들 속에서 무언가 하나에 시선이 집중되면 핸드폰 화면에서 내가 관심을 가지는 피사체를 터치해 그 사물을 선명하게 만들고 나머지 배경 혹은 다른 피사체들은 흐리게 처리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집중하는 피사체와 배경의 원근감을 만들어 줘야 한다. 그래서 나의 사진은 항상 피사체의 상측면 혹은 하측면에서 찍곤 한다. 그럼 배경과 피사체의 원근감이 생겨 피사체와 배경이 명확하게 구분된다.
이런 나의 사진은 관심사와 관점을 드러낸다. 시시각각 눈 안으로 들어오는 수많은 이미지 정보들 중에서 나는 내가 본 것, 즉 관심을 가지는 것만 보게 되는 것이다. 이건 사람들 마다 각기 다를 것이다. 같은 풍경을 봐도 누군가는 호수에 초점을 맞추고 누군가는 눈 덮인 먼산에 시선이 집중될 수 있다. 그래서 사진작가들의 사진을 보면 그 사진작가는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가 보이게 된다.
Timber (아웃포커싱)
하지만 그림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화가 또한 사물과 풍경 혹은 경험한 상황들을 보고 그것들 중에 관심이 집중된 것을 그림으로 표현하지만 그 표현은 있는 그대로가 아닌 화가의 생각과 감정까지 반영되게 된다. 사진은 작가의 관심 대상만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며 보는 이로 하여금 정지된 이미지 속에서 생각을 이끌어내게 하는 반면 그림은 화가의 관심 대상뿐만 아니라 그 대상(피사체)을 바라보는 화가의 감정과 생각까지 느낄 수 있다.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을 그린다. 그래서 화가의 그림은 사실적이기보다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예술에 가깝다. 만약 화가가 사진처럼 사실적으로 그림을 그린다면 그건 예술이라기보다 기술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사실에 가깝게 그리는 것은 인간 보다 화소수가 높은 카메라가 더 잘하기 때문이다.
"나는 보이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본 것을 쓴다"
- 글짓는 목수 -
나 또한 그렇다. 나는 글을 쓸 때 내가 보고 경험하고 느낀 것을 쓴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을 모두 글로 남길 수 없다. 우리가 본 것을 모두 텍스트로 전환하려면 그 용량은 엄청 비대해질 것이다. 동영상이 텍스트보다 데이터 용량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다. 동영상은 시야(렌즈)에 들어온 모든 정보를 데이터로 전환하기 때문이다. 시야(렌즈)에 들어온 모든 장면을 600 fps(프레임/초) 속도로 저장한다. 그래도 모든 것을 다 담을 수 없다. 왜냐 렌즈 뒤의 세상에서 벌어지는 것들은 저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진과 영상은 보이는 모든 것을 정확하고 선명하게 거짓과 꾸밈없이 저장한다. 하지만 화가와 작가는 그림과 글로 자신이 본 것을 자신의 프레임(관념)을 거쳐서 표현한다.
보이는 것은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너무 많기 때문이다. 요즘같이 영상과 이미지와 텍스트가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삶의 의미가 퇴색되어 가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자신이 보는 것은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보이는 것들 중에서 자신이 보는 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 무의미한 세상 속에서 의미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성경의 본질이 무엇일까?"
얼마 전 모임에서 지인들과 성경이 품고 있는 본질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성경 속에는 수많은 진리의 말씀들을 담고 있다. 성경 속 이야기를 축약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단어들이 있겠지만 나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성경의 본질을 가장 잘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뭐 누군가는 다른 가치를 더 의미 있게 생각할 수 있다. 사람마다 품고 있는 구절들이 다르다. 성경 또한 수많은 의미 있는 가치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 의미를 두려하면 의미는 사라진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 으뜸은 사랑입니다"
- [고린도전서 13:13] -
모두가 성경의 본질인 사랑에 대한 의심은 없었다. 그런데 이 사랑의 실천 방식에 대한 생각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지 못했다. 성경을 보고 깨닫는 본질(진리)은 크게 다르지 않으나 그 본질을 행함에 있어서는 각자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지 못했다. 내가 보고 배우고 걸어온 길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자신이 걸어온 길을 타인에게 권장하고 혹은 강요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이에게 같은 길을 주시지 않으셨다. 각자가 이 땅에 와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표현하는 방식은 모두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각자 다른 소명을 가진 것이다. 사랑의 언어(인정하는 말, 함께하는 시간, 선물, 봉사, 스킨십 등)가 사람마다 다른 것처럼. 과거 예수도 항상 제자들에게 본질을 가르치려 했지 그들에게 디테일한 행동 양식을 가르치지 않았다. 본질을 꿰뚫어 보는 자는 여러 가지 다양한 행동 양식 속에서도 그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예배드리고 매일 말씀 읽고 기도하는 거예요"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그냥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내는 거 아닐까?"
성경의 모든 내용을 기억하고 살아갈 수 없다. 뭐 누군가는 성경의 모든 내용을 모두 달달 외울 수 있는지 모르겠다. (목회자나 성직자는 그래야 할지도... 힘들겠지만)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신앙도 우리가 학교에서 받은 교육처럼 주입식으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교회는 항상 강조한다. 매일 성경 말씀을 보고 예배에 빠지지 않고 항상 두 손 모아 기도하라고' 물론 이 훈련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만약 직업이 성직자나 목회자라면 이건 당연한 의무이자 책임이 될 수 있지만 일상(실전)을 살아가는 우리는 삶 속에서 이 훈련보다 실전의 삶이 더 중요하다. 매일 읽고 예배하는 것보다 읽은 것을 삶 속에서 한번 더 실천에 옮기며 사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그것이 예수가 행하고자 했던 사랑이 아닐까. 과거 예수가 죽고 그의 제자들은 그의 생전의 말씀을 마음속 깊이 품고 발길을 옮겨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가 그의 예수가 걸어왔던 삶을 따라 살았다. 그렇게 복음을 알리는 외롭고 고단한 방랑자의 길에 올랐다. 그들이 가는 길에는 성경책도 없었고 기도할 예배당도 없었다. 하지만 이미 기억 속에 남아있는 예수의 말과 행동들을 떠올리며 언제 어디서든 스스로의 마음과 언행을 다잡았을 것이다.
형식과 본질 사이
자신이 깊이 깨달은 진리는 더 이상 읽지 않아도 마음속 깊이 품게 된다. 이제는 삶 속에서 그것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만 남았다. 천주교는 일정기간 동안의 교리교육 기간(약 6~7개월)을 이수하고 나면 교회에 나오는 것은 성도의 자유의사에 맡긴다고 한다. 그러니까 오라 마라 누가 계속 권유하거나 부추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훈련이 된 사람은 스스로 알아서 신앙을 지속시켜 나가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천주교는 개인의 독립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반면 개신교는 공동체적인 신앙을 강조한다. 뭐가 맞고 틀리다를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나는 이 두 가지가 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항상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성경 속의 구약과 신약을 나누는 가장 큰 특징을 하나 꼽으라면 무엇일까?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지만 예수 이후의 신앙은 율법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예수는 형식보다 더 중요한 것(본질)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행보를 보였다. 그랬기에 예수는 형식주의에 갇혀있던 과거 제사장들과 종교인들의 눈엣가시가 되었다. 간혹 습관처럼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자들이 본질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보게 된다. 그건 형식과 본질을 헷갈리는 것이다.
이번에 한국을 길게 여행하며 적지 않은 가나안(예수와 하나님을 믿지만 교회를 안 나가는 자들) 성도들을 만났다. 그들은 과거 모두 교회에 몸담고 있던 자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들이 교회를 떠난 이유가 대부분 그런 이유들이었다. 교회에서 습관처럼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실제 그들의 삶과 행동에서 보이는 모습과의 괴리가 그들이 교회를 떠난 이유였다. 형식과 시선에 얽매여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신앙은 종교활동에 가까웠다. 형식에 너무 얽매인 신앙은 형식이 본질처럼 되어버렸다. 주객전도이다. 신앙의 시작은 타인을 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을 봐야 함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과거 임마누엘 칸트는 얘기했다. 진리를 알게 되면 선을 행하고 그 다음엔 다양한 형태의 예술로 그 진리를 승화시키는 것이라고. 여기서 진리는 본질이다. 본질을 깨달으면 사람은 선하게 되고 선한 자가 그 본질을 다양한 형태의 예술(기교)로 표현해야 한다고 했다. 이 표현하는 방식(형식)은 문학(글), 미술(그림), 음악(소리), 무용(몸짓), 영상(종합)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나만 알고 있는 진리가 아닌 많은 이들이 알 수 있게 쉽게 혹은 감동과 상상을 담은 형태의 작품들로 그들의 마음속에 울림과 떨림을 선사하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은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표현(형식)의 다양성
성경을 읽는다고 모두 깨닫는 것은 아니다. 또 읽는다고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고 안다고 다 이해한 것이 아니며 이해했다고 모두 다 행하는 것이 아니며 행한다고 그것을 타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읽고 알고 이해하고 행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자가 알 수 있는 형태로 바꿔서 알려줘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술 즉 각자의 형식으로서 표현되어 그것이 성경 속 말씀인지도 모르고 삶 속에서 그것이 서서히 스며들고 있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 자가 나중에 성경을 읽게 된다면 엄청난 감흥이 밀려 올 것임음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하기에 계속 쇠귀에 경읽기처럼 들어오지도 않는 글을 억지로 읽으며 세뇌만 시키려 한다. 나의 언어로만 타인에게 얘기하는 것이다. 간혹 우리는 화려한 형식과 기교에만 치우친 예술을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건 예술가가 다른 무언가에 취해 본질을 망각한 것이다.
삶의 진리(본질)를 깨달은 예술가들의 작품은 시대를 초월하며 사람들에게 귀감이 된다. 그때 그때 자극적이고 흥미 있는 시절 유행(트렌드)은 금방 금방 잊히지만 진리를 담은 예술은 세월을 흐를수록 그 가치가 더해진다. 성경 또한 어찌 보면 진리를 담은 가장 대표적인 문학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그 표현 방식이나 서술과 묘사 형태가 지금 현시대와는 조금 동떨어져 있을 뿐이다. 그래서 경전은 재해석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목회자와 성직자들이 해야할 일이며 그것에 능해야 한다. 어떻게 지금 현실의 삶과 경전의 진리를 잘 연결하고 융합하는가 그것이 좀 더 많은 이들로 하여금 진리를 알아갈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본질과 형식
나는 성경의 본질은 사랑이라고 얘기했다. 사랑하면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 그래서 사랑은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면 보이는 데로만 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도 믿게 되는 신비한 경험을 하지 않는가.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사랑이 믿음을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믿음이 사랑을 지속하는 원동력이 되고 그 위에 같은 소망이 얹히면 서로의 관계는 더 이상 무너질 수 없는 철옹성이 되는 것이다.
이 사랑의 본질이 한 사람 혹은 소수에게 향하면 남녀 간의 가족 간의 혹은 이웃 간의 사랑이 되고 세상을 향하게 되면 예수 혹은 다른 성인들처럼 만인을 향한 사랑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보이는 것들(형식)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며 너와 내가 함께 보는 것(본질)으로 지속되는 것이다.
과거 예수의 만인을 향한 사랑은 처음엔 아무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예수가 했던 가장 큰 일은 그가 제자들에게 사랑의 본질을 볼 수 있는 눈을 길러준 것이 아니었던가? 세상에 눈길을 끄는 수많은 보이는 것들에 현혹되어 살아가는 우리는 정작 우리가 보아야 할 것들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