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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이에서

시작과 끝 사이

[토마스 복음서]를 읽다가... - 열 여섯 번째 이야기 -

by 글짓는 목수

♩♬ 현실 대신 꿈속에서 살아가죠

꿈이야 말로 진실된 환상이에요

착각은 흔한 거지만 난 꿈속에서 살아가려 해요

내가 머물기 좋아하는 멋진 세상이에요

그래서 난 꿈속에서 살아가려 해요

비록 그것이 환상일지라도. ♪♫


- Richard Sanderson [Reality] 가사 중에서 -

[링크 음악과 함께 읽으시면 더 큰 공감이 오실 거예요 ^^]


현실이 고통스러운 것은 꿈을 꾸지 않기 때문이다. 꿈을 꾸는 자는 현실에서 동떨어져 사는 것 같지만 사실 꿈꾸는 자만이 현실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법이다.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자들이 많아지면 세상은 아름다워진다.


'엇!" 누구나 들으면 아는 음악이다. 로맨스 영화의 고전이 된 라붐(La Boum _1980)의 OST로 유명한 [Reality]는 이제 우리의 기억 속에 클래식 음악으로 기억된다. 이 음률과 가사를 듣고 있으면 메마른 가슴에 보슬비가 내리듯 촉촉하게 감성에 젖어든다. 이 영화와 OST에 오버랩된 소피마르소는 당대의 뮤즈로 등극했다. 그리고 그녀는 초등학생 시절 남학생 책받침 여신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특히 남주가 그녀에게 헤드폰을 씌워주는 명장면은 아직도 수많은 곳에서 회자되고 패러디되는 장면이다. 어둠이 깔린 밤거리를 달릴 때 이 음악을 반복해서 들으면 왜 그렇게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기분이 울적할 땐 이 음악을 자주 듣게 된다.


오늘은 이 노래 속 가사가 나에게 상념을 던져주며 글을 쓰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잠과 꿈


인간은 꿈을 꾼다. 인간이 왜 일생의 1/3을 잠을 자며 살아가야 하는지에 궁금하지 않은가? 그래서 검색을 해보니 "잠은 뇌가 낮 동안 수집한 기억을 정리하는 시간'(구글 참조)이라고 한다. 하지만 현대인은 잠을 줄이고 더 오랜 시간 현실 속에서 보내려 한다. 뇌가 정리할 시간이 없어서일까 현대인의 뇌는 항상 복잡하고 어지럽다. 하지만 그것이 성공으로 가는 길이고 내가 남들보다 더 우월해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잠을 줄여야 꿈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잠을 자야 꿈을 꾼다는 사실을 망각한 체 잠을 줄이며 꿈을 이루려 한다. 잠과 꿈은 동행하는 것이지만 어쩌다 서로 배격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잠을 줄이고 성공을 꿈꾸다'는 틀린 말은 아니다. 과거 나 또한 이 말을 철석같이 믿으며 살아왔던 인간이다. 잠을 줄이고 일하고 공부하고 노력하면 현실에서 이루고자 하는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하루 24시간을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 나의 꿈이 실현되느냐 아니냐를 결정한다고 보았다.


과연 그럴까? 사실 우리가 말하는 꿈이란 욕망실현의 다른 말이 아닐까. 그 꿈은 끝이 없는 꿈이다. 욕망과 꿈을 헷갈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꿈을 이루는 과정처럼 보이지만 끊임없는 욕망 충족의 과정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우리는 그것이 꿈을 이루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사는 것이다. 현실의 보이는 것들 혹은 자신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에 끌려다니는 것이 꿈을 이루는 과정이라 착각하고 있다. 꿈을 잘못 정의하고 하고 있다.


꿈은 긍정적인 어감을 가지고 있다. 꿈을 꾸면 행복해야 한다. 동의하는가? 그런데 꿈을 꾸는데 괴롭고 힘들고 두렵다면 그건 악몽이 아닌가. 꿈은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항상 꾸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꿈을 이루는 과정이 고통의 연속이라면 이건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고통 뒤에 찾아오는 잠시 동안의 희열과 성취를 얻고자 함이 꿈의 목적이라면 그 꿈은 악몽 속에서 잠시 느낄 수 있는 일시적인 쾌락이 아닐까 그리고 다시 또 더 큰 쾌락을 향해 또다시 악몽 속으로 자신을 내던져야 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마태복음] 18:3 -


어린 시절 학교에서 소풍 가는 날이 정해지면 며칠 전부터 계속 설레고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 당일 소풍날 비록 비가 내려 소풍날 우울해질 수는 있지만 소풍날이 다가오기 전 며칠 동안은 계속 소풍 갈 생각으로 가득 차 반찬투정을 하다 엄마에게 혼이 나도 소풍날 엄마가 싸줄 맛난 김밥과 간식들을 생각하면 그 잠시 동안의 혼쭐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꿈은 이루는 그날이 아니라 꿈은 항상 꿔야 일상이 즐거워지는 법이다. 그러면 일상이 천국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도 아직 세상에 물들지 않은 아이들과 같지 아니하며 안된다고 계속 강조했다. 아이들은 그냥 눈앞에 있는 것들에 함께 있는 이들에게 집중하고 항상 현재에서 기쁨과 슬픔과 즐거움을 느끼며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시간이 그들에게 전부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한다. 현재에 있지 못하고 항상 과거와 미래에 머물고 있다. 그러니 현재는 항상 고통이 되어버린다. 과거를 반복하지 않으려 현재의 고통을 견뎌야 한다고 하지만 다가오는 미래 또한 현재의 고통이 되는 도돌이표 같은 삶을 살아간다.

나도 지금 동이 트지 않은 이른 새벽, 일터로 나가기 전 피곤한 몸을 일으켜 조용한 곳에서 글을 쓰고 있다. 나는 지금 글을 쓰며 몰입하는 이 순간을 즐기고 있다. 예전에 글을 쓸 때는 글 쓰는 시간을 견딘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글을 써서 현실에서 무언가를 이뤄내야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힘들게 견디며 쓰다 보면 꿈을 이루는 날이 올 거야라고 생각하며 쓰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젠 생각이 바뀌었다. 그땐 꿈을 이루기 위해 쓰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꿈을 꾸기 위해 글을 쓴다고 할까? 언제부터인가 쓰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되었다. 나의 글을 읽는 독자분들은 아시겠지만 나의 글은 상상에 기초해서 글을 많이 쓴다. 그 말인즉, 나는 마치 꿈을 꾸는 듯 글을 쓴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나는 사실 잠을 잘 때 꿈을 잘 꾸지 않는다. 꿔도 깨어나면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오히려 깨어있을 때 마치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게 바로 글을 쓰며 몰입을 하고 있는 시간이다.


어쩌면 언젠간 내 글이 책이 되고 또 많은 이들에게 읽기게 될 날이 올지 모를 일이다. 아니라고 해도 나는 쓰는 동안 이미 모든 꿈을 다 꾸었기에 미련은 없다. 현실을 살면서도 항상 꿈꿀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된다.


'No pain No gain'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본 말일 것이다. 잠을 자지 않고 고통을 견디며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노력하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진다. 그 보상은 금전적, 물질적, 혹은 정신적(일시적)인 것을 동반한다. 사실 요즘은 이런 말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다. 왜냐 사회 불평등이 심화되며 '열심히'라는 말이 통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열심히 사는 자가 마치 호구가 되는 것처럼 되어버린 세상이다. 이건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을 통해 가져가는 보상을 의미한다. 그 희생에 합당한 보상이 주어진다면 사회의 불평등이 심화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희생양이 된다.


뭐 어쨌든 더 많은 시간을 일하고 공부하는데 쏟아부어야 꿈을 이룬다는데 큰 이견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일과 공부에 쏟는 시간은 한 인간의 지식이 늘어나고 기술이 전문화되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렇다고 그 인간의 인성이 고양된다고 볼 수 없지 않을까. 우리는 지식과 기술의 습득 이전에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특성인 인성(이성과 감성)을 먼저 고양해야 한다. 그리고 과정은 전 인생에 걸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이것들은 돈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이 사는 세상이 인간답지 않게 변해가는 것이다. 인간이 사는 곳임에도 마치 차가운 기계들과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부모의 꿈


하지만 요즘 아이들을 보면 조기교육이다 뭐 다해서 아직 세상이 뭔지도 모르는 아이에게 의사의 꿈을 집어넣는 부모들을 보게 된다. 한국이나 호주나 어딜 가나 왜 그렇게 다들 자녀 의사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있는지 모르겠다. 아직 인간도 되지 않은 아이들이 의대진학반에 들어가 의사가 뭔지도 모르고 의사가 되려 한다. 부모의 꿈이 아이의 꿈이 된다. 현실의 꿈만 꾸는 어른이 꿈을 꿔야 할 아이들에게 현실만 주입하려 한다. 그런 아이들이 자라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생명연장의 꿈을 이루는 세상을 만들지는 모르겠지만 지옥 같은 세상에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대부분의 시간을 일(돈)과 학업과 욕망을 쫓는 자가 인성을 갖춘 인간이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현실의 세상은 인간의 꿈을 먹고 끊임없이 발전하고 성장한다. 그건 반대로 생각하면 나의 꿈이 줄어듦으로써 세상의 꿈을 실현해 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과거 10년을 넘게 매일 야근과 잔업으로 하루 14~15시간씩 회사에 남아 일을 하며 보낸 시간이 나에게 가져온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봤다. 그때 기계처럼 쉼 없는 일 속에서는 나의 모습 또한 기계처럼 차갑게 변해가고 있었다. 기계도 기름칠을 하고 부품도 갈아줘야 계속 돌아갈진대 인간은 오죽할까.


뇌가 기억을 정리하고 몸이 재충전을 할 시간이 없는 삶은 항상 불안과 신경과민 그리고 역류성 식도염과 고지혈증을 가져다주었다. 몸과 정신이 병들어감을 느꼈다. 돈으로 이룰 수 있는 꿈에 다가가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나의 육체와 정신은 더 이상 꿈꾸지 않았다. 그리고 세상은 더욱더 그것을 강요하고 있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감을 유혹하는 더 좋은 것(물질)들과 편리함을 쫓는 것이 마치 꿈인 양 좇게 된다. 다들 그렇게 살아가니 나만 그렇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누가 이상한 것일까 헷갈린다. 세상이 권장하는 꿈은 달콤해 보이지만 주어진 달콤함 뒤에는 더 달콤한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다. 자신 안에서 스스로 달콤함을 찾고 만드는 법을 알지 못하게 한다. 세상이 말하는 꿈에 도착하면 새로운 세상이 올 줄 알았다. 하지만 그 꿈에 도달하니 더 멀리 더 좋은 꿈이 보이지 않은가


"언제 새 세상이 오리이까? 그(예수)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바라는 것은 이미 와 있노라. 단지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할 뿐이니라"

- [도마복음] 51장 -


과거 예수도 제자들이 끊임없이 물어오는 천국에 대해 항상 이런 식으로 알려주었다. 아마 당시 제자들은 그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데 왔다고 하니 미치고 답답할 노릇이다. 사기꾼 같기도 하고 그런데 뭔가 울림은 있고 미스터리하다.


우리는 어쩌면 꿈을 꾸면서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현실이라는 허상에 현혹되어 우리가 그토록 얻고자 하는 영원한 안식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쾌락과 편리를 그것과 바꾸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모두가 같은 꿈을 꾸고 비슷한 욕망을 향해 달리니 경쟁은 치열해지고 삶은 전쟁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 ♫ 당신을 만난 건 우연이었죠

그때는 몰랐어요

그것이 내 삶을 영원히 바꿔버릴 것이란 걸...

Met you by surprise

I didn't realize

That my life would change for ever ♩♬


- Richard Sanderson [Reality] 가사 중에서-


우리에게는 이 현재의 평안과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는 계기가 있어야 한다. 그 계기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사건사고(경험), 혹은 누군가를 통해(관계) 혹은 스스로 훈련을 통해(각성, 깨침)서 변화될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주변을 환하게 만들고 또 다른 변화를 이끌어낸다. 이것이 과거 성인들이 걸어간 길이 아닐까. 그토록 원하는 것들이 이미 자신 안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삶이 바뀌게 된다.


우리는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많은 부와 명성을 얻는 것이 훌륭한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이 땅에 온 이유는 훌륭한 어른이 되고자 함이 아니라 비록 몸은 늙고 병들지라도 마음과 정신은 아이 같은 순수함과 꿈을 가진 (어른) 아이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시작을 발견하였느냐? 그러하기 때문에 너희가 끝을 구하고 있느냐? 보아라! 시작이 있는 곳에 끝이 있을지라. 시작에 서있는 자여, 복되도다. 그 자야말로 끝을 알 것이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할 것이라"

- [도마복음] 18장 -


우리는 아기로 태어나 죽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꿈을 꾼다. 그 꿈은 내가 의도한 것도 아니며 통제할 수도 없는 것이다. 누가 자신이 꾸고 싶은 꿈을 꾸며 잠을 잘 수 있는가? 꿈은 나의 통제영역 밖이다. 삶 또한 마찬가지 아니던가 삶을 어느 정도 살아본 자는 알 것이다. 삶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음을... 이렇듯 우리가 삶을 시작하고 삶을 마감하는 날까지 끊임없이 꿈을 꾸는 것은 우리가 의도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존재가 의도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영역이 존재하는 것은 어쩌면 그 보이지 않는 존재가 우리의 삶을 관장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꿈(잠, 몰입, 상상등)을 줄이며 살아가는 인간은 그 존재와 멀어지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삶의 시작(알파)과 끝(오메가) 사이에서 계속 꿈을 꾸어야 한다.


'꿈속에서 살고 있네'라는 말은 조롱 섞인 농담이 아닌 정말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도...


[알파와 오메가] 밀워키 성 바울로 성공회


"나는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끝이라"


- [요한계시록] 2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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